[Opinion] ≪불량소녀들≫ 착하기를 거부한 ‘못된걸’들에게서 불량의 가치를 보다 [도서]

글 입력 2018.10.01 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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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여자답지 않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애교가 없다거나 살갑지 않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핀잔을 듣곤 하였다. 그저 내향적이고 낯을 가리는 성격이었을 뿐인데, 마치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다는 듯이 혼나는 것이 싫었다. 사회화 과정을 지나면서 끊임없이 ‘여성성’을 학습하고 요구받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나를 부정하는 사회의 시선을 전면적으로 반박하고자 하는 욕구가 내내 자리했다. 자신의 욕구를 거침없이 표출하는 드라마 속 여성 악역에게 쾌감을 느꼈고 또래 남자 친구들이 놀리면서 불렀던 ‘조폭 마누라’라는 별명이 왠지 기분 좋았다. 좋은 뜻으로든 나쁜 뜻으로든 나의 존재가 인정되고 나의 욕구에 반하는 것에 인상을 찌푸릴 수 있는 ‘불량소녀’의 영역은 그래서 매력적이었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커가면서 무언가를 계속 억제하기를 요구받는 여자아이들, 특히 가부장적 여성상에 부합하지 않아 쉽게 배격되는 여자아이들이 ‘불량소녀’라는 이름표에 불가항력적인 끌림을 느낀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단순한 일탈이 아니었다. 사회에 의해 부정되는 자아를 지켜낼 수 있는 구원책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며 존재가 인정되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필요했다. 자신을 불량하다 할지라도 어쨌든 간에 자아가 규정되는 것부터가 반가운 것이다. 그렇게 불량이라는 범주에서 그들 간의 보이지 않는 연대가 발생한다. 사실, 그 연대는 100년 전 경성에서 스스로 불량하기를 자처했던 자들에게서 이미 나타난 바가 있었다.

한민주 저의 《불량소녀들》은 개화기 조선에서 모던 걸(신여성)이 등장하고 명명되는 과정을 역사적·미학적으로 분석하며 한 세기를 뛰어넘어 건네어진 연대의 손을 드러낸다.



여성, 담장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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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를 맞은 경성은 시각문화의 시대였다. 밤낮을 쉴 새 없이 밝히는 조명, 유리 벽 너머 욕구를 자극하는 백화점, 카메라, 박람회…. 신문물의 도입으로 경성의 거리에서는 모두가 전시하고 전시되는 상황이 초래되었다. 저자는 책의 상당 분량을 스펙터클이 지배하는 경성의 거리를 고증하는 데 할애하는데, 이는 모던 걸이 등장한 요인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거리의 스펙터클은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전시되었고 사람들은 자신 또한 스펙터클이 되고자 했다. 스펙터클은커녕 보이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여성들도 바야흐로 전시의 시대를 맞아 규방을 나와 자신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된다.

규방을 나서서 자신을 전시할 수 있게 된 여성들은 여태껏 금지되었던 영역을 하나씩 건드리기 시작한다. 여성의 상징이었던 긴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려한 화장을 하고, 비싼 명품을 몸에 걸친다.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자신을 정돈해야 했던 기존의 여성상을 무참히 무너뜨린 것이다. 여성이 하나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시대에서 모던 걸들은 ‘감히’ 스펙터클이 되어 자아를 선전했고 마침내 정체성을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현재의 ‘탈코르셋’ 논의의 방향성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근대의 모던 걸 문화는 은폐되었던 여성을 규방 밖으로 나오게 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스펙터클에 종속된 것뿐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남겨진 과제는 또 다른 스펙터클의 시대를 사는 현대의 우리에게 맡겨진다. 여성이 전시와 대상화로부터 근본적으로 탈피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여성에게 전시의 의미만을 부여하는 21세기 스펙터클 시대는 결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 여성을 종속시킨다는 의미에서 100년 전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보이면 안 되는 시대에서 보여도 되는 시대가 되었으나 더욱 지나서 보여야만 하는 또 다른 속박의 시대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보이도록 강요하는 장치, 즉 코르셋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은 역사적 방향성에 근거하여 설득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신여성, 다양한 혐오


