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1등만 하면 상관 없어? [영화]

영화 4등을 보고
글 입력 2018.10.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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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에 속아선 안 된다. 포스터는 잔잔하고 희망적인 일본식 성장 영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뚜껑을 열어보면 불편해서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건 아픈 영화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외면해선 안 되는 목소리다.

이 영화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육체적인 폭력부터 정신적인 폭력 모두를 포함한다. 과연 체벌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맞을 짓이라는 건 존재하는가? 아이들은 정말 맞으면서 배우고, 맞으면서 크는 걸까? 영화는 무수한 질문을 던진다.



내가 일등만 하면 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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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처음에 어린 광수가 코치에게 신체적 폭력을 당했을 때, 그가 '맞을만했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준호가 광수에게 정신 못 차린다며 멍이 들도록 맞을 때에도, 아이가 '맞을만했다'라고 생각했다. 전자는 광수가 노름에 빠져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십여 분간 보았기 때문에 든 생각이라면, 후자는 좀 달랐다. 준호의 경우 의지 없는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결코 연습에 허투루 임하지 않는다. 숨을 몰아쉴 만큼 헤엄치고 또 헤엄친다. 정신 못 차리는 남자애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코치가 준호를 때렸을 때 '맞을만했다'라고 생각한 건, '코치가 봤을 때 정신 못 차리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런 거겠지.'라는 이유가 컸다. 어른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라는 생각. 무서운 생각이다.

그리고 늘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코칭으로 결국 한계를 뛰어넘게 되는 스포츠 대서사시. 극장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소재 아니던가. 스포츠가 아니더라도 <위플래쉬>와 같은 유명한 영화도 있다. 우리에게 그런 '스승'은 꽤 흔하고 익숙한 존재다. 내가 영화 <4등>을 보면서, 광수에게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거다. 학습된 폭력. 학습된 체벌. 다 그러면서 크는 거야,라는 무서운 논리.

그리고 더 무서운 건, 폭력이 대물림된다는 거다. 어린 시절 코치에게 맞아 수영을 그만둔 광수가 어른이 되어 자신의 제자인 준호를 때린다. 그리고 그런 코치가 무서워 수영을 포기하려던 준호는 자신의 수영복을 몰래 입었다는 이유로 동생을 때린다. 폭력이 폭력적인 아이를 기른다. 그게 가장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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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편에 또 다른 종류의 폭력을 상징하는 <엄마>가 있다. 극 중 준호의 엄마는 내게 영화에서 가장 불편한 캐릭터였다. 신경질적인 성격을 뒤로 제쳐두고서라도, 준호를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을 화면 밖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하여, 아이에게 부담을 주고 책임감을 갖게 만드는 사람. 수영을 그만두고 싶다는 준호를 향해 "네가 무슨 권리로 수영을 그만둬?"라며 몰아세우는 모습은 그녀가 가진 욕망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아이의 의지와 선택과는 무관하게 오로지 '부모에 의해' 짜인 인생. 어른이라는 이유로,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의 삶을 쥐고 흔드는 것. 개입하고 조종하는 것. 이것 역시 모두 폭력이었다. '돌봄'을 방패 삼아 가해지는 폭력.



엄마는 정말, 내가 맞아서라도 1등만 하면 좋겠어?


1등은 정말 좋은 걸까? 영화도 답을 보여주진 않는다. 1등을 도맡아 하는 선수에게 준호가 "형, 1등을 하면 뭐가 좋아요?"라고 물었을 때에도, 또 준호가 같은 질문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영화는 확실한 대답을 피한다. 1등을 하면 뭐가 좋을까?

오히려 준호는 극 초반 만년 4등이던 시절 더 행복해 보인다. 1등에는 관심이 없는, 그저 놀기 위해 수영이 하고 싶었을 뿐이던 때. 시합 전의 긴장감보다도 아이스크림에 대한 욕구가 더 큰 아이. 친구들과 놀고 집에 돌아오면 컴퓨터 게임이 하고 싶은 아이. 하지만 그러던 그가 "수영이 너무 좋은데, 수영을 하려면 1등을 해야 하니까요."라고 말하게 되었을 때, 그걸 지켜보는 어른으로서의 나는 많이 착잡하고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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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빛을 보면 우주의 기운이 나에게 오는 것 같다"라는 말을 할 줄 아는 소년이다. 수영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아이다. 수영장 가장 밑바닥, 빛을 쫓아 헤엄치는 준호의 모습은 순수하고 그래서 아름답다.

