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궁: 장녹수전> Point of No Return

글 입력 2018.10.21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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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장녹수전> 및 영화 <오페라의 유령>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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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로맨스, 남들에겐 미심쩍은 사이. 내게는 음악의 소울메이트이자 뮤즈, 남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폭력적인 집착. <궁: 장녹수전>을 보고 느꼈던 말할 수 없는 느낌이 영화 <오페라의 유령>으로 형체로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한낱 잘 나가던 오페라 하우스의 얼굴없는 주인이 무슨 조선왕조의 대문짝만한 왕과 이름을 견줄 수 있겠냐만은, 둘다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팬텀과 연산군이 보여주는 감정은 이상하게도 조금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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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신데렐라'라는 문구가 무색하게 '예인 장녹수'에겐 '위험한' 면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카피 문구를 수정하는게 좋지 않을까 싶지 않을 정도로 아마 알고 있던 게 없더라면 왕과 사랑에 빠진 어느 평범한 예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전개는 간단하다. 장녹수는 빼어난 재주로 연산군에 눈에 들었고, 궁에서 압박을 견디기 위해 폐비 윤씨라는 패를 꺼내 들었다. 연산군과 함께 뱃놀이를 하고, 나 잡아봐라 놀이를 하며 여유롭고 낭만적인 일상을 보낸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 패를 꺼내든 이후 난폭해졌지만 그녀에겐 예외였다. 그를 몰아내려는 불길로 그들은 세상을 떠나고 남은 이들은 또 새로운 좋은 세상을 기다린다.
  
단순한 해피엔딩 구조이기 때문에 공연장을 채운 많은 외국인들이 봤을 때는 이 둘이 왜 악명높은지 예술적으로 어떻게 더 뛰어난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이들의 눈에 들어온 건 이국적인 한국의 아름다운 의상과 춤선이었을 것이다. 장녹수는 특히 독무로 뛰어난 춤 실력을 보여주었고, 어지간한 남자들에게 기에 밀리지 않는 모습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궁에 들어온 이후 그녀는 춤이나 노래를 많이 보여주지 않았다. 그녀는 예인 중에서도 까다로운 기준으로 흥청에 선발되어 있었고, 실력과 총애를 생각하면 다른 예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예인들을 선발한다든지, 그녀가 궁에 들어오고 나서 예술적인 면에서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아서 아쉬웠다. 직접 본인이 뭔가를 하지 않았더라도 궁의 예인의 모습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했더라도 그 또한 예인의 모습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그녀에게 제안대군이 가무를 가르치고 익히게 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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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녹수를 떠올리면 질문이 많아진다. 왜 연산군과 한 배를 타게 되었을까. 남들에게 포악하고 죽이기를 일삼는 그가 무섭진 않았을까. 칼 끝이 자신에게 향하지 않을거라는 자신이 있었을까. 그를 아명으로 부르고 치마자락에 쌓을 수 있을만큼 담대한 사람이었을까. 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연산군의 깊은 트라우마인 '폐비 윤씨' 칼잡이를 그에게 상기시켜준 것은 여러모로 독은 아니었을까. 살고 보자고 꺼낸 그 수가 불러 일으킨 결과를 보며 후회스러운 순간이 있었을까. 혹은 뒤를 걱정하기엔 당장의 호화가 너무 좋았던 것일까. 공연 자체는 그 답까지는 알려주지는 않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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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실마리는 영화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장녹수나 크리스틴 모두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된 케이스였다. 어느 날 제안대군의 눈에 들어 음악을 배웠고 재능이 연산군의 눈에 들었던 출중한 예인 장녹수. 크리스틴 역시 장녹수와 마찬가지로 팬텀이 눈 여겨보고 직접 자신의 뮤즈로 삼고 제자로 가르치기까지 한 재능있는 친구였다. 천인 출신이었던 장녹수가 말도 안되는 품계에 단순간에 이르렀듯이, 크리스틴 역시 팬텀이 아니었다면 실력상으로나, 기회상으로나 코러스걸에서 마돈나 자리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음악의 천사'이자 주인인 팬텀에게 맹목적으로 빠져들었다. 얼굴도 알지 못하지만 그녀의 영혼은 분명 팬텀과 잘 맞았고 음악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를 통해 '들리지 않던 것까지 들리기 시작했다'고 할 정도였으니까.

