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대, 나의 말 대신 내 손 끝을 봐주시오

무용극 <궁:장녹수전> 리뷰
글 입력 2018.10.1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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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유용하다. 말은 그림보다 효율적이고 몸짓보다 명료하며 전자 신호보다 복잡하다. 우리는 말로써 사유를 넓히고 지식을 늘리고 그것을 쌓아 후대에 물려주었다. 감히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말은 피곤하다. 말을 듣고 말을 하고 말을 쓰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들어간다. 특히 말로써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는 경우가 그렇다. 말로 하는 소통이란 내가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물론, 타인이 전하고자 하는 바 역시 왜곡 없이 정확히 듣고자 하는 노력이 무수히 연속되는 과정이다.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는데도 오류는 발생하기 마련이고, 그 오류가 말을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반면 말하지 않고 전달하는 것은 힘들다. 그것은 대체로 체력을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묘한 편안함이 있다. 조리와 논리와 눈치와 관습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직관의 세계.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로소 찾아오는 평안함이 있다.





한국 전통 무용극을 본 뒤 이런 심오한 생각이 들었다면 내가 이상한 걸까. 확실한 건 이 무용극이 나에게 어떠한 긍정적인 생각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공연을 보기 전까지 내가 갖고 있던 건 오히려 약간의 부정적인 예감이었다. ‘한국 전통’이나 ‘무용’ 모두 나와는 거리가 있는 단어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야 전통 악기를 가르치던 학교에서, 혹은 열정적인 호기심으로 들어간 춤 동아리에서 이것들과 미약한 접점을 갖기는 했었다만, 현재 나의 삶 속에는 거의 들어있지 않는 단어들이다. 고백하건대 공연을 보기 전까지 나의 마음은 기대 반 걱정 반도 아닌 걱정 반 두려움 반에 가까웠다.

그러나 공연은 훌륭했고, 나의 마음은 백팔십도 뒤집혔다.

 
궁 장녹수전 포스터_웹용_국문_0308.jpg
 

아쉬운 점이 좋은 점보다 현저히 적은 공연이니 그것부터 빠르게 지적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우선 지적하고 싶은 점은 이 공연이 장녹수라는 인물을 해석하는 방식이다. 극의 주인공인 장녹수는 조선 연산군의 후궁으로서, 연산군을 유혹해 정권을 장악하고 왕의 실정을 부추기며 여러 악행을 저지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은 여태껏 장녹수를 규정한 조선의 악녀라는 이미지 대신 그의 예술성과 천재성이라는 새로운 면을 부각하고자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의 정치적 행보 역시 다소 긍정되는 느낌이 있었다. 극 중 연산군은 못된 신하들의 상소에 시달리는 불운한 왕으로 묘사되고, 장녹수는 그런 연산군을 구해주고 왕으로서의 권위를 되찾아주는 의로운 인물로 묘사되는 면이 있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고, 패자였던 연산군과 장녹수도 역사의 비난에 대해 억울한 점이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연의 역사 해석 또한 한 쪽으로 기울어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한편 공연 시작부분에 진행되었던 관객 참여형 놀이는 솔직히 없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객석을 반으로 갈라 구호를 외치게도 하고, 관객을 한 명씩 뽑아 각종 놀이와 게임을 시키기도 하는데, 재미있기보다는 어설픈 흥으로 오히려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감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점은 포스터. 사실 이 공연에 대한 나의 우려의 상당부분이 바로 포스터 디자인에서 기인했다. 아름다운 배우의 얼굴을 전면에 내세우는 포스터에는 왠지 모를 진부함이 있었다. 그보다는 무용이 부각되도록 디자인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감히 제안해본다. 왜냐하면 이 극은 배우의 미모도, 그러한 미녀의 기구한 서사도 아닌 오롯하게 무용으로 승부하는, 명실상부 무용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열거한 점들은 이제 잊어주시길. 사실 나에게는 아주 사소한 점들이었기 때문이다. 무용극은 무용극의 본질에 충실하면 되는 법. 그런 점에서 이 극은 무용극을 기대하고 찾은 나와 같은 관객들의 기대를 이백 프로 채워주는 극이었다. 무용극을 잘 몰라서 그렇게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공연 전 나는 이 공연이 소재만 전통무용인 평범한 뮤지컬이 아닐까 생각했다. 보통의 뮤지컬처럼, 이 극 역시 서사는 인물의 대사와 행동으로 이끌고 그 사이사이 (서사 진행에는 아무 도움 안 되지만 볼거리는 많은) 춤이나 퍼포먼스를 뜬금없이 끼워 넣는 형식일 것이라 생각했다. 스토리는 이미 대강은 알고 있는 장녹수의 이야기이니 새로울 게 없고, 무용이라도 화려하게 잘 살리면 본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극에는 아무런 대사도 노랫말도 없었다. 무대 양 옆 스크린의 짤막한 자막으로 모든 언어적 설명을 대신했다. 무대에는 오로지 춤과 표정과 몸짓만이 가득 찼다. 그리고 이러한 이 공연의 연출 앞에서 나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용극의 본질을 가장 잘 실현하는 방법이 바로 이거구나, 싶었다. 언어로 전달되는 서사 옆에서 무용이 치이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극은 아예 언어의 방해를 없애고 관객이 무용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니 이백 프로로 기대치를 달성한 셈 아니겠는가.