(준호 역을 맡은 배우의 수영하는 폼이 너무 예쁘다고 생각을 했는데, 찾아보니 실제 수영 선수란다. 연기 경험도 있어 바로 캐스팅됐다고. 눈이 똘망똘망하여 배우인 줄 알았는데 수영 선수라니. 의외지만 잘 어울린다. 반대로 진짜 수영선수인 줄 알았던 어린 광수 역은 그냥 배우라고 한다. 수영선수처럼 몸은 만들었지만 수영을 선수급으로 익히기가 힘들었다고. 촬영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까 익사할 뻔도 했다고. 그래서 수영씬이 적게 나오는 거라는 비하인드 스토리.)



그 너머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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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난 뒤 그 이후의 준호의 삶을 상상해봤다. 스포츠라는 혹독한 세계에서 버티기란 쉽지 않을 거다. 수도 없는 경쟁과 대회가 이어질 테다. 엄마를 이겨내고 코치를 이겨냈듯이, 앞으로도 수많은 것들을 이겨내주길. 준호에게 수영장이 치열하고 아픈 공간이 되지 않길. 영화 속 마지막 경기처럼, 빛이 가득한 공간으로 남길 바랐다. 물을 좋아하고 물속의 빛을 쫓을 수 있는 지금의 마음이 빛바래지 않길 바라고 또 바랐다.



엮어 읽기


체벌은 엄연히 별개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고 폭행인데도 아이의 관점이 아닌 성인, 부모의 관점에서 지속된다. 어느 누구도 사랑을 이유로 또는 타인의 행동 교정을 위해 다른 사람을 때릴 수 없는데 오직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유일한 집단이다.


미숙한 아이들을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열등한 상대에 대한 교정 목적의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오래된 논리다. 그러나 수많은 경험적 연구는 체벌의 교육적 효과는 없고 되레 폭력의 내면화를 통해 뒤틀린 인성을 만들어낼 뿐이라고 지적한다. 아이들에게도 반성보다 공포만 불러일으킬 뿐이다.

"상처받음, 무서움, 속상함, 겁이 남, 외로움, 슬픔, 성남, 버려진 것 같음, 무시당함, 화남, 혐오스러움, 끔찍함, 창피함, 비참함, 충격받음."

'체벌'에 대한 아이들의 기억이다. 영국 세이브더칠드런이 2001년 아이들이 맞았던 경험을 어떻게 느끼는지를 정리한 기록이다. 아이들은 체벌에 대한 끔찍한 느낌을 40개가 넘는 형용사로 표현했지만 그중 미안하다거나 반성한다는 느낌을 말한 아이는 없었다. 체벌이 교육적으로 별 효과가 없을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큰 피해만 입힌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략)


'체벌 덕분에 오늘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라는 논리 역시 한국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서도 체벌금지가 사회적 의제가 될 때마다 등장하는 체벌 옹호의 논리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런던통신'에서 "학창 시절 회초리나 채찍으로 매를 맞았던 이들은 거의 한결같이 그 덕에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이렇게 믿는 것 자체가 체벌이 끼치는 악영향 중 하나"라고 말했다.

어릴 때 회초리를 맞지 않았더라면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지는 겪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아마 지금과 비슷하거나 폭력에 민감한 감수성을 장착한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다고 해서 그 방법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체벌의 유해성을 연구해온 발달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거쇼프는 이를 자동차 안전벨트에 비유해서 설명했다. 성인의 상당수는 자동차 안전벨트가 없던 시절에 자랐다. 하지만 누구도 안전벨트가 없었던 덕분에 내가 잘 자랄 수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안전벨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탈하게 자랐다고 말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모의 체벌 덕분에 내가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체벌에도 불구하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고 말해야 한다.

/ 이상한 정상 가족, 김희경



[송영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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