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작가를 ; 듣다] 황경신 낭독회에 가다 [도서]

[작가를 ; 읽다 - 특별편] 무언가를 듣는다는 것
글 입력 2018.10.17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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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길이 자꾸 의심됐다. 분명 성대시장 안에 있다 들었는데 찾아가면서도 ‘길을 잘못 들었나?’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간판을 찾았을 때, 전혀 상상치 못한 외관이었다. 대륙서점은 옛날 간판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바랜 파란 간판을 보자 마치 옛날 문방구가 떠올랐다. 사람 냄새 나는 시장 안에 사람 냄새 나는 서점이 대륙서점이었다.

11일 8시. 이곳에서 황경신 작가의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신간기념 낭독회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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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안에 따로 마련된 황경신 작가 책 코너



나의 첫 입문서는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였다.


보는 내내 이걸 쓴 작가의 책만큼은 소장해서 두고두고 나이가 들며 계속 읽어나가고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또 다르게 읽힐 책 같았다. 그래서 궁금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생활을 할까. 어떻게 이렇게 글을 쓸 수가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그녀의 낭독회로 이끌었다.


아! 다시 생각해보니 그녀의 글에서 내가 쓰고 싶은 글의 냄새가 났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의 글이 좋았고, 본받고 싶었고, 궁금했다.


일상적인 단어 하나에도 마음 휘청여하며 글로 표현하는 사람. 표현이 하나같이 공감되어 날 웃기기도 울리기도 하는 사람. 나도 그런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황경신 작가는 그런 점에서 배우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낭독할 때의 어조가 아직도 생각난다. 마이크 너머로 울리는 나긋한 목소리. 차분하지만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던 모습도. 서점 안에서 그 모든 게 어우러지며 따뜻하게 뭉쳐졌다.


그녀의 첫 낭독은 쌀쌀해진 추위를 헤치고 모인 우리에게 어울리는 글이었다.




# 낭독1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中



가령


-

규칙을 좋아하는 ‘령’과 상식을 싫어하는 ‘가’는

낮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빵을 먹는다.


언제라도, 누구에게나,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가령, 이를테면, 만약에,

마음을 굳게 먹고 누가 누군가를 찾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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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낭독회는, 낭독보단 질문에 대한 답과 그녀의 이야기로 많이 채워졌다. 책을 쓰게 된 이유와, 그녀가 잡지 PAPER 편집장이었을 때의 에피소드로. PAPER를 창간하기 전, 기자로 일했을 때의 에피소드로.


가장 기억나는 건, PAPER를 창간한 후 인터뷰 기사에 가장 많은 공을 들였다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인터뷰를 할 때면, 동틀 때까지 함께 술을 마셨다고. 아마 취중 토크의 시초일 거라고. 그 말을 듣는데 순간 ‘주량이 어느 정도이실까.’라는 생각이 짧게 스쳤다. 그래도 누군가를 조금이라도 알기 위해선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과 술이 제격이라는 것에 크게 공감했다. 잠깐 보여 지기 식이 아닌, 어떤 사람을 정말 알아가고 싶다는 그녀의 생각도 느낄 수 있었다.


그때는 지금같이 스마트폰으로 녹음하는 기능이 없어 작은 녹음기를 가지고 다니며 테이프를 갈아 끼웠다는데, 돌아가서 녹음을 풀 때 한 곳에 녹음이 두 번 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모두가 술에 취해서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다고.




# 낭독2


위로의 레시피 中

(욕심에 전문을 싣습니다. 쉬엄쉬엄 읽어주시길)



나는 너의 밥이다


그날의 날씨를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한다. 공기의 온도가 어땠는지. 대기 중에 습기가 얼마나 차 있었는지, 뺨에 닿던 바람이 찼는지 뜨거웠는지, 그런 것들. 나는 계절이라거나 중력, 지구에서도 떨려 나간 기분이었으므로 모든 것에 가위표를 치고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했다. 한 사람과 헤어지긴 했지만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이별이었으니 새삼 서러울 것도 아플 것도 없었다. 다만 이 광활하고 단조롭고 낡은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도 난감하고 억울하다는 기분이었다.


머리 풀고 통곡할 만한 이유도 없이 질질 짜고 있는 나를 보고 당신은 무척 당황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 물어야 할까, 당신은 망설였다. 당신이 어떻게 달래든 나는 입을 열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미 겪은 일, 아름답지도 자랑스럽지도 않은 과거를 다시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의 눈, 나의 목소리, 어쩌면 나의 손 같은 데서 당신은 내 마음을 읽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언제까지나 거리에 서서 그러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당신은 나를 데리고 뚜벅뚜벅 걷다가 밥집을 찾아냈다.


