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에세이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도서]

- 무라카미 라디오를 읽고
글 입력 2018.10.0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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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가 좋아졌다. 에세이는 작가의 세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사랑, 취향, 생각, 가치관, 그를 이루는 모든 것들. 그의 세계가 매력적으로 느껴진다면, 그건 잘 쓴 에세이다. 잘 쓴 에세이는 책을 덮고 나면 그 사람의 작품을 궁금하게 만든다.

하루키가 대표적인 예다. 난 원래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중간에 덮어버릴 만큼 지루하지는 않지만, 누군가 읽는 걸 말린다면 기꺼이 책을 덮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읽다 보면 밑줄을 쳐두고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 한두 개씩 있었지만, 책을 덮은 뒤엔 기분이 맹숭맹숭했다. 누군가 하루키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글쎄, 싫어하느냐고 물으면 글쎄였다. 다른 작품들이 크게 기대되거나 궁금하진 않았다. 하지만 에세이를 읽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며칠 전 우연히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그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일상과 공상과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글이었다. 그 속의 무라카미 하루키는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잠들기 전 생각이라든가 그가 우연히 본 여자에 대한 감상이 이렇게까지 흥미진진할 수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라면 지구 반대편의 한 행인에 대한 것이라도 기꺼이 들을 자신이 생겼다. 그렇다.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반한 것이다. 짐 자무쉬의 음악 다큐멘터리를 이야기하고, 장어를 좋아하고, 버드나무를 옮겨 심는 그가 좋다. 이 책을 읽고 있으니 자꾸만 그의 소설이 궁금해진다. 이전에 흘리듯 읽었던 노르웨이의 숲도, 얼마 전 본 해변의 카프카도 다시 읽고 싶다.
  


생각건대, 인간의 실체란 것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무엇인가의 계기로, '자, 오늘부터 달라지자!' 하고 굳게 결심하지만, 그 무엇인가가 없어져 버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마치 형상 기억 합금처럼, 혹은 거북이가 뒷걸음질 쳐서 제 구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처럼 엉거주춤 원래의 스타일로 돌아가 버린다. 결심 따위는 어차피 인생의 에너지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 … 반대로 '별로 달라지지 않아도 돼.' 하고 생각하고 있으면 이상하게 사람은 달라져 가는 것이다. 희한한 일이다. - 무라카미 라디오 중



에세이는 참 묘한 장르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려주는 처음 듣는 이야기를 열심히 읽게 된다. 열심히 듣게 된다. 마지막 문장까지 도착하면, 그와 가까워진 기분까지도 든다. 그가 내일 하게 될 생각과 내일 마주하게 될 사람들이 기대된다. 그에게 바라게 된다. 부디 더 자주 공상에 빠져주길. 더 자주 좋은 영화와 글을 보게 되길. 그리고 오늘처럼 내게 들려주길.

에세이 잘 쓰는 사람이란 멋진 세계를 쌓아올린 사람일 것이다. 견고하고 촘촘하고 확실하게 자신만의 취향과 일상을 쌓아올린 사람일 것이다. 내 세계를 타인에게 조금 비춰주는 일. 에세이를 쓴다는 건 그런 일이다. 나도 에세이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당신에게 조금 매력적인 사람이고 싶다. 궁금한 사람이고 싶다.


기억만큼은 신선하게 머물러 그것이 우리의 남은 (아프디 아픈 일이 많은) 인생을 꽤 유효하게 따뜻하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줄곳 소설을 써 오고 있지만 글을 쓸 때도 그런 '감정의 기억'이란 몹시 중요하다. 설령 나이를 먹어도 그런 풋풋한 시원의 풍경을 가슴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몸속의 난로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과 같아서 그다지 춥지 않게 늙어갈 수 있을 것이다. - 무라카미 라디오 중




[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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