그녀는 그가 집착하고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하면서 구속감을 느끼고 벗어나고 싶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한 켠에 고민은 안고 있었다.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두려움과 그의 약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측은함,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음악적인 면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존경심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장녹수 역시 연산군에게 딱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조선의 대단한 왕이면 뭐 하나, 어차피 어미 잃어 마음이 뻥 뚫린 남자에 불과하다고. 나의 춤과 노래를 볼 때의 얼굴과 다른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하는 이 얼굴이 다른데도 분명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 생각에 잠기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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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팬텀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모두 자신의 아픈 상처가 만든 광기라는 기관차를 멈추지 못했다. 문제가 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연산군의 어머니 트라우마와 팬텀의 흉측한 얼굴 트라우마는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마저 위험에 빠뜨렸다. 연산군에게도 그가 무척 아끼던 정직한 내관 김처선이 있었고, 팬텀에게도 그를 있는 그대로 보호해 주었던 오페라극장의 마담이 있었다. 그들이 어떤 약점을 갖고 있었더라도 받아들여줄 몇 안 되는 사람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장녹수와 크리스틴을 오래 함께할 수도 있었다. 그런 방법을 찾으려 노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직 자신에게, 자신을 위해서, 그녀들이 존재하기를 원했다. 이런 그에게 모든 것을 맞춰주길 바란 것이다. 그건 사랑이지만 한편으론 사랑이 아닐 수도 있다. 그녀들의 예술적 재능을 사랑했지만, 그녀 자체를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그녀의 모습'을 사랑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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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장녹수와 크리스틴이 다른 결말을 맞은 것은 그녀들의 선택 때문이다. 크리스틴은 팬텀의 흉측한 얼굴이 아니라 그의 비틀린 마음 때문에 그를 선택하지 않고 라울과 함께 떠난다. 팬텀이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있지만 사실 그녀만 원한다면 계속 그녀는 팬텀에게 음악을 배우며 마돈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집착도 고집도 견딜 수 없었기에 자유를 선택했다. 장녹수는 그렇게 했다. 연산군의 비틀린 마음을 안고 갔다. 그를 바꾸지 못할 지언정 그의 곁에 있을 수도 있으면서 윤택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함께 했다.

연산군을 막기는 커녕 숟가락을 얹기까지 했다. 사료에 따르면 자신의 치마를 밟은 이를 죽이라 하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연산군이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녀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자조 섞인 말에도 태세를 바꾸지 않았다. 그것은 예인으로서든 그저 사람으로서든 그녀의 선택이었다. 그것이 결국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게 했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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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극이라서 몸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 있었던 점은 분명한 장점이었다. 초반엔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듯 관객 중 2명을 골라 함께 콩던지기 놀이도 하고 참여하는 식으로 흥을 돋워서 재미있었다. 또한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기 위한 효과들이 인상깊었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두 장면. 장녹수와 연산군이 각각 겪어야 했던 궁에서의 압박감과 견제를 표현한 것이었다. 장녹수의 경우 신하들이 여기 저기 숨은 두더지마냥 튀어오르며 북으로 그녀를 몰아세우고 그녀가 북을 두드리며 쳐내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혼자서 수많은 북을 이리 저리 치면서 이긴 건가 싶을 때 신하는 손에 있던 북채를 빼앗아 간다. 애를 써봤자 소용 없다는 느낌처럼.