스펙터클로 가득 찬 경성의 거리는 스펙터클을 비판하면서도 그에 종속된 ‘산책자’를 양산해낸다. 규방에 갇혀 있던 여성 역시 산책자로 등장하며 거리를 거닐게 되면서 사회에 자신을 노출했다. 이렇게 거리에서 형성된 자아를 짓밟아 없애려는 시대의 노력은 가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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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기 조선의 모던 걸들을 비판하는
1930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 만문만화


직업여성, 레뷰걸, 마네킹걸, 애활소녀, 스포츠걸…. 근대화된 시대에서 다양한 모습의 여성이 등장했고 그들에게 가해지는 차별의 모습도 각양각색이었다. 처음엔 그들의 불만을 무시하다가, 불만의 강도가 강해지자 그들을 비난하며 별종 취급한다. 시대의 문제를 그들에게 덮어씌운다. 이상적인 여성과 불량한 여성의 도식을 만들어 이상적인 여성을 예찬하고 그에 종속되지 않으면 낙오시킨다. 여성을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존재로 취급하며 그들을 구제해주는 척 기존 체제에 귀속시키려고 한다. 욕망과 통제를 중첩한다. 소비의 주체가 되게 함과 동시에 그들을 상품화시킨다.

익숙한 모습이다. 현재에도 존재하는 혐오의 양태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터져 나오는 불만을 ‘프로불편러’라는 별명을 통해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일축하고, 강하게 불만을 제기하는 자들을 ‘메갈리안’이라며 별종 취급한다. 경제적·사회적 문제를 여성의 탓으로 돌리고, 성녀와 창녀 프레임을 구축하여 여성을 이분한다. 외모를 가꾸기 위해 소비하는 여성을 주체적으로 평가하면서 보이기 위해 존재하는 상품으로 취급한다.

지금도 그러하듯, 온갖 언론을 통해 여성은 스펙터클의 시대에서 수없이 이미지화되고 유형화되면서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스펙터클의 흐름을 타고 자기를 선전함으로써 주체가 되려 했던 신여성은 또다시 스펙터클의 방법으로 전시되었고 차별당했다. 그 안에는 기존 체제를 공고히 유지하려는 기득권의 이데올로기가 치밀하게 숨어있었다.


하나의 사진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대중의 시선에서
이미지는 사실을 반영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미지는 특정 문화나 이념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의 반영물이었다.




스펙터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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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경성의 모습과 지금의 한국의 모습이 매우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00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진 바 없다는 회의감을 잠시 차치해보자면, 경성이 근대의 스펙터클을 대변하는 도시라고 했을 때 스마트폰 보급으로 모든 공간이 콘텐츠로 가득한 지금의 한국 역시 거대한 스펙터클의 공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21세기 스펙터클 한국은 무한히 생산되고 표출되어 토론장으로 튀어나오는 생각들이 가득하다. 스펙터클의 방법으로 두 시대 모두 새로운 여성이 혜성처럼 등장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혐오들이 발생한다. 전시되는 여성은 그에 반하여 전시함으로써 투쟁하고, 기득권은 또한 전시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하며 또다시 그들을 전시의 대상으로 만든다. 전시의 의미가 어찌 되었든, 스펙터클은 지금도 시대를 지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 스펙터클에 종속된 채 전시를 거듭해야 하는가?

이 책은 명쾌한 정답이나 저자의 주장을 따로 제시하지 않는다. 자료를 고증하고 분석만 하다가 끝난다. 역사의 흐름 자체가 우리에게 열린 해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스펙터클에 종속되든, 아니면 그에 끝없이 투쟁하든 더 나은 진보로의 발걸음이란 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불량소녀들’이 결국엔 스펙터클에 종속되었어도 그들의 등장은 그 자체로 유의미하듯, 스펙터클의 역사가 남긴 발자국이 또 하나의 길라잡이가 될지도 모른다. 진보의 길은 열려있다. 다만 더욱 많은 ‘불량소녀들’이 자신의 존재를 주저하지 말고 거리로 등장하여 그 의미를 더욱 거대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시대의 '불량소녀들'을 마음 깊이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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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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