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 세계의 종말, 보후미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도서]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글 입력 2018.10.17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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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보후밀 흐라발의 자전적인 영감에서 탄생한 소설이다. 그의 작품에는 자신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주인공인 한탸의 일인칭 고백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작품 안에서 독백체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소설 보다는 일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전적인 이야기이고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소설은 삼십오 년째 나는 폐지 더미 속에서 일하고 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이 된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첫 문장을 까먹었다.그래서 읽는 내내 주인공인 한탸가 젊은 남자일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또 다시 <삼십오 년째 일을 했고 오년 뒤에는 은퇴를 해야한다> 라는 문장을 보고 다시 늙은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인 한탸는 삼십오 년 째 지하실에서, 폐지 더미 속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지하실에서 폐지를 압축하는 남자는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작가는 냉혹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의 정신 상태를 세밀하게 써내려간다.  폐지 속에서 지내다 보면 종이를 빨리 처리 하는 것에만 신경을 쓸 것 같고, 종이 자체에는 흥미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래서 한탸의 생각들과 행동들이 색다르게 느껴졌다. 읽으면서 그런 지점들이 흥미로웠던 듯 하다.


한탸라는 인물은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한번 책에 빠지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책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날이면 날마다, 하루에도 열 번 씩 나 자신으로부터 그렇게 멀리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 소설 속에서 한탸의 목소리로 들리는 문장들을 읽으면 모두 그렇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독서를 하면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 독서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문장으로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탸 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 나오는 한탸의 외삼촌이라는 인물도 열정적이다. 한탸의 외삼촌은 저금을 해서 은퇴를 한 뒤에도 압축기를 가져오자는 생각을 한다. 그는 사십년을 철도원으로 일하며 건널목 차단기를 올리거나 내리며 선로 변경을 책임졌던 사람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은 <사십년 동안 나처럼 일이 유일한 기쁨이었던지라 은퇴한 후에도 그 일 없이는 살 수 없게 된 사람이다.> 라는 문장이다. 요즘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보다는 어쩔 수 없이 돈이 되는 일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한탸의 외삼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여 오랫동안 애정을 쏟아서 해왔던 것 같은데 은퇴를 해도 그 일을 잊지 않고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정말 대단하고 멋진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이런 문장이 나온다. <모두가 자신들의 놀이에 빠져 얼이 나가 있었다. 놀이라고 해봐야 그들이 평생토록 애정을 쏟았던 일의 반복에 불과했지만,> 이라는 문장이다. 대체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하는 일을 놀이라고 할 수 있을 까? 아무리 재밌고 좋아하는 일이라도 놀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충분히 이해가 되는 비유였다. 나도 한탸와 한탸의 외삼촌처럼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나이가 들어도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지는 않았다. 읽으면서 공감되는 문장들이 많았고,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순간들이 많아서 끝까지 읽었던 듯 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고독했고 슬펐던 부분은 바로 어머니의 죽음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한탸는 어느 날, 어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어머니는 결국 돌아가시고 만다. 죽음은 정말 언제 올지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항상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어머니의 죽음이 어느 날이 아니라 언제 죽을 것 같은 지 세세하게 묘사했다면 공감이 안됐을 것 같다. 또 많이 와 닿았던 표현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엄마가 죽었을 때 내 안의 모든 것이 울었지만 막상 내게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라는 문장이다. 사람은 너무 슬프면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모습을 문장으로 잘 표현해서 더 슬프게 느껴졌던 것 같다. 그리고 얼마나 슬펐으면 흘릴 눈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표현했을까. 읽으면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장의사 인부가 엄마의 뼈를 추려서 곱게 갈고 그것을 유골함에 넣고, 유골함을 들었는데 생전에는 75킬로그램은 족히 나가던 사람이 지금은 저울에 달아보니 재의 무게가 적어도 50그램은 축이 나 있었다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몇 십 년을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 끝은 50그램도 안 되는 재로 남는다는 게 허무하기도 했다. 재가 되면 그 사람이 아예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화장을 하고 나서야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것이 실감이 나서 눈물을 흘리는 것 같다. 누군가의 죽음은 시끄러운 고독처럼 슬픈 일이다.

 

 

[차유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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