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세상의 끝에서 사랑을 말하다 [도서]

최진영 작가의 <해가 지는 곳으로>
글 입력 2018.10.21 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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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한국에 대대적인 폭염이 찾아왔다는 기사를 봤다. 사막 한가운데서 고국의 더위를 한탄하는 글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왔다. 몽골을 여행한 지 이레쯤 되는 날이었다. 고비사막에는 하늘과 땅이 철썩 달라붙어 있어서, 모래로 이어진 지평선이 세상의 끝까지 돌진할 것 같았다. 자연과 자신밖에 느껴지지 않는 그곳에 앉아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사막처럼 아무것도 없는 듯한 곳에 버려졌을 때, 인간이 떠올릴 수 있는 가장 큰 희망은 무엇일까?


최진영 작가는 말한다. 뻔하겠지만, 인간은 아마 사랑밖에 떠올릴 수가 없을 거라고. 결국은 사랑이 사람을 살리는 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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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는 곳으로>는 살기 위해 낯설고 황폐한 땅으로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가족과 친구, 연인의 목숨을 빼앗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 대신 눈에 보이는 타인을 원망하기 시작한다. ‘류’, 그리고 ‘도리’와 ‘지나’는 재앙을 피해 고국을 버리고 러시아에 가 닿는다.



그래도 그곳은 넓었다. 계속 나아갈 수 있었다.

바이러스와 강도를 피해 대륙을 헤맬 수 있었다.

오늘은 어제와 다른 해를 보는 것.

되도록 빨리 지금을 벗어나는 것.

떠나야 하는 이유는 단단한 대지를 뚫고 태양처럼 솟아올라

매일 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 12~13p



<해가 지는 곳으로>의 러시아는 사막 같은 땅이다. 바이러스로 촉발된 재앙이 인간을 죽이고, 살아남은 인간이 또 인간을 죽여서, 남은 게 아무것도 없는 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사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 살해와 강간의 위협이 온몸을 덮쳐도, 식량과 차와 기름을 빼앗기고 무장집단에 발이 묶여도, 서로를 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잊지 않는다. 인간만이 인간을 살게 한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곳에서도 타인과 애정을 나눈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디로 가면 지나를 만날 수 있나.
그런 약속 하나 나누지 못하고 멀어졌다.
기다리겠다는 말,
다시 만나자는 말,
돌아오겠다는 말……
안녕이란 말조차 하지 못했다.
겨우 스치는 인연으로 남으려고
우린 이 추운 땅에서 만난 걸까.
서로를 나눈 걸까. 첫눈에 반한 걸까.

- 157p


죽음이 칼을 든 채 턱 끝까지 밀고 들어올 때마다, 희망이 없는 듯한 땅을 헤맬 때마다, 인간은 살기 위해 자기 자신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것에서 이유를 찾는다. 당연했던 것, 익숙했던 것, 소중했기에 잊고 있던 것을 발견한다. 최진영 작가에게는 그것이 사랑이었던 모양이다. ‘같이’의 가치가 소실되는 한국 사회에서도, 우리의 근간에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고비사막에서 슬리퍼를 신은 채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던 때를 떠올렸다. 핸드폰과 노트북을 포함한 문명의 이기를 잃고서 지평선 앞에 내던져졌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배고프다’라거나, ‘넷플릭스 보고 싶다’ 같은 단순한 욕구가 아니었다. 나밖에 없는 것 같았을 때, 뒤에서 떠들던 일행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때, 몽골에 와서 처음으로 외롭다고 생각했다. 얼굴은 모르겠지만 그냥 누군가가 보고 싶었고, 그 사람과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니 최진영 작가에게는 사랑이었던 것이 나에게는 사람이었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이 집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물건일 수 있다.

 

사랑이란 것은 사람마다 늘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시간과 공간처럼 추상적일 때도 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로맨틱하고 섹슈얼적인 감정만을 사랑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사람도 사랑일 수 있으며, 살고자 하는 욕망도 사랑일 수 있다. <해가 지는 곳으로>는 그렇게 사랑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하는 이야기다.



한때 예술가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사랑에는 결말이란 게 없다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결말을 원해서 스스로 매듭을 짓더라도 매듭은 매듭일 뿐.

매듭 다음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다.


- 179p



사람이 사랑으로 사람을 살린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내일을 상상한다. 재앙이 우리를 덮치고 희망이 죽음을 몰고 와도 끝까지 걸어 나아간다. 사랑이 있고 해가 있고 내일이 있는 한, 인간은 살아내는 걸 멈추지 않는다.

 

막막한 현실에 지쳐 훌쩍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내가 그랬듯 당신 역시 사막으로 가고 싶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때, 타인에 지쳐 자신 안으로만 꼭꼭 숨고 싶을 때. 사랑을 품고 세상의 끝까지 돌진하는 이야기에 빠져보기를 권한다. ‘헬조선’에서 살아가는 당신이 의외로 ‘인류애’를 잃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권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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