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딸, 엄마 그리고 여자에 대하여. [도서]

글 입력 2018.10.08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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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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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代 여성



이 소설에는 세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젠’은 젊은 시절 미국과 유럽에서 공부하면서 소설을 쓰고, LA에 교육센터를 짓기도 한 앞서가는 지식인이었다. 지금은 그저 자꾸 엉덩이에 욕창이 생기고, 질문하고 또 하는 치매에 걸린 노인일 뿐이다.  젊은 시절 교사였던 엄마는 아이를 낳으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남편이 죽은 후 경제적 어려움은 심해졌고, 예순이 된 지금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엄마의 딸 ‘그린’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교수라고 치켜세우지만 사실은 시간강사에 불과하다. 엄마는 딸을 ‘보따리 강사’라고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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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네이버포스트 - 책끝을접다)


‘젠’은 노인이라는 점에서, ‘그린’은 성 소수자라는 점에서 이들은 여성이라는 약자 중에서도 약자이다. 엄마는 ‘젠’의 곁에 있으면서 그녀를 동정한다. 연민의 감정과 동시에 비극적인 삶의 끝을 보내고 있는 젠의 모습에서 자신을 떠올린다. 그리고 딸의 모습을 그렸다. 엄마는 자신이, 그리고 딸이 ‘젠’처럼 끝을 맺을까 너무나 두려워했다. 그런 엄마에게 딸이 함께 시위를 나가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언제든 돌아서면 그만일 사람들이었다. 딸의 연인인 ‘레인’ 또한 자식도, 결혼도 만들어주지 못하는 ‘남’일 뿐이었다.

주인공인 ‘엄마’는 젠의 외로운 죽음을 지켜보는 목격자이며, 점점 그 길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자신의 딸인 ‘그린’만큼은 누구보다 평범하게 이 사회에서 ‘정상적’이라고 칭하는 범주에 속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그린’은 이 세상이 정상이라 칭하지만 절대 정상적이지 않은 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쓰는 사람이다. 이 삼대를 관통하는 비극은 여성, 그리고 소수자로서의 아픔을 잘 대변한다. 충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결국 경제적으로 녹록지 않고, 이기적이고 떼쓰는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결국은 ‘짐짝’ 취급하는 죽음을 맞아 가는 세대로 전해지는 우리네 모습 말이다.




한국에 대하여



혐오와 적대는 등장인물 모두를 향해 있다. 엄마가 일하는 요양병원의 원장과 과장은 기저귀를 너무 많이 사용한다고 엄마를 나무란다. 그들에게는 어차피 죽어 나갈 ‘젠’의 욕창 보다 병원 사정상 아껴 써야 할 물품들이 더욱 중요했다. ‘젠’의 상태가 악화하면서 그들의 이해타산적인 면모는 가감 없이 드러난다. 살아있는 사람을 산송장 취급하면서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젠’을 막무가내로 다른 병원으로 보내 버린다. 진심으로 환자를 대하는 ‘엄마’는 정이 많아서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됐다.


성 소수자에 대한 소설 속 사람들의 시선은 현실과 아주 많이 닮았다. 성 소수자를 두고 지지와 반대의 영역에서 질문하는 기자, ‘동성애’ 영화를 보여줬다고 교수를 잘라버리는 대학, 종교적 신념이 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할 수 있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잘 보인다.


이러한 세상에서 자신과 딸이 겪게 될 끝을 목격해가는 엄마가 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엄마 개인의 책임이 아니다. 시대에 뒤처진 늙은 아줌마여서도 아니고,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엄마들의 단순한 바람 때문도 아니다. 차별과 혐오로 얼룩진 세상에서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엄마가 몇이나 될 수 있을까.


 


뜨겁지 않지만, 절대 식지 않는



엄마의 온도는 뜨겁지 않다. 엄마는 자신의 인생에서 딸을 지우고 지지와 격려, 응원을 할 수 있다면 자기도 좋겠다며 자신을 변호한다. 어찌 됐든 결국 엄마는 딸을 이해하지 못했다. 너무 많이 배워서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방법까지 배웠다고 했다. 딸이 폭력에 노출된 시위 현장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엄마로서 딸의 옆에서 함께 외쳐주지 못했다. 딸을 지지하는 사람들, 반대하는 사람들, 그들을 만류하는 사람들. 그 사이 어디에서 주저앉았을 뿐이다.

 

‘그린’과 ‘레인’ 또한 그랬다. 그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목소리를 내지만 나에게는 그 온도가 어딘가 미지근했다. 그린은 성 소수자라는 이유로 퇴출당한 자신의 동료를 두고 이것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고 단호히 말한다. 그리고 대학이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 것을 문제점으로 내세웠다. ‘레인’ 또한 수없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엄마’의 말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묵묵히 요리해서 음식을 나누고, 아픈 ‘엄마’를 보살필 뿐이다. 그런 레인이 자신과 그린이 보낸 7년을 무시하지 말라고 화내는 장면은 그래서 더욱 슬펐다.
 


그냥 우리는 여기 있어요. 여기 있다고요.

그래, 너희가 여기 있구나,

그렇게 알아주는 것.

저희가 원하는 건 그뿐이에요.



그럼에도 그들의 온도는 절대 식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환자를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는 병원에서 ‘젠’을 구해낸 것처럼, 목욕하다가 거품이 묻은 채 도망가고 자신의 머리를 움켜잡는 젠 때문에 간신히 넘어서고 또 넘어서는 삶을 살면서도 마지막까지 ‘젠’과 함께 했던 것처럼 말이다. 자신의 삶에서 딸을 지워내는 것 대신에 엄마는 끝까지 묻고 또 물을 것이다. 언젠가는 딸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됐다는 허무맹랑한 해피엔딩 속 엄마가 아니라, ‘젠’이 그러했듯 함께하는 순간에는 모든 슬픔과 서글픔은 지워버릴 수 있는 엄마가 될 것이다. ‘젠’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는 자신이 무너지지도, 쓰러지지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은 것처럼 언젠가 엄마는 ‘그린’에게 그런 위로 정도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이 끝이 좋다. 여전히 받아들이고 견딜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내일은 오니까. 잠을 청하는 ‘엄마’가 밉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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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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