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구도 가본 적 없는> : 그 자리에서, 황정은을 읽다 [도서평론]

작가 황정은이 묻는 상실의 폭력성
글 입력 2018.10.10 0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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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단편 「누구도 가본 적 없는」은 아이를 상실한 부모가 죽을 때까지 짊어져야 하는 상실을 잘 표현한다. 부부는 처음으로 세계 여행을 떠났고, 그 와중에 접한 외환 위기라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도 여행을 이어간다. 그러한 스토리 속에서 소설에서 주로 등장하는 ‘그’와 ‘아내’는 아이의 상실로 인생에 굴레에 대한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죽을 때까지 슬픔을 짊어져야 할 운명인 시시푸스를 연상하게 만든다.


*


계곡에 놀러가 물로 뛰어내린 그들의 아이는 심장 발작으로 개구리처럼 물에 둥둥 떠 있는 채로 죽어갔다. 예기치 못한 사고에 의해 “얼마 동안 내버려두고 멍청하게 보고”(156면)만 그는 뒤늦게나마 아이를 등에 업고 산을 내려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지만 아이는 그들의 곁을 떠난다. 십 사년 전에 있었던 일이고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이의 부재를 견디지 못한 그들의 시간은 오래전 과거에 멈추어버린다. 그들은 아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애초에 없을 뿐 더러, 이러한 기억은 평범했던 일상에 잔잔히 스며들어 삶을 상실하게 만든다.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세계 여행 과정 내내 비(非)일상적인 상황 아래 그들이 기쁘고 유쾌한 즐거움보다는 두렵고 불편한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은 ‘아이의 죽음’의 연장선으로 온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게 만드는 감정을 환기한다. 작품에서 현재 세계 여행을 하는 ‘부부’의 모습과 과거 함께 여행을 떠났던 ‘가족’의 모습이 연속적으로 교차되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다.


아내가 비행기에 나오는 “아이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를 보며 “뺨이 눈물로 번들거리”(140면)고, 여행을 하면서 ‘그’를 제쳐두고 “도화지에 목탄으로 백합을 그린 그림”에다가 애한테 “엽서를 쓰”(152면)려는 행위를 보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듯이, 분명한 사실은 부부는 자의적으로 아이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럴 수 있다고 말하는 건 단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하여 당황한 나머지 침묵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를 잊을 수 있다는 터무니없는 가능성을 보고 억측하는 셈이다. 이 착각은 ‘그’와 ‘아내’가 맞닥뜨릴 폭력적인 상태를 발아시키는 시발점이 되고, 살아남게 된 그들마저도 서서히 죽어가게 만드는 족쇄가 되어 그들을 잠식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유럽으로 가는 세계 여행은 “시간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가”면서 동시에 “매 순간 과거”(140면)로 향하는 시간 여행이 되어 그들의 낯익으면서도 낯선 상상을 배회하는 시간으로 자리매김한다. “어떤 아이는 대학을 졸업했고 어떤 아이는 엄마가 되었고 또다른 아이는 아버지”가 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아이만 어른이 되지 못했다”(144면)는 사실은 끝내 미련과 후회를 떨쳐내지 못하게 만든다.


문제는 막연하게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어도 ‘부부’는 ‘부모’의 자리에 머물러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는 데에 있다. 몸이 기억하는 정상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이성은 마음이 기억하는 아이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감성과 충돌한다. 그들은 이 팽팽한 줄다리기에 방황하면서 스스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깊은 상실의 나락으로 젖어든다. 오히려 아이에 대한 기억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 동시에 후회하는 시도를 반복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아이에 대한 암묵적인 ‘용의자’인 동시에 ‘피해자’이기 때문에. 아이를 위한다고 생각하는 시도가 자신들에 대한 원망과 동시에 쓸쓸한 그리움으로 되풀이된다.