4장_입궐한녹수_가인전목단춤.jpg
 

그렇게 마주한 한국무용은, 아름다웠다. 그냥 붙인 수식어가 아니다. 거칠거나 모나지 않았고, 경박하거나 다급하지 않았다. 무용의 선은 우아한 곡선이었고, 무용의 속도는 기품 있는 여유를 머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궁중 무용인 ‘가인전목단’. 풍성한 모란을 들고 장중한 궁중 음악에 맞춰 추는 단정한 무용에는 왕의 무거운 권위마저 깃들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빠르고 화려한 안무에서도 그 기품은 덜하지 않았다. 화려한 장구 솜씨가 두드러지는 ‘장구춤’은 장구 연주를 병행하며 빠르게 추는 안무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용수가 손끝, 발끝까지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이 보였다. 아주 사소한 동작, 사소한 장면도 절대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모든 무용수들이 자신의 동작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하나의 예술을 완성하고 있었다.


2장_기녀들과 녹수의 장고춤.jpg
 

연기 또한 훌륭했다. 대사가 없는 공연이다 보니 극 중 서사를 전달할 때면 얼굴 표정과 간단한 몸짓을 사용하고는 했는데, 말이 없는 전달임에도 불구하고 모호함이 거의 없을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가 훌륭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입궐 전후의 장녹수의 표정 연기였다. 입궐 전 기방에서 기예를 배울 때까지만 해도 마냥 순수하던 그 얼굴이, 연산의 눈에 들에 입궐하게 되자 권력욕으로 가득한 얼굴로 바뀌면서 장녹수의 심리 변화를 묘사하던 그 연기는 정말이지 탁월했다. 배우들은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이야기를 하고 생각을 내뱉고 감정을 전달했다.

끝으로 소품 사용과 각종 퍼포먼스를 비롯한 연출 역시 좋았다고 말하고 싶다. 가면이나 인형, 칼 등을 상징물로써 적절하게 사용해, 유치하거나 어색하지 않게 서사를 전달하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연산이 신하들의 상소문에 고통 받는 장면의 연출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신하들이 사방에서 기다란 상소문으로 연산군을 옭아매는데, 점점 연산을 옥죄며 마치 파도처럼 펄럭이던 상소문은 그 자체의 화려함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퍼포먼스였다고 생각한다.


6장_상소문장면_녹수와연산.jpg
 




대사와 줄거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집중해야만 했던 연극이나 영화와는 확연히 달랐다. 언어의 침묵 속에서 펼쳐지는 이 공연에는 자유가 있었고, 그것이 주는 독특한 편안함이 있었다. 내게는 생소한 그 편안함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이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익숙한 이야기가 전제되었기에, 그리고 이야기를 전달하던 활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편안함이었을 것이다. 그 자체만으로는 어렵거나 지루할 수 있는 한국 무용을, 흥미로운 서사와 엮어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드러낸 이 공연은 훌륭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이야기인지, 무슨 말을 할지에 먼저 관심을 두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이야기는 잊게 된다. 결국에는 오로지 무용수의 손끝에, 그 눈빛에 감탄하게 만드는 작은 마술 같은 공연이었다.




[김해랑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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