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작가를 ; 읽다 - 황경신] 어린 날로 소풍을 떠나다

책 <그림 같은 세상 - 스물두 명의 화가와 스물두 개의 추억>
글 입력 2018.10.06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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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ly swatland

 

3월 10일 목요일

제목 : 봄 풍경


오늘은 봄 풍경을 그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림은 괜찮았는데 색칠할때 망쳤다. 그림
그릴 때는 기분이 좋았는데... 꿈이 화가 인데
그림을 너무 못 그린다. 나는 꼭 꿈을
이루고 싶다. 멋진 사람 예쁜 사람 꽃 다 그
리고 싶은데 아유~ 나중에 봄이 되면
봄 풍경 보고 싶은데 내 그림이 망쳤는데... 흑흑
아니지 내가 그린 그림은 이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것? 하지만 이제 까지
그린 그림은 넘쳐 난다. 하지만 자신감을 갖자~!!!



이게 뭔 소린가 하면. 초등학교 3학년이던 시절 내가 쓴 일기다. 마지막엔 꼭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다.”라는 각오와 함께 끝나던 일기. 개연성 없고 연결구 없이 그저 생각의 흐름에 따라 지껄였었다. 내 성격과도 어느 정도 상통했다.


그래도 난 이 시절의 나를 꽤 좋아한다. 이때의 난 용감을 넘어 용맹했으며 불의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치켜 올려 대드는 걸 잘하는 앙큼한 아이였다. 놀이터를 내 터전 삼아 뒤집고 다녔고 엄마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현지야! 밥 먹어!”라고 하면 휙! 보고 못 들은 척 고개 숙이고는 다시금 열심히 모래 놀이를 하던 아이였다. 그러다 엄마가 내려와 질질 끌려가야 하루가 끝이 나던 아이.


아차, 원래는 이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이야기가 샜다. 그 시절 나의 꿈은 화가였다. 누구나 그런 거 하나쯤 있지 않나. 무언가를 잘한다 잘한다고 하면 그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일. 화가가 나에겐 그랬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니 화가가 돼야겠다 싶었던 어린 날. 그런데 누군가 그때 기억을 뽑아가기라도 한 듯 한참 동안 잊어버렸던 꿈이었다.


갑자기 이 기억이 떠오른 건 이 책의, 이 구절을 읽고 나서였다.



‘아옴화실’이라고 씌어진

그곳의 문을 두드릴 때까지만 해도,

내가 거기에서 일 년 동안이나

그림을 그리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에게는 무언가를 그리고 싶은 생각도,

그릴 수 있는 재능도,

 묵묵히 앉아 한 가지 일에

열중할 만한 인내심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깊은 시간, 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른다.



크면서 언제부턴가 난 그림에 대해 말하지도 않았고, 그리지도 않았다.

 

그림에 정말 재능 있는 아이들을 보며 자신감을 잃어갔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으면 즐기기라도 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때 타이밍 좋게 진행된 학교 미술 이론 수업으로 점점 흥미까지 잃어갔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에게 미술과 그림은 어려워졌다. 그림을 보면, 그 그림 안에 어떠한 명제가 숨어있을 것 같고. 난 그걸 맞춰야 하는 학도여야 할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인상파고 야수파고 빈 분리파고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걸 말해주고 외우니 언제부턴가 작품 감상이 아닌 학구 감상이 돼버렸다. 외움의 과정에 정작 내 생각은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게 내가 그림이, 미술이 어려웠던 이유였다.


생각해보면 그저 자기 맘대로 보고 해석해 물감을 바르고 덧칠하던 꼬마 화가가 미술을 더 이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더 많은 걸 배운 지금의 나보다.

황경신 작가의 그림책이 좋았던 건, 그림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개념적으로 설명하려 들지 않는 거였다. 작가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함께 그림에 대해 자신이 느낀 추억을 함께 적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매력은, 그녀가 쓴 다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글에 있다. 그녀만의 생각과 표현, 문체를 따라가게 된다. 그럼으로써 그림에 가까이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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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세상>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란 테마 아래 어울리는 화가의 그림을 소개한다. 르네 마그리트, 에드바르트 뭉크, 얀 베르메르 등 스물두 명의 화가의 작품을 자신의 해석으로 풀어낸다.


