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유럽여행은 도피처가 아니었다.

글 입력 2018.10.14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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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두 달 간의 유럽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틀에 얽매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 탓에 여행 패키지 광고 메일은 고려대상도 되지 못한 채 휴지통에 처박혔죠. 살면서 단 한 번도 패키지 여행을 떠나보지 않은 터라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 시간과 내 취향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니까요.

유럽 여행을 다녀오면 왠지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줄 알았습니다. 자아도 확실하고, 진로도 확실하고, 인생의 목표도 확실히 정립된 자존감 뿜뿜 성인이요. 여행에 미친 사람들, 그리고 미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한 유명 커뮤니티 게시글을 보며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여행은 너무 멋있었고, 다녀와서도 멋진 삶을 사는 것 같아 보였고, 무엇보다 여행 사진이 너무 감성 넘치는 겁니다. 나도 저렇게 멋진 여행을 다녀와서 달라진 삶을 살아야지, 하며 도피의 심정으로 아무 준비 없이 유럽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국에서의 삶에 너무 진절머리가 난 상태였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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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멋있긴 했습니다.



유럽 여행의 +와-



그런데 웬걸, 제가 유럽 여행을 다녀와서 얻은 것은 수 천 장의 사진과 오랜만에 봐서 어색해진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가끔 할 말 없을 때 분위기 전환용으로 떠들 만한 유럽 여행기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반대로 여행을 다녀와 잃은 것은 제가 갖기 원했던 바로 그것들이었습니다. 확실한 자아(->내 성격과 능력에 대한 의심), 확실한 진로(->진로에 대한 불확실함), 확실한 인생 목표(->인생 목표 수정에 대한 강한 열망), 마지막으로 뿜뿜 자존감까지(->모든 것에 무심한 제가 이렇게까지 자존감이 뚝뚝 떨어질 줄 몰랐습니다). 세상은 정말 넓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못하는 것이 더 많았고, 대단한 사람들에 비해 저는 정말 작은 사람처럼 느껴졌습니다. 분명 이곳저곳 다니고 이것저것 먹을 때만 해도 행복했는데, 막상 한국에 돌아오니 길 잃은 이방인처럼 느껴진 겁니다.

결론은 ‘여(행)후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기 전보다 더 바쁘게 살았고, 여행 다녀온 지 몇 개월이 지난 아직도 그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여행의 목표



그러니 긴 여행을 계획하는 여러분, 반드시 여행의 목표를 정립하고 가세요. 만약 도피성 여행이라면 개인적으로 옷자락을 부여잡고 말리고 싶습니다. 도피성 여행은 휴양지 일주일로 충분해요, 당신의 시간과 돈은 도피성 여행에 쓰기엔 너무 피땀눈물 흘려 지킨 시간과 돈이잖아요? 여행에 뭘 굳이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느냐 하시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여행에 뭘 굳이 그렇게까지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망한 케이스이므로, 한 달 이상 긴 유럽여행을 계획 중인 다른 분들은 저같이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기에 쓰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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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인에도, 경비에도, 루트에도 얽매이지 않는 본인만의 뚜렷한 목표를 세우세요. 제가 감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 여행에서 인생샷 1,000장 찍어야지->나는 인스타가 취미니까 인생샷 1,000장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해시태그 걸어 올리고 인스타스타 해봐야지 OR 나는 학교생활에 지쳐 힐링 여행을 떠나는 거니까 앨범에 다 저장해놓고 힘들 때마다 봐야지

2.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나는 외국인 친구들을 많이 사귀고 싶으니까 최대한 현지인들이 많은 장소를 미리 알아보고 가서 현지어로 대화하는 연습을 해야지 OR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서 많은 사람들이랑 같이 여행하고 싶으니까 여행 모임 찾아봐야지

3. 배낭여행 해볼까->나는 기타 좀 칠 줄 아니까 기타 버스킹 하면서 배낭여행 해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 OR 나는 아직 최악의 상황을 겪어본 적 없으니까 경비를 정말 조금만 가지고 여행을 가서 위기 상황에 나타나는 내 모습을 알아봐야지

4. 알쓸신잡 컨셉 여행 해보고 싶다->최소 국가와 도시의 역사, 문화, 유명인에 대한 공부…

아주 이상적입니다만 저렇게 세운 목표를 실제로 여행 끝날 때까지 완벽히 달성하고 만족하여 돌아오는 여행자는 얼마나 될 지 저도 모릅니다. 다만 시도를 해보는 것과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은 차이가 크겠죠. 70프로 정도 확실해진 자아, 50프로 정도 확실해진 진로, 60프로 정도 확실해진 목표만 얻어도 엄청난 것을 얻은 것입니다. 어쨌든 여행 루트, 경비 말고도 여행 목표에 대한 준비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네 맘이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불편하신 분들은 그냥 패스하셔도 됩니다. 그냥 많은 생각 없이 쉬고 노는 여행을 원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은 여행 그 자체에서 스스로 만족을 느낄 가능성이 크므로, 그냥 그렇게 즐기셔도 됩니다. 오히려 여행은 그러려고 가는 경우가 가장 많으니까요. 하지만 유럽 여행을 핑계로(?) 자신에 대해 탐구하고 탐색하고 싶은 분들에겐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결국 여행은 旅行이자 ‘여’가’행’위기도 하니까요. 한국에서 못 논 만큼 신나게 노세요! 우리는 놀 때 제일 신나는 호모루덴스니까요.


[김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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