또한 연산군이 겪어야 했던 부담감 역시 마찬가지다.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었다. 빼곡히 적힌 긴 상소문이 온 사방에 펼쳐졌고 그의 두 발을 딛을 자리 밖에는 남지 않았다. 거미줄마냥 그가 발버둥칠수록 신하들은 사방에서 온갖 각도로 줄다리기를 하듯 하듯 그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고,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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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을 쓴 자는 무게를 견디라 했던가. 그 왕관의 무게로 여러 왕들은 무너져야 했고, 왕이 무너지면 그의 아래의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함께 무너져야했다. 그런 왕의 자리를 원하지 않았더라도 왕의 자리로 태어났기에, 왕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되었으면 더 좋았을 이들이 왕이 되기도 했다. 아마 연산군 역시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모든 권력을 다 가진 듯 하지만 실제 그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 하나 없었을 것이다. 힘을 얻고자 판을 짜고 소문을 퍼뜨리는 등 뻔한 수작, 그로 인해 어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한 아버지와 이 사단에 종용하거나 침묵한 궁궐의 사람들. 말도 안되는 말임에도 꼬집지 못하고 적당히 넘어가야 한다는 것에 분노를 삭혀야 했을 것이다. 장녹수 역시 아마 왕의 여자가 아니라 제안대군 밑에서 잘 나가는 기생으로 자유로운 성격대로 살았다면 황진이처럼 기억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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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나 분노를 표현했다고 연산군과 팬텀 이들이 딱히 행복해진 것은 아니었다. 연산군은 폐비 윤씨라는 패 이외에는 다른 패를 꺼내지 않았다.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예술을 장려하면서도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려 도전해볼 수도 있었는데. 팬텀 역시 무조건 크리스틴을 고집하는 등 일방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지키지 않았다고 사람을 죽이거나 무대나 극장 자체를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수도 있었다. 자신이 공들여 만든 작품이었고 극장은 평생을 지내온 집이자 인생 그 자체였다. 새 작품을 내놓지 않아서 사람들이 먼저 그를 찾아오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가 필요할수록 사람들은 그의 조건을 더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렇게 기이한 유령 대신 까다롭지만 출중한 작곡가로서 자신을 부각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선택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무리 녹수의 치마폭에 쌓여 아명으로 불려도 연산군에게 장녹수가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한 것처럼. 수많은 고통을 겪은 팬텀이 측은하더라도 크리스틴이 그를 사랑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장녹수전의 결말은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의 마지막이 좀 더 비장하게 표현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장녹수와 연산군을 내보내려 일어난 반정에 그들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심경이 평온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녹수가 선택한 연산군, 그리고 그 연산군의 선택이 기댈 곳 없이 안타깝게 둘을 몰아가게 표현되었다면 좀 더 그들의 입장을 공감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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뱃놀이를 하던 이 둘이 자신들을 잡으러 오는 불길과 함성소리를 들으며 장녹수가 연산군에게 나누었을 법한 대화는 영화 <오페라의 유령> 막바지에 나오는 넘버 <Point of No Return>으로 상상해보면 좋을 것 같다. 팬텀을 잡기 위해 알면서도 미끼처럼 무대에 선 크리스틴이 그와 함께 불렀던 곡이다. 어둠 속이 아니라 빛 앞에서, 팬텀과 크리스틴이 함께 부르는 것은 처음이었을 것이다. 가장 솔직한 날 것의 감정이 드러나고 분위기상 파국으로 치닫지만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려는 느낌이 전해졌다. 악녀든, 신데렐라든 어떻게 기억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이지만 내가 생각한 예인 장녹수라면 이런 노래 가락을 남겼을 것 같기에.


Past the point of no return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경계는 지났어
the games we've played till now are at an end
우리가 여태 했던 게임들은 이제 끝났다네
Past all thought of "if" or "when"
이제 "만약", "언제"라는 가정도 소용없어
No use resisting
저항할 수도 없네
<중략>
Past the point of no return
이제 돌아갈 수 있는 경계는 지났어
the final threshold
최후의 문턱
the bridge in crossed, so stand and watch it burn
이미 건너온 다리, 우리의 열정이 불타는걸 지켜볼뿐
We've passed the point of no return
우린 이미 돌아갈 수 있는 지점을 지났어




[장지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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