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땡큐베리스트로베리 [공연예술]

글 입력 2018.10.22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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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주인님?”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으로 웬 로봇이 문을 두드린다면? 소름끼칠 정도로 사람과 똑 닮은 로봇이 해맑게 웃으며 “저는 이제 주인님을 위해 존재합니다.”라는 말을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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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이하 땡큐 베리)’의 주인공 엠마에게 일어난 일이다. 엠마가 살고 있는 싱글마의 마을 구성원들은 모두 혼자다. 가족도, 동거인도, 친구도 없이 홀로 살아간다. 오랜 세월을 자신의 구역 안에 그 누구도 들이지 않은 채 홀로 시간을 죽이던 엠마에게 어느 날 갑자기 풋풋한 청년의 얼굴을 한 가사 도우미 로봇이 배달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볼까 두려워 커튼도 치지 않고, 집안 곳곳에 쌓여가는 먼지는 털어낼 생각도 하지 않았던 엠마에게 로봇 스톤은 그저 애물단지다. 쫓아내려고 갖은 애를 써 봐도 “주인님 반경 5미터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에 낙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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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기다려보세요. 당신은 분명 변할 테니까. 그게 내 임무니까요.”

반면 스톤은 해사한 미소로 어두운 집을 밝히며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마치 처음부터 엠마의 곁에 있었던 ‘사람’처럼 부지런히 엠마를 돌보고 집을 청소한다. 스톤의 맑은 미소에 결국 엠마도 마음을 열고, 둘은 아주 서서히, 아주 조금씩 가까워진다. 굳게 닫혀 있어 아무도 눈길조차 줄 수 없었던 엠마의 인생도 약간씩 빈틈이 생긴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로봇과 로봇보다 더 무감각한 시간 위를 유영했던 엠마가 만나 가짜 같은 진짜를 경험하는 것,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다.

이 극은 2014년 처음 제작에 들어가 201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 독회 공연으로 처음 관객들 앞에 선 후 올해 8월부터 정식 공연에 들어갔다. 독회와 다르게 정식 공연에서는 결말과 캐릭터를 조금 수정해 엠마의 성장에 조금 더 초점을 두었다. 엠마와 스톤의 관계뿐 아니라 엠마가 세상 밖으로 발을 디밀고 타인에게 손을 뻗는 성장이 주가 되면서 더 명확히 주제를 전달하게 되었다. 온도를 정의할 수조차 없는 무채색이었던 엠마의 세계에 조금씩 색이 물들고 온기가 스미는 초반 서사와, 제 세계뿐 아니라 타인의 세계까지 유채색으로 물들이는 후반의 서사가 맞물리면서 엠마의 성장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초반의 ‘땡큐 베리’는 잔잔하고 부드럽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 속 어느 호수에 떠 있는 잎사귀마냥 평온하다. 그러나 잔잔한 호수일수록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크게 요동치는 법이다. 이게 바로 ‘땡큐 베리’가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는 방식이다. 고요히 흘러갈 것 같았던 초반 서사를 뒤집는 반전, 그리고 이어지는 치유와 위로가 이 극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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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의 집을 배경으로 하는 무대는 온갖 서랍과 바구니, 쓰레기통, 잡동사니로 채워져 있다. 답답할 만큼 꽉 찬 무대에서 유채색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극의 무대는 엠마의 매몰된 기억, 사장된 감정,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새어나가는 시간까지 그리고 있다.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을 되찾고 나서 스스로 서랍을 열고 눈물을 쏟는 엠마를 보면 벅찬 감정까지 솟는다. 이 과정에서 스톤은 엠마를 서랍까지 인도해주는 역할을 한다. 문을 여는 사람은 엠마다. 문고리를 잡도록 손을 내밀어 줄 뿐, 빛을 담도록 커튼을 쳐줄 뿐, 뒤돌아있는 엠마를 묵묵히 기다려줄 뿐, 절대 먼저 엠마의 세계를 열지 않는다. 주체적 여성 캐릭터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이처럼 ‘땡큐 베리’의 가장 큰 매력은 캐릭터와 그 캐릭터의 서사다. 노년 여성 캐릭터가 주연이라는 점, 심지어 그 노년 여성 캐릭터가 어마어마한 주체적 성장을 한다는 점까지. 그리고 그 가운데서 남성 캐릭터들이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보완해준다는 것과 노년 여성 주인공이 스스로 제 한계를 깨뜨리고 맞이하는 해피엔딩을 지켜보면 여성 주연극을 향한 갈증이 시원하게 해갈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동안 다수의 공연에서 노년 여성 캐릭터는 남성 주인공의 어머니에 한정되어 있었다. 물론 남성 주인공의 어머니가 극을 이끌거나 사건의 중심에 서서 스스로 서사를 구축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지만, 늘 남성 주인공 서사를 보조하거나 주인공의 이기적 행동 또는 비윤리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위치였다는 게 문제다. ‘땡큐 베리’의 여성 캐릭터가 이러한 캐릭터 프레임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만으로도 이 극의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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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짓말 같은 세상에 진심 아닌 가짜가, 가짜 같은 진짜가 당신과 함께.”

눈이 시릴 정도로 차가웠던 무대에 알록달록한 다색 조명이 물들 때면 엠마의 눈시울에도, 관객의 눈시울에도 눈물이 맺힌다. 엠마 인생과 정반대의 온도를 가진 로봇 스톤이 그 특유의 따스한 눈빛으로 엠마를 바라본다. 잔뜩 얼어 있던 눈빛과 손길이 온기에 녹아들고, 변화를 갈무리한 후에 엠마는 이런 대사를 뱉는다.
 
“(변화는) 안 위험해. 봐. 살아있어.”

물론 이 극에도 아쉬운 점은 존재한다. 관객에 따라 이 극의 연출이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는 점, 버나드 캐릭터의 입지나 역할이 모호하다는 점, 그리고 후반부 주제 전달이 지나치게 직설적이라는 점이 아쉽다. 전반부 서사와 후반부 서사를 이어주는 복선이 다량 존재하지만 사실 그 장치들이 복선이라는 것을 깨닫기는 쉽지 않다. 반전을 반전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관객들이 서사를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어야 하지만, 이 극은 관객들과 배우들의 해석 여지를 크게 남기고 있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서사가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또한 극의 배경인 ‘싱글 마을’의 변화를 방지하는 소년 캐릭터 버나드가 극의 흐름을 다소 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버나드를 통해 관객들이 엠마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버나드가 극의 서사에 필요한 캐릭터임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성장, 즉 주제를 전하는 방식이 직설적 대사라는 점도 조금 아쉽다. 은유 가득한 연출 및 무대와 상반되는 주제 전달 방식이기 때문이다. 아직 초연 공연이기 때문에 조금씩 서사와 캐릭터를 다듬어 더욱 완성도 있는 작품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 극에는 모든 단점을 뛰어넘는 감동과 가치가 있다. 세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가 무한경쟁과 쓸쓸함에 잠식된 요즈음, 서로가 서로에게 스톤과 엠마가 되어준다면 우리네의 삶이 조금은 ‘땡큐’해지지 않을까. 쌀쌀해진 날씨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작품이다. 극 중 대사를 빌리자면,

“이 극만이 가진 특별함이 있거든.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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