아이를 잃은 부모는 이러한 상황이 되풀이되면서 피폐한 그들 스스로를 맞닥뜨리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자신들의 삶에 체념해아하며, 체념해야만 하는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부부는 죽은 아이가 더 이상 살아 돌아와 그들의 곁에서 더운 숨을 내쉬지 못한다는 정도는 슬프지만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듯 살아가지만 결론적으로 삶을 자생적으로 회복할 수 있는 단계에 머무르지 못하고 좌절한다. 이와 관련되어 ‘그’가 아이와의 여행을 비교적 세밀하게 회상하는 대목은 살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땐 그들에게 아이가 있었다. 십육년 전으로 아이가 여섯 살이었다. 그녀는 아이에게 민소매 셔츠와 반바지를 입혔다. 왼쪽 가슴에 기린 모양의 아폴리케가 달려 있었고 반바지는 밑단을 두 번 접어 입는 것이었다. 아이는 양말도 없이 파란 샌들을 신고 있었는데 그걸 신은 채로 개울에 들어가 물살을 거스르며 걷는 바람에 그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못 신게 되었다. 양지가 몹시 뜨거웠다. 어른들과 아이들이 차양 아래서 점심을 먹고 놀았다. 그도 그녀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아마도 영업팀의 누군가였을 것이다. 숟가락에 은박지를 감아 마이크를 만들었는데 그들의 아이가 그걸 낚아채 골똘하게 들여다보았다. 돌아오는 차에서 그녀가 아이를 혼냈다. 어른들 앞에서 버릇없게 굴어 부모를 망신시켰다고 날카롭게 나무랐다. 그것을 그녀는 자주 기억해냈다. 후회했다.


- p.144



영화 「쇼생크 탈출」(프랭크 다라본트 감독, 1994)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비(非)일상에 적응한 채로 살아간 이들이 ‘일상’을 ‘일상’으로 느끼지 못하고 다시 ‘비일상’으로 회귀하며 좌절하는 경우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억으로부터의 탈피가 필요하다. 공통된 아픔을 함께 부대끼고 공유하며 일상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내내 ‘그’와 ‘아내’는 ‘부모’에서의 위치에서 시간이 멈추어버린 나머지 ‘부부’로서 서로를 위하지는 못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인다. 아이의 죽음을 둘러싼 그들의 태도는 서로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하고, ‘그’마저도 아내를 이성적으로 대하고자 노력하며 비극은 심화되어간다. 너무 이성적이다 못해 서럽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공감이 부재한 이성은 속 빈 껍데기와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우연히 찾아 간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먹으며 무심결에 아내가 또 다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늘여놓는 데에 그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장면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그의 무관심은 아내의 감성과 이성을 오가던 외줄타기의 끈을 무정하게 끊어버리게 만든다. 추억의 상실이 삶의 상실로까지 이어져 거대한 폭력으로 발아해 삶을 완전히 일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시발점을 낳는다.



그녀는 자전거 이야기를 했다.


하루는 애가…… 아주 당황해가지고 집으로 전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말이 앞뒤가 안 맞고…… 엄마 나도 몰라. 모르겠는데, 이러는 걸 제대로 좀 말하라고 혼내가며 들어보니 자전거 안장을 누가 가져갔다는 얘기였어…… 없어졌다는 거야 그냥…… 너 어디냐 했더니 어디래…… 꽤 멀리 갔어 그 어린게…… 그래 그럼 어디까지 와라 하고 내가 갔지 거기로…… (…) 이제 시작이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지…… 이렇게 시작되어서 앞으로도 이 아이는 지독한 일들을 겪게 되겠지.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다. 거듭 상처를 받아가며 차츰 무심하고 침착한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했지……
그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였다.


- p.149


 

물론 과거의 기억을 되풀이하는 행위는 이제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회자하는 푸념에 지나지 않을 수는 있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 있으므로 부단히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단순히 무기력하게 널브러져 있는 건 망자를 대함에 있어서도 예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말로 내뱉어지면서 아직 이성적으로 사태를 조명할 수 없는 당사자에게는 커다란 폭력으로 느껴지게 된다. 사실 그도 결국 아내와 마찬가지로 수영을 곧 잘하고 물을 좋아하는 “물살이 빗긴 것처럼 아이가 말쑥해져 물 밖으로 나”(145면)오던 그 순간에 발을 담근 채 망각의 끈을 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 말을 하는 이도, 말을 듣는 이도 준비가 아직 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이성은 감성을, 감성은 이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 서서히 벌어지는 틈을 만든다. 폭력은 틈으로부터 연루되는 상실과 무관심을 자양분으로 자라난다. 여행 도중 검표원이 여권을 요구하자 그제야 아내가 여권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 장면에서 이 점은 보다 명확해진다. 아내는 호텔에 두고 온 것만 같은 가방에 여권이 같이 있는 것 같다고 실토하고, 검표원에 지시에 따라 대사관에 가면 별 일이 없을 거라고 단조로운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다. 여기까지라면 다른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벌어질 법한 흔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아내의 말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대사관에 가면 돼. 다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158면)이라고 무심결로 말하는 아내의 말은 그가 아이를 잃을 당시에도 갑작스레 벌어진 일에 무덤덤하게 아이의 죽음을 지켜보고만 있었던 그와 아내의 모습을 촉발하는 동시에 아내를 전혀 공감할 수 없는 원망과 분노를 가지게 만든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껏 이성으로 참아오고 있었던 감정의 둑을 무너뜨리고, 아내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해야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며, 당황한 나머지 목숨을 잃은 아이처럼 보살펴야한다는 인식을 가졌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한다. 겨우겨우 이어오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감정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메워버리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그걸 챙기라고 하지 않았어? 그는 말했다.


