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배니싱 [공연예술]

글 입력 2018.10.2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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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내 친구, 내 가족, 내 동료에 대해 나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직접 타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 사람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마치 철학자의 한 마디 같지만 사실 어느 뮤지컬의 주제다. 사라지고 있는 사람과 사라지고 싶지 않은 사람, 그리고 사라지질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뮤지컬 ‘배니싱’이다.

뮤지컬 ‘배니싱’은 2016년 트라이아웃 공연, 2017년 초연을 거쳐 올해 재연을 맞았다. 네오 프로덕션 작품 특유의 스산한 분위기로 시작하는 ‘배니싱’은 현재 몇몇 회차는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관객들의 관심이 높다. 이 극은 1900년대 초반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다. 경성 의전에 다니고 있는 의학도 의신과 그의 후배 명렬, 그리고 그들 앞에 불현 듯 나타난 의문의 존재 케이. 햇빛이 닿으면 살이 타들어가고, 음지에 있으면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지만 사람 혹은 짐승의 피를 마셔야만 하는 존재가 케이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을 잊은 채 어둠 속에 홀로 지내온 케이에게 의신은 손을 뻗는다. 당신을 연구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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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히도 외로웠던 케이에게 의신은 그야말로 빛 그 자체다. 미어지게 그리웠던 온기, 온몸이 탈지언정 한 번쯤은 가득 맞이하고 싶었던 햇빛, 하지만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태양이 바로 의신이다. 어쩌면 300년 넘는 세월 동안 외면 받고 배척받던 케이에게 의신의 따뜻한 관심은 빛 이상이었을 지도 모른다. 만약 케이의 진심이 의신에게 잘 닿았더라면 비극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의신은 몰랐다. 케이가 제게, 제가 케이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 극의 주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타인을 이해하려거든 타인과 같아져라.

케이는 사라질 수 없는 존재고, 의신은 점차 제 모습을 잃어가는 존재다. 그리고 명렬은 사라지고 싶지 않은, 어떻게든 버티고자 하는 인물이다. 의신의 후배인 명렬은 아버지의 명성과 친일 덕에 부족한 의학 실력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한다. 하지만 천재 의사 의신을 향한 명렬의 열등감은 아주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어 명렬을 끊임없이 갉아먹는다. 사람들에게 들키면 곤란해질 것이라는 이유 탓에 비밀리에 진행하던 케이에 대한 연구를 명렬이 발견한 후, 명렬은 불안에 휩싸인다.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는가, 왜 형은 나를 외면하는가. 여기서 명렬이 ‘난 형처럼 되고 싶어.’라는 말을 미리 했더라면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세 캐릭터가 진솔한 소통만 했더라도 셋의 관계는 파탄나지 않았을 테지만, 세 인물 모두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탓에 결국 파국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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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나뉘어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타인의 감각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피부를 뚫고, 그와 내가 하나의 동질임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이해가 시작된다.”

햇빛에 대한 열망은 케이를 좀먹었고, 케이와 연구 양쪽 모두 포기할 수 없었던 의신의 욕심은 의신을 파괴했다. 새카만 열등감에서 비롯된 비이성적 욕심은 명렬을 짓뭉갰다. 결국 이 셋은 한 번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사라지거나, 사라졌거나, 사라질 예정에 빠졌다. “여름밤은 참 짧기도 하”다는 케이의 대사에서, 케이가 얼마나 의신과 함께 있고 싶은지, 얼마나 자신을 이해해주길 바라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햇빛 속을 걷는 꿈, 케이에게는 그것이 제 어둠을 견디는 힘이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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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의 가장 큰 장점은 서사와 인물 관계가 상당히 흥미롭다는 것이다. 대학로에서 큰 성공을 거둬 대만까지 진출했던 뮤지컬 ‘팬레터’, 현재 일본 진출을 앞두고 있는 뮤지컬 ‘스모크’, 2013년부터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뮤지컬 ‘사의찬미(이전: 글루미데이)’, 그리고 ‘배니싱’까지, 이들은 모두 경성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격변의 시대가 주는 묘한 긴장감과 이질감이 작품 분위기에 톡톡히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경성과는 사뭇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뱀파이어 소재까지 더해져 극이 한층 독특하고 신선해졌다. 또한 세 인물의 감정적 대립, 유대감, 그리고 애증이 만들어내는 관계성도 관전 포인트다. 네오 프로덕션의 다른 작품인 뮤지컬 ‘비스티’나 뮤지컬 ‘사의찬미’에서도 유사한 대립과 애증이 극을 풍성하게 해주어 큰 사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캐릭터성이 이 극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110분이라는 시간 안에 세 인물의 만남과 유대, 대립, 그리고 결말까지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선택과 집중이 필요했다. 17년도 초연 ‘배니싱’은 의신과 케이의 유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었다면 18년도 재연 ‘배니싱’은 의신과 케이의 대립, 그리고 명렬과 의신의 관계에도 초점을 두어 세 인물의 서사를 강화했다. 명렬의 서사가 강화되고 텍스트가 보충된 것은 장점이라 할 수 있으나, 그 과정에서 인물의 성격을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넘버 및 대사가 보강된 것은 아쉽다. 명렬이 의신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어 더욱 친일과 성공에 매달린다는 것은 앞부분 서사만 제대로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성격이다. 이 가운데서 명렬이 “내가 열등할 리는 없어”라는 가사를 관객들에게 전하는 게 과연 필요했나, 라는 의문이 남는다. 친절한 연출은 관객들을 서사에 좀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하지만, 친절함이 과할 경우 자칫 극이 늘어지거나 지루해질 수 있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이나 그가 가진 가치관을 직접 설명하기보다 상징적인 연출이나 장면으로 보여주었다면 극이 훨씬 세련되어지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연출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극이 전하고자 하는 주제와 극 속 캐릭터의 매력은 이 극의 큰 장점이다. 사무치게 외로운 케이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 다가온 의신처럼, 누군가에게는 이 극이 한 줄기 햇살이 될지 모른다. 비록 통장의 잔고를 태우고 내 체력을 녹인다 해도 한 번은 보고 싶은, 그런 극이다.

“여름날의 찬란한 햇빛 나를 태워버린다 해도 잠시라도 느껴보고 싶었어.”


[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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