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진짜와 가짜, 당신은 오늘 무엇을 소비했나요?

예술을 소비하는 대중의 방식, 연극 <애들러와 깁> 리뷰
글 입력 2018.10.22 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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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와 가짜,
당신은 오늘 무엇을 소비했나요?
-예술을 소비하는 대중의 방식-


연극 <애들러와 깁>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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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독 연극을 많이 봤다. 딱히 연극을 싫어하지도 그렇다고 타 콘텐츠에 비해 싫어하지도 않는다. 나에게 연극은 여러 문화 콘텐츠 형태 중의 하나다. 그저 올해는 어쩌다 보니 연극을 많이 보았고, 덕분에 연극이란 형태가 얼마나 생생한 입체감을 주는지 직접 체감했을 뿐이다. 연극은 요상하다.  드라마나 책처럼 내가 현실에 굳건히 존재하면서 나의 속도로 소비하는 콘텐츠와는 실질적으로 다르다. 조명이 꺼지고, 휴대폰을 잠시 끄고 가상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점에선 영화와 비슷하다. 하지만 영화와는 주는 느낌이 다르다. 똑같이 압도당하더라도 영화는 커다란 스크린이 위에서 나를 덮치는 느낌이라면, 연극은 공기가 내 주변을 한 바퀴 돌아 나를 묶어두는 느낌이다. 이상한 표현이지만 둘의 질감은 미묘하면서도 분명하게 다르다. 이번에 본 연극도 역시 연극의 공기가 나를 묶었다. 좌석은 약간 불편했고,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지는 플롯은 생각을 멈추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눈이 뒤집힌 배우들의 광기 어린 연기는 소름이 끼쳤다. 약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여러 방식으로 연극은 나를 자극했다. 생각하고 생각하도록.

이 연극은 어떻게 리뷰를 써야 할 지 모르겠다. 어려운 내용인가 싶다가도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분명하게 전달된다. 스토리 전개방식이 약간 독특하지만 이해하는데 큰 무리는 없고, 배우들의 생생한 연기 덕에 예술 소비에 대한 일종의 '광기'도 피부로 선명하게 체감된다.

콘텐츠의 소비방식,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진실과 미디어를 통한 재현, 광기, 집착, 공인...

여러 단어가 스쳐 지나간다. 사실 무언가 제대로 해석하고 음미해서 '샅샅이 뜯어봐야지'하는 마음으로 보기보단 연극이 흘러가는 대로 빠져서 보았기 때문에 더 더욱 하나의 주제로 이 연극을 해석하긴 힘들 것 같다. 결국 내가 택한 방식은 또, 이것 저것 날 것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조각 글이다.



우린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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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 썼던 짧은 평으로 시작하자.

예술을 소비하는 대중의 방식은 때로는 광기와 같아서, 진짜를 죽이고 가짜를 만들어내곤 한다.
오늘의 나는 누군가를 흥밋거리로 소비하지 않았나 자문해본다.

연극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든 생각이다. 이 연극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예술을, 아니 예술을 포함한 모든 현상을 소비하는 대중의 방식이다. 쉽게 생각해 연예인과 공인을 소비하는 우리의 방식에 대한 논의다.

극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때 기이하고 충격적인 작품으로 20세기 말 미국 현대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자넷 애들러와 마가렛 깁. 이들은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은 의미가 없다'며 자신들의 작품을 파괴한 뒤 대중의 관심을 피해  숲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계속 되지만, 그들은 세상과의 연결을 끊어버리고 잠적한다. 몇 년 후 애들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깁 역시 죽었을 거란 소문이 돈다. 하지만 그녀들은 죽어서도 대중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다. 그중에서도 매우 강렬하게 애들러가 되길 희망하던 여배우 루이즈는 애들러를 모델로 한 영화에 주인공으로 캐스팅되고, 죽은 애들러를 대신해 살아있는 애들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애들러의 흔적을 찾아 과거 애들러와 깁이 살던 집에 불법으로 침입한 그녀와 그의 내연남 샘은 그 곳에서 죽은 줄만 알았던 깁을 만난다. 남은 여생을 온전한 개인으로 살고 싶었던 애들러와 자신의 소망이 담긴 집에서 애들러의 죽음을 지키던 깁과, 완벽하게 애들러가 되겠다는 일념 하에 모든 흔적을 앗아가려는 루이즈. 결국 실체를 밀어내고 진짜가 되어버리는 루이즈의 광기어린 집착이 승리하면서 극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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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여생 만큼은 온전한 자신으로 남아있길 원했던 애들러와 깁에게 꾸준히 이어지는 대중들의 관심은 독과 같다. 그리고 이들의 모든 것을 앗아가 겨우 잊혀져가던 대중의 관심을 다시 끌어들이려는 영화화의 시도는 일종의 재앙이다. 그 재앙의 중심에서 진짜를 밀어내고 진짜가 되려는 가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린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야."