그 밖에 내가 뭘 더 부탁한 게 있어? 그거 챙기라고…… 가방에 넣으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거 잊지 말라고…… 그냥 그거 하나 가방에 다 있잖아. 당신 칫솔, 화장품, 사탕…… 다 있는데 왜 그건 없냐…… 우리 내일 비행기 타야 돼…… 그런데 여권도 영수증도 없어…… 내가 이걸 다 설명해야 해 사람들한테…… 그런데 괜찮을 거라니…… 당신은 괜찮지 걱정이 없지 내가 다 하니까…… 당신은 잘 먹고 잘 자고…… 어디서든…… 호텔에서든 비행기에서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떻게 그렇게 비위가 좋냐 그렇게 멀쩡하게…… 괜찮을 거라고?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쉬워 모든 게……


그는 문득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서글픈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는 다시 울화가 치밀어 고개를 저었다. 그 얼굴.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대신. 그렇게 보지 말라고 그는 말했다. 그런 식으로 보지 마. 사람 빤히 관찰하지 마. 너는 아무 잘못 없는데 내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 p.159



상황은 그들이 모두 아이를 잃은 부모이자 부부라는 점에서 더욱 악화된다. 그도 아내도 모두 정상은 아니었다. 두 사람 다 모두 그걸 알고 있다. 참아오던 설움은 쏟아졌지만 모두가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상황에 설움이 향할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방향을 잃어버린 슬픔은 분노를 잉태하고, 폭력으로 돌변해버린다. 이성적 사고가 불가한 폭력은 본인을 포함한 모든 것을 망가뜨려 버린다. 소설에서도 이 부분을 기점으로 더 이상 두 사람 간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아내 또한 그를 따라 열차를 내리지 않고 그대로 어딘가로 향해 버리는 모습으로 작중 인물들이 극적으로 치닫는 걸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폭력은 “아이 로스트…… 노, 노, 미스드…… 로스트”(160면)라고 말하는 서구 세상에 낯선 한국인처럼 피해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뿌리내린다. 그것이 하나의 폭력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작업을 마치고 뒤를 돌아본 그는 그녀가 아직 열차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가방을 두 번째 계단에 내려놓은 채 멍하니 그 뒤에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가방을 잡아 플랫폼으로 내렸다. 다시 가방이 뒤집혔다. 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계단에 선 그녀는 기미가 도드라진 얼굴로 다만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가 올려다보고 그녀는 내려다보았다. 자동 개폐 장치가 작동되고 별다른 소리 없이 문이 닫혔다. 그녀의 모습이 창문도 없는 묵직한 문 뒤로 사라졌다. 그는 익스프레스라고 적힌 금속 동체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열차가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해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는 그대로 서 있었다. 열차가 일으킨 바람으로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이마에 돋은 땀이 상쾌하게 말랐다. 베를린 중앙 역사는 저물어 가는 빛에 잠겨 있었다. 이제 플랫폼은 비었다. 강 쪽으로 차갑고 전조한 바람이 불었다. 어…… 그는 소스라쳤다.


- pp.159~160



그렇다면 감성에 휩쓸린 폭력은 어떻게 다루어져야 할까. 사람들이 잊기 힘든 큰 충격으로 폭력적인 상태에 놓인 경우 그 본질적인 원인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막연한 미래를 아우르는 감성에 있다. 그들도 외로운 사람들이다. 기억의 히스테리를 안고 평생을 과거에 얽매여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무너져버린 감성 속에서 “몇 번이고 들은 이야기”라며 “듣는 둥 마는 둥”하는 행위는 적절하지가 못하다. 정상적인 일상의 영위를 원천적으로 사전에 차단할뿐더러, 산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 그냥 ‘살아 있는 게’ 아니라 ‘잘 살아 있는’사람이 될 수 있도록. 그들이 스스로 감성적인 폭력으로부터 씻겨 내리면서 쓰라린 감성과 유실된 이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지를 진전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본 글의 페이지는 상기된 소설이 수록된 <아무도, 아닌>을 기준으로 작성하였음.



[원종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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