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채워지는’ 연애 말고 ‘더해지는’ 연애 [도서]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 사랑이 존재이유인 여인이 있었다.
글 입력 2018.10.11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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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혼자서도 충분히 괜찮을 때
하는 연애가 건강한 거야.”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술김에 죽네 사네 울부짖던 나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친구가 한 마디 툭 던졌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그 다음 날부터 마음을 다잡고 스스로를 돌볼 수 있었다. 내가 2년여 가량의 연애시절동안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의 안위’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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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재밌는 단편소설을 하나 읽었다.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귀여운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젊은 여성 올랜카는 극작가 쿠킨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올랜카는 그의 일을 도우며 남편을 따라 연극을 사랑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출장을 떠났던 쿠킨의 사망소식이 전해진다.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올랜카는 머지않아 재목창고 관리인 프스토발로프에게 사랑을 느끼고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렇게 시시한 연극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어요!” 목재창고를 사랑하게 된 올랜카에게 이제 연극 따위는 한심한 놀이일 뿐이다.

6년 후. 프스토발로프마저 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리자 이제 올랜카의 사랑은 유부남 수의사와 그가 아끼는 동물들에게로 향한다. 하지만 그 마저 마을을 떠나고. 완전히 홀로 남겨진 올랜카는 깊은 시름에 잠긴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느덧 할머니가 된 올랜카는 수의사가 데리고 온 중학생 아들 샤샤를 마주한다. 이제 올랜카는 하루 종일 샤샤를 쫓아다니며 걱정 섞인 잔소리를 하고, 과자를 건넨다. 하지만 샤샤는 그런 할머니가 부담스러울 뿐이다.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둘 것인가


사람마다 삶의 목적은 다르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가족의 행복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꿈의 성취가, 또 누군가에게는 많은 돈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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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카의 삶의 목적은 '사랑'에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사랑하는 '감정'에 더 목적이 닿아있다. 올랜카가 정말 극작가 쿠킨이라는 사람 그 자체를 사랑했다면 그가 죽은 후 연극을 시시한 것으로 치부하며 그토록 빠른 태세변환을 보이지느 못했을 테니 말이다.

하여 올랜카에게는 누구를 사랑하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 그로 인해 언제나 2% 부족한 98%의 상태이던 자신의 인생이 100%가 되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다. 한마디로 올랜카는 혼자서는 온전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귀여운 여인>이라는 제목 역시 올랜카의 이러한 성향을 드러낸다. ‘귀엽다’는 표현은 주로 ‘보호본능을 유발한다’, ‘지켜주고 싶다’ 등의 숨은 감정을 내포한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지켜주어야만 하는’ 올랜카의 특성을 단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 세상에는 수많은 삶의 목적이 있다. 각각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상당히 오만한 짓거리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한계는 꽤 공공연하게 통용되고 있지 않나 싶다.


- 가족, 친구 등의 사랑하는 사람들:
너무나 소중하지만, 언젠가는 헤어질 존재

- 꿈:
너무나 고귀하지만,
전력을 다해 쫓는다 해도
이뤄진다는 보장은 없는 것

- 돈:
삶을 꾸려나가기 위해 분명 필요하지만,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변덕을 본질로 삼는 것

- 세계평화:
너무나 훌륭하지만,
뗀석기의 탄생과 함께 멸망한 것

등등...


위의 것들은 모두 위태로움을 내포한다. 그것이 나의 통제범위를 벗어난 외부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삶이 뿌리를 내릴 보다 견고한 땅은 어디일까 생각해본다. 아마 ‘나 자신’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내가 숨을 쉬는 한 언제나 내 곁에 있어왔고 있을 존재, 동시에 나의 통제력도 어느 정도(그나마 제일 많이) 작용할 수 있는 존재는 나 자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쯤에서 내 삶의 목적을 밝혀볼까 싶다. 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인생을 살고 싶다. 엥? ‘나 자신’ 어쩌고 부르짖을 땐 언제고 갑자기 웬 사랑타령이냐고? 여기 전제가 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인생으로 가꾸어나가기 위한 에너지는 충분한 내적성숙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내 진짜 꿈은 ‘일단 나부터 잘 챙기는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102%가 되는 연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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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애를 할 때도 ‘일단 나부터 잘 챙기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올랜카처럼 사랑을 ‘이용해’ 겨우 100%가 되는 것 말고, 이미 100%인데 사랑 ‘덕분에’ 102%가 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고 본다.

사실 내가 맨 처음에 언급했던 전 남자친구와의 관계는 겨우 100%가 되는 사랑이었던 것 같다. 내 모든 걸 내팽개쳐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그 사람은 내 일부, 혹은 전부였다. 나만의 줏대도 없었으며 그의 의견을 곧 나의 것으로 만드는 모양새가 올랜카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신은 내 삶의 이유에요!’라는, 영화나 드라마 식 달달한 대사를 직접 살아낸 셈이랄까.

지금 와서 후회하지는 않는다. 20대의 젊은 패기로 한 번쯤은 해볼 만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번 다시 할 생각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아무리 ‘평생- 어쩌고 영원히- 어쩌고’ 말해도 때가 되면 떠날 사람은 결국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제는 애정 두는 일들과 나만의 가치가 생겨버렸기에 이를 모두 버려가면서까지 다른 누군가에게 맞춰주는 건 내키지가 않는다. 그러다 헤어지면 떠난 사람을 찾아가 멱살을 붙들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애매한 상황이 펼쳐진다. 요약하자면 내 의견은, 연애건 우정이건 어떠한 관계에서라도 일단 스스로부터 잘 챙겨야 관계의 균형이 건강하게 잡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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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험의 연장선상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는데 16-17C의 바로크 시대가 아주 흥미롭다. 신성한 기독교적 가치관을 중심으로 두었던 중세, 르네상스 시대와 달리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필두로 모든 것의 중심에 신이 아닌 ‘나’를 위치시켰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를 그린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일상적이고 친숙한 존재를 그린 베르메르의 <물주전자를 든 여인>을 보면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지향점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물론 바로크 시대에도 성경과 신화의 내용이 많이 그려진다. 다만 르네상스가 엄숙하고 고귀한 느낌을지향했다면 바로크는 보다 사실적이고 감각적인 표현을 지향한다.)

이러한 ‘나’ 중심적인 바로크적 사고는 4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결국 연애도, 학업도, 직업을 갖는 일도 모두 ‘내가’ 잘 살기 위함이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종종 되새겼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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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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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랑스러운 글이네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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