더 이상을 사건을 피하고 싶어 숨어버린 사람들을 쫓고, 그들의 생활을 캐내고, 그들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는 수작은 그렇게 자신의 미친 광기를 합리화한다. 가장 아름다운 사건은 사실 가장 추악한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진짜와 가짜, 시뮬라시옹과 하이퍼리얼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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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만하면 철학적인 용어나 어려운 개념을 리뷰에 넣지 않으려는 편이지만, 이 연극은 너무나 충실히 시뮬라시옹과 하이퍼리얼리티의 개념을 보여주고 있기에 잠깐 이야기하고 넘어가려한다. 시뮬라크르, 시뮬라크라, 시뮬라시옹, 하이퍼리얼리티. 모두 현실과 가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철학적 용어다. 장보드리야르에 의해서 체계화된 이 현실과 가상에 대한 개념은 사실 현대철학의 대부분과 연결된다.


시뮬라크르 : 실제의 인위적 대체물, 가상
(시뮬라크라는 시뮬라크르의 복수형태)

시뮬라시옹 : 기호와 이미지가 실재를 대체하는 현상

‘하이퍼리얼리티(초실재)’ : 실재는 소멸하고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이 현실을 지배하는 상태


간단한 정의는 대략 이렇다. 연극에서 루이즈가 애들러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행위는, 영화 속에서 애들러의 배역을 연기하는 설정과 이어진다. 루이즈는 대중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애들러'라는 인물을 자신의 유명세로 이어지게 하려는 야심을 품는다. 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애들러=루이즈'라는 공식을 각인 시키려는 행위이다. 이를 위해선 영화 속에서 완벽하게 애들러가 되어야했다. 그래서 그녀는 영화의 스토리와 다른 '현재'를 살고 있는 깁을 치워버리고, 애들러의 인생을 영화의 스토리에 맞춘다. 실제로 애들러가 어떻게 죽었는 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중요한 건 영화의 스토리가 진실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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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루이즈는 애들러의 시뮬라크르가 된다. 그리고 영화가 대중들에게 보여지면서, 대중들의 머릿 속에는 루이즈라는 배우가 애들러라는 예술가로 대체된다. 시뮬라시옹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묻혀버린 진실은 가라앉아 사라져버린다. 유일하게 진실을 아는 깁은 극의 끝부분에 등장하지 않는다. 극에서 보여지는 두 번째 영상에 나타난, 애들러와 깁의 살았던 산 속에 누워있는 누군가의 모습은 아마 깁을 상징할 것이다. 영상 속 인물이 신고있는 구두는 그녀가 생전에 신었던 구두와 똑같으니까. 극의 스토리는 시뮬라시옹을 넘어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로 들어선다. 이제 진실은 없다. 가짜가 진짜가 되었고, 진실이 아니었던 것은 진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대중 앞에 자신을 각인시키겠다는 어느 여배우의 광기와 한 개인의 일생과 존재 자체를 콘텐츠로 소비하는 대중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독특하고 입체적인 구성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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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 극의 가장 특이한 점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전개방식과 입체적인 구성이다. 극에서 처음 나타나는 건 '소녀'다. 이 소녀는 아무런 말 없이 무대 위에 앉아있다. 해골과 삽, 가재, 망치, 트리, 총으로 대변되는 소품들은 이 아이의 장난감이다. 이 아이는 사슴도 되고, 애들러와 깁이 키우던 강아지가 되고, 죽어버린 애들러가 된다. 이 캐릭터는 가변적이다. 처음엔 도대체 이 소녀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슨 역할일까 생각했다. 가장 눈에 들어오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첫번째 구성의 축이다.

