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못생겨도 괜찮아 [사람]

글 입력 2018.10.04 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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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오늘 어디 아파보여."


요즘 내가 자주 듣는 말이다.


최근 들어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다니다보니 하루에도 몇 번은 이런 말을 듣는다. 자꾸 듣다 보면 어쩐지 민망해져서 흰 입술에 립스틱이라도 바를까 싶다가도, 반쯤은 귀찮음으로 그냥 내버려둔다. 나머지 반은, 의지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의 조그만 다짐이다. 어떤 종류의 다짐이냐 하면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는 탈코르셋 운동과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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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운동이란 간단히, 사회가 여성에게 주입하는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를 거부하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탈코르셋 운동은 중세시대의 코르셋처럼 여성을 신체적으로 억압하는, 나아가 그로 인해 정신적인 억압으로도 작용하는 모든 정형화된 미의 기준을 코르셋으로 정의하고, 이를 벗어나는 데 목적을 두는데, 보통은 여성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긴 머리를 짧게 치고 메이크업을 그만두는 것으로 시작한다.


탈코르셋 운동은 기형적인 여성혐오 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의 여성들에게 많은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의견이 엇갈리기도 한다. 다양한 담론이 존재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유의미한 운동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현대 사회가 여성에게 주입하는 미의 기준은 획일적이다. 연약하고 무해한, 순진한 소녀의 이미지. 이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특히 악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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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턱받이 의상을 입은 아이돌 보너스 베이비
 


남성이 여성에게 아이와 같이 연약한 모습을 요구하면서, 성인 여성들은 점점 앳된 얼굴을 하고 성적으로 대상화된다. 그리고 이는 곧 실제 아동들에 대한 성적 대상화로 이어진다. 이같은 미적 기준은 대중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생산되는데, 쏟아져나오는 왜곡된 이미지를 보고 자라는 아이들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 익숙해지고 심지어는 동경해마지 않는 일마저 벌어진다. 당장 아동복 잡지를 펴도 성인 여성처럼 화장을 한 모습의 아동 모델들이 허다하고, 유투브 채널에는 초등학생 뷰티 유투버를 수두룩하게 볼 수 있다. 내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영상은 한 ASMR 영상인데, 초등학생이 이어 리킹(ear licking)을 하는 영상이다. 단지 순수한 의도로 이어 리킹 영상을 즐겨 듣는 사람에게는 미안하지만, 대표적인 성감대인 귀를 애무하는 소리가 담긴 영상을 초등생 스스로 제작하는 일은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영상에 대한 성인 남성들의 반응은 예상한 그대로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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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아동복 쇼핑몰의 홍보 사진
 


이같은 해악을 볼 때 탈코르셋 운동의 필요성은 여실히 느껴진다. 하지만 치장 욕구 자체가 잘못된 것이냐 하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내가 원해서 꾸미는 것이라는 항변이 현재의 기형적인 사태에서 우습게 들리리란 것 쯤은 당연하다. 오랜 세월에 걸친 세뇌교육은 내 욕망이 무엇인지 구분하지조차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집어 말하면 치장을 통해 얻는 만족감이 온전한 나의 욕망만은 아닐지 몰라도, '나'의 욕망이 배제된 세뇌의 결과라고만 이야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꾸밈을 통해 나는 보여지는 이미지로서의 나를 만든다. 치장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결정하고 드러내는 것은 곧 자아를 표현하는 또다른 수단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치장이 자아를 실현시키려는 의지일 수도 있다는 소리다. 물론 여성들의 경우 꾸밈의 욕구 속에는 특히 엄격한 사회적 잣대가 존재하므로, '결정'이라든가 '자아 실현' 따위의 단어는 무의미하긴 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분명 나는 치장을 통해 만족감을 느꼈기 때문에 치장 욕구 자체는 실재하고, 그 속에서 혼재하는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분리해내지 못하는 이상 치장 욕구 '자체'에 대한 판단은 무의미해 보인다.


문제는 치장 욕구 자체가 아니라, 그 속에 강박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자아실현보다 일종의 생존 본능에 가깝다. 아름답지 못하면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이같은 두려움에는 유행에 민감한 정서도 한몫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래된 단일민족사회를 이룬 경험에서 비롯된, 유달리 공동체주의적인 사회분위기는 일반적 기준을 벗어나는 개인의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데 서툴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여성의 강박적인 치장문화와 맞물려 획일적인 미의 기준을 강요하면서, 오히려 치장을 통한 자아 실현 욕구를 방해하며 남성중심사회가 제시하는 여성성의 프레임 안에서만 범위를 한정짓는다.


치장 욕구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이 아님에도, 내가 치장을 거부하는 탈코르셋 운동에 긍정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똑같은 기준에 맞춰 엇비슷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사는 것이 익숙한 여성들에게, 달라도 된다고, 예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것. 내가 나로 존재해도 괜찮다는 것.


그러나 < 꾸미지 않는 여성 >이 새로운 여성상으로 등극해서도 안될 것이다. 탈코르셋 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욕망 속의 강박을 제거함으로써 다양성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믿늗다. 하지만 이를 경계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떤 운동도 그 담론이 힘을 얻으려면 비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로 실천되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구조를 벗어나는 여성들이 많아질수록, 구조는 힘을 잃을 것이다. 이미 벗어난 여성들 뿐만 아니라 아직 갇혀있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강박이 사라지고 나면 욕망은 더욱 풍부해지고 다양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개인은 비로소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한 번 원래의 얼굴로 밖을 나서니, 이후에는 더 수월해진다. 그래도 괜찮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원하지 않음에도 화장을 하는 날이 있다. 나를 죄는 코르셋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내가 탈코르셋 운동에 대해 말을 얹는 것이 조심스럽기는 하다.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 내 마음대로 꾸밀 자유, 그리고 그 이전에 꾸미지 않을 자유가 있는, 못생겨도 괜찮은 세상에서 살길 바라며 이만 글을 마친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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