‘밥이라니.’

난감하고 억울한 와중에 기가 막혔다. 내가 기가 막히거나 말거나, 당신은 국밥 두 그릇을 주문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 속에 하얀 밥알이 보였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다는 사실이 그때 생각났다.


“밥 먹자.”

당신은 숟가락을 내 손에 쥐어주고, 김치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주고, 가만히 밥을 떠먹었다. 하얀 밥알들이 숟가락 안에 담겨 당신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이상하게도, 그 밥이 예뻐 보였다. 아른아른한 국과 아롱아롱한 밥, 그 옆에서 자기 차례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한 접시의 김치. 놀랍게도, 이럴 때 밥을 먹는다는 건 황당하고 구차한 일이라는 생각이 사라졌다. 놀랍게도, 이 순간 밥을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기분이 들었다.


“국물하고 같이 떠먹어라. 목 메지 않게. 천천히.”

그것이 국밥이었던 이유를 그제야 알았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천천히 밥을 떠서, 오래오래 씹어 삼켰다. 눈물 때문이었는지, 국밥은 조금 짰다. 그렇게 그릇을 반쯤 비우고 나자, 아주 먼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 되었다. 중력이라거나 지구도 다시 실감이 났다. 우리는 자리를 옮겼고, 나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힘들겠구나.”

당신은 그렇게만 말했지만, 나는 이미 모든 위로를 받았다.

당신은 내 편이란 확신이 뱃속 깊은 곳까지 차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뻔한 삼류드라마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았을 것이다. 헤어지기 전, 당신이 말했다.


“혼자 밥 먹기 싫으면 전화해라. 내가 네 밥이다.”


시작은 나빴지만 마지막은 좋았던 날이어서, 가끔 그날의 날씨가 기억나지 않는 것이 아쉽다. 그래도 조금 짰던 그 국밥의 맛은 기억한다. 당신이 한 말도, 음절과 음절 사이의 간극과 어조까지, 또렷이 떠오른다. 그 말이 마음의 바닥에 새겨졌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꺼내놓기도 힘든 괴로운 일로 인해 마음을 다친 이의 손을 잡고 밥집으로 가는 사람. 눈물을 지켜주고 고통을 가져가는 사람. 세계의 끝에서 유일하게 편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 당신이 그런 사람을 애타게 찾고 있을 때, 당신에게 달려가 당신의 손을 잡고, 말하고 싶다.


내가 너의 밥이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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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 작가의 새 신간 기념 낭독회인 만큼, 신간 책에 대한 낭독도 잊지 않았다.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는 PAPER 당시 독자들에게 ‘영혼시(영혼을 위로하는 시’라 불린 김원의 사진과 함께 실은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PAPER를 동시대에 읽은 독자들에겐 추억의 글이, 그녀를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겐 작가 입문서가 될 것이다.


*


낭독회에 다녀오는 길에 엄마를 만났다. 작가 낭독회를 다녀왔다고 했더니 엄마가 말했다.


그런 데 안 가봤는데.

나도. 그래서 가봤어. 그런데 되게 좋더라.


요즘 “듣는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있다. 점점 크면서 나는 무언갈 온전히 받아들이기보다 가려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이게 나에게 도움이 될까? 시간 낭비는 아닐까?’라고 발전을 단정 지었다. 발전하고 싶다, 더 넓은 생각을 가지고 싶다 그리 외치고 다녔으면서.


결국 내 범주 안에서만 자랐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그래서 요즘은 무언가를 많이 들어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찾고, 들어보면서 '듣는다는 것'에 신기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듣는 건 가리지도 골라내지도 못했다. 생각지도 못한 받아들임이었다.

'아 이런 생각도 있구나.', '이런 정보도 있구나.' 더 넓은 바다였다. 모든 처음이 그렇듯, 난 거기에 이리저리 휩쓸리며 좀 어지럽긴 했다. 그러다 눈을 뜨니까 그 넓은 바다가 예뻐 보이더라.


이번에 황경신 작가의 낭독회를 듣고 오는 길의 공기도 유난히 달랐다. 그날 내 생각이 넓어졌다기보다 내 인생에 있어 반향점을 준 거라기보다, 마음이 넓어졌달까.


그냥 따뜻했다. 마음 한구석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따뜻해지는 일임을 알았다.




작가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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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을 자극하는 독특한 문체로, 독특한 스타일로 독자들에게 다가서는 작가 황경신.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그녀는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89년 서울문화사에 입사하여 '무크' 기자로, 월간 PAPER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림 같은 세상』을 포함해 『나는 하나의 레몬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생각이 나서』 등의 책을 펴냈다.

 


사진출처 : 대륙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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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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