이야기를 구성하는 두번째 축은 논문 심사 과정에서 자신의 논문에 대해 발표하는 학생이다. 그녀는 애들러와 깁의 열성적인 팬이며 그들의 일생을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그녀는 두 사람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나열한다. 언제 태어났고, 작품 활동의 경향은 어땠으며, 두 사람은 언제 만났고, 언제 작업 중지 선언을 했으며, 어디에서 살았는 지 등 그녀의 발표는 사실 상 애들러와 깁의 연대기를 읊는 과정에 가깝다. 그녀의 발표는 대중들이 인식하는 애들러와 깁의 인생과 비슷하다. 그녀는 그들의 삶을 흔적을 이야기할 때마다, '슬라이드'를 외친다. 그리고 연극의 가장 중요한 서사는 이 슬라이드 안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슬라이드 부탁합니다'라고 사라질  때마다 그 슬라이드 안에서는 그녀가 설명한 것과는 다른 차원의 진실이 그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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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이드 안에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루이즈와 샘이 애들러의 흔적을 쫓다가 깁과 만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리고 끝내 깁의 존재로 대변되는 진실을 소멸시켜버리고 루이즈의 여우주연상으로 대변되는 시뮬라시옹과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를 보여준다. 참으로 고의적인 비틀기가 아닐 수 없다. 학생이 말한 내용은 대중에게 인식되는 애들러와 깁의 이야기다. 대중들은 아무도 진실을 모른다. 그들이 아는 것은  가상이 진실을 대체한 현실이다. 따라서 학생이 언급한 슬라이드는 사실, 이에 걸맞는 진짜를 밀어낸 가짜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한다. 하지만 슬라이드는 역설적으로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울리지 않는 이 두 서사의 흐름은 아슬아슬하게 극의 끝부분까지 이어진다. 사실 이 연출의 절정은 극의 마지막 부분이다. 영화가 상영되고 난 후, 여우주연상을 받은 루이즈가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장면은 학생이 등장하지 않는다. '슬라이드 부탁합니다'는 이미 그 전에 사라졌다.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는 과정'에 대해 밝히던, 일종의 진실의 창은 이제 닫혀버렸다. 가짜가 진짜가 되어버렸으니까. 깁이 가진 진실은 사려졌고, 루이즈가 만든 스토리가 이제 진실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에게 이 연출은 상당히 독특했다. 시뮬라시옹과 하이퍼리얼리티의 개념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행위였다. 신선하고 치명적이다.



어린 아이의 유희, 대중의 소비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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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잠깐 언급했던 소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이 부분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기하고 눈길은 끌었지만, 해석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겠다. 나중에 조금 더 연출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았더니 소녀와 소품들의 존재는 유아기의 놀이를 상징한단다. 이렇게 보면 소녀가 각 장면마다 인물들에게 소품을 쥐어주는 행위와 여러 캐릭터로 변주하는 과정은 딱히 개연성이 없는 어린 아이의 무의식적인  놀이의 흐름과 닮아있다. 즉 마음가는 대로, 논리없이 즐기는 행위란 것인데 이것은 일부 대중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사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이해를 충분히 하지 못해서 각 소품이 가진 의미나 소녀의 행위 자체에 대한 해석을 내놓을 입장은 아니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 장치는 대중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 어린 아이의 유희와 같다는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설사 그 콘텐츠가 살아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일생이라 해도 말이다. 유년기의 놀이는 장난감과 함께한다.

어린 아이는 장난감을 어떻게 대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진짜와 가짜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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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난해했던 극의 서사와 연출들이 오히려 해석을 해나갈 수록 머리와 가슴에 와 박힌다. 입체적인 구성, 약간은 불편했던 좌석,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보이던 메타포들, 극의 끝부분에 나오는 아름다운 두 여인의 영상 모두 좋다. 엄마가 등산을 갔다가 보내올 것 같은 한국 산의 모습이 담긴 두 번째 영상은 약간 웃겼지만 말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하지 못한 특징이 하나 더 있다. 극의 끝으로 갈수록 극 전체가 살아난다. 처음엔 굉장히 기계적이고 딱딱한 배우들의 연기는 가짜가 진짜를 대체하려는 시도가 강해질 수록 생기있게 변한다. 루이즈의 욕망에 따라 가짜는 진짜가 되고, 진실이 되어가는 가상은 힘을 얻어 자신의 형태에 감정을 싣는다. 극 자체의 변주는 관객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초반엔 이해 가지 않는 모든 단서들이 극이 끝나갈 수록, 그리고 극이 끝나고 이를 음미할 수록 이해가 되고 살아난다. 내가 본 연극이 진짜와 가짜 무엇을 말하려고 하 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본 연극 역시 하나의 가상이지만, 그 가상이 현재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무척 닮아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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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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