난 그중에서도 봄과 가을 테마가 좋았다. 그림 속 활짝 만개한 색색의 꽃들이 어린 시절의 어렴풋한 나를 생각나게 하고 그 자체가 아름답기도 해서. 어린 날로 소풍을 떠나게 하더라.




어린 날로 소풍을 떠나다



조르주 쇠라 Georges Seurat, 1859~91, 프랑스


서로 대비가 되는 작은 색점들을 병치하여 빛의 움직임을 묘사한 그의 기법을 ‘점묘법’이라고 한다. 질서정연하게 찍혀진 순수색의 작은 점들은 너무 작아서 작품을 감상할 때 거의 식별되지 않으며, 단지 화면 전체가 빛으로 아른거리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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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몽마르트르 생 뱅상 거리

The Street Saint-Vincent at Montmartre in spring 1883~84



예전에는 봄이 언제 와서 언제 가버렸는지도 몰랐는데,

이즈음에는 봄의 공기가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느껴져요.

내 이야기에 대해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그건 네가 나이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말 또한 아름답기도 하고 눈물겹기도 했다.



봄. 너무도 화려해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아련한 것 같다. 예전의 난, 그날 하루가 너무 행복하면 꼭 일기를 썼다. 무슨 일이 있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이 행복을 누군가 금방 앗아갈까 무서워 어딘가라도 기록해두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렇게라도 하면 누군가 행복을 뺏어가더라도 조금은 괜찮을 것 같았던 것 같다. 나에게 봄은 그렇게 해서라도 붙잡고 싶은 추억 같기도 하고, 붙잡고 싶은 사람 같기도 하고, 가족 같기도 하다. 알록달록 활짝 개화한 꽃들을 보면, 인생에서 가장 만개했던 나의 계절이 저럴까 싶기도 하다. 저 그림을 보고 이상하게 울컥한 건 그래서 일 것이다. 불과 얼마 전도 과거가 된 것처럼, 붙잡을 수 없는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저 봄의 길을 보고 있노라면. 따스하게 내리쬐는 노란빛의 길을 따라 다 다르면 어린 날의 내가 밝게 웃으며 서 있을 것 같다. 주름 없던 젊은 엄마 아빠도. 덜 고생한 상태로 그 자리에 있겠지. 이상하게도 밝은 저 노란 색감이 아련하게 부서지는 것만 같다. 그래서 나를 더 슬프게 한다.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너무 예뻐서 순간인 것 같고 금방 지나가 버리는 삶 같다.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1830~1903, 프랑스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관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풍경화에 전념했다. 그의 작품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도 구성적인 특징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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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의 여인과 아이

Woman and Child at a well 1882



우물 옆의 여인과 소녀.

소녀가 미래의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여인이 과거의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되었거나 나에게는 이들이 같은 사람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내가 못 다룬 화가의 그림과 황경신의 추억이 너무도 많다. 난 그저 그녀가 이야기한 그림을 보고 그에 대한 나의 단상도 조금 꺼내 보인 것뿐이다. 내 어린 시절에 대한 단상을. 점점 쌀쌀해지고 있는 가을이지만, 난 이 그림들을 보며 따스한 봄을 느꼈다.


*


석 달 전쯤 어떤 한 글귀를 주웠다. 그리고 두 달 전 또 하나의 글귀를 주웠다. 그리고 얼마 전에 또 하나. 그 글귀들은 내 명치를 턱 치고 도망갔고, 난 그 출처를 알고 싶었다.


신기하게도 그 글귀들이 모두 한 작가에게서 나왔던 거였다. 황경신. 바로 이 작가다. 황경신은 그렇게 오래 자꾸만 내 가슴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이제야 싣는다. 그녀는 마음으로만 맺혀 쉽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모두에게 공감 가게 표현한다. 나는 그런 글의 방식이 너무도 좋다.


그녀의 이름으로 출판된 책은 꽤 많다. 신기한 건 그 책들의 장르가 다 다르다는 점이다. 여행, 동화, 그림, 에세이. 딱 무엇이라 칭할 수 없는 영역. 그래서 궁금하다면, 어느 한 권을 뽑아 들어도 좋겠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그것들을 해석하고 이야기 할 테니. 우리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여 듣기만 하면 될 것이다.




작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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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을 자극하는 독특한 문체로, 독특한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작가 황경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그녀는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9년 서울문화사에 입사하여 '무크' 기자로, 월간 PAPER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림 같은 세상』을 포함해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생각이 나서』 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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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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