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뒤에 올 여성들에게

페미니즘 경제학을 연 선구자, 여성의 일을 말하다
글 입력 2018.10.2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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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뒤에 올 여성들에게



세상은 점점 바뀌고 있다. 약 50년 전까지만 해도 제사상 앞에 여성은 서 있을 수 없었다. ‘안사람’, ‘바깥양반’이라는 말이 자주 쓰였을 만큼, 집 안의 일은 여성, 집 밖의 일은 남성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조선 시대에서 건너온 남존여비 사상은 여러 여성의 목숨과 삶을 끊어놓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점차 바뀌고 있다. 젠더 평등을 따르는 법적 환경, 사회 이데올로기,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바뀌어 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건 갑자기, 어느 순간 ‘짠’하고 나타난 변화가 아니다. 분명 누군가가 그 변화를 몸소 만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뒤에 올 여성들에게>는 그 변화를 몸소 만든 인물 중 하나인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최초의 여성 교수, 마이라 스트로버의 회고록이다. 이 책에는 그녀가 겪은 차별, 모순은 물론 그 모든 것을 극복해내는 과정이 담겨있다.




모순의 연속




"빌리와 제가 우리 반에서 제일 잘해요. 그런데 빌리는 바르미츠바를 하고 저는 안 해요? 불공평해요."

내가 엄마에게 불평하자, 엄마가 답했다.

"공평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여자는 비마에서 코라를 읽을 수 없단다. 나도 대다수 남자들보다 히브리어를 잘하고 정확히 이해하지만, 비마에서 토라를 낭독해본 적은 없어." -p.77


가장 놀라운 규칙은 영하 7도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바지를 입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온도를 확인했다. -p.116



이 책을 처음 편 순간, 나는 여러 ‘모순’과 마주해야 했다. 마이라 스트로버(이하 마이라)가 당면해야했던 매일매일은 모순 투성이었다. 대부분 성차별이 그 모순의 근원지였다. 비합리적이고, 도무지 타당성이라고는 없는 것들이 마이라를 괴롭혔다. 마이라가 기억하는 최초의 성차별이 ‘모든 사람들은 자기 안에 신의 조각을 똑같이 품고 있다’는 교훈과 함께 모두에게 친절하셨던 할아버지에게서 시작된다는 점은 모순을 특히 두드러지게 한다. 모두에게 친절했던 할아버지도 결국 성차별주의자였고, 그가 사랑했던 손주 마이라도 성차별로 인한 피해자였다.


종교 내에서의 암묵적인 성차별이 있는가하면, 학교에서는 놀랍도록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복장 규정과 여학생들에게만 적용되는 속박이 있었다. 사실 이 부분은 ‘놀랍도록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지만 내 나이 또래의 여성들 역시 비슷한 복장 규정 아래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점에서 눈물 나게 공감 갔다. (심지어 우리는 날씨에 상관없이 치마를 입어야 했다. 여학생이 바지를 입으려면 교장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바르미츠바를 대신하는 바트미츠바(여자애는 바트미츠바를 대신 치르기도 한다.)가 생기고, 비합리적이고 인권 침해적인 복장 규정은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했던 성차별들은 모두 사라진 것일까? 이 작은 기대는 우리 각자를 호명하는 순간부터 산산조각난다. 마이라 스트로버. ‘스트로버’라는 성은 마이라의 전 남편인 샘의 성이다. 마이라가 ‘스트로버’라는 성을 이혼 후, 그리고 재혼 후에도 고집했던 이유는 어떤 성을 쓰든 그 것은 남성의 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럼 네 어머니의 결혼 전 성인 셰러를 써. 아니면 외할머니의 결혼 전 성인 그린버그를 쓰든지." 친구들은 말했다.

"그것도 남자들의 성이야. 하나는 할아버지 성이고, 다른 하나는 증조할아버지 성이지. 여기서 우리가 이길 방법은 없어." -p.332



결국 마이라는 스트로버를 계속 사용하기로 한다. 어떤 성을 고집하든 거기에서 여성이 이길 방도는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결혼 후 여성이 성을 바꾸는 일은 없지만, 결국 유지하고 있는 성 역시 아버지의 성을 받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크지 않다. 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여성은 여전히 이길 방법이 없다. 현재 진행형인 모순이자, 차별이다.


비합리적이고, 모순이고, 뼛속깊이 남성중심적인 마이라의 사건 사고들에도 나는 그저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이미 알고 있고, 어쩌면 겪어봤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반면 마이라가 커리어를 시작하면서부터 겪은 일들은 내 경험에는 없으나 이미 숱하게 들어본 것들이었는데, 나는 문득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의 ‘김지영’이 생각났다. 많은 여성들의 공감과 분노를 샀던 이 소설이 다시금 떠올랐다는 것은, 마이라의 일들이 그리 멀지 않은 이야기였다는 의미였다. 마이라가 가장 먼저 마주한 성차별은 ‘전공’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일하는 여성




“교실을 잘못 들어온 것 같군요, 아가씨.” -p.155



이 말은 마이라가 MIT에서 맞는 첫날, 노동관계 세미나 교실에 들어서며 교수인 찰스 메이어스에게 들은 말이다. 교실에 여성이라고는 마이라 혼자였다. 당시 경제학이라는 분야에서 여성이 얼마나 희귀했는지 알 수 있는 구절이다. 대학원에서 겪은 일이 이 정도라면, 마이라가 교수가 되고나서는 어땠을까. 말도 못할 정도로 무례한 일들이 벌어졌다.



"당신 같은 사람에게 중요한 필수과목을 들으려고 학비를 내는 게 아닙니다!"-p.246



마이라가 거시경제학 수업을 처음 맡기 위해 교실을 들어선 순간, 두 남학생이 교실을 나가며 마이라에게 던진 말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단 두 음절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여성’. 두 남학생은 철저한 성차별주의자로, 여성에게 거시경제학을 배운다는 것에 화났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은 그나마 흐릿해졌지만, 당시에는 젠더간 직종 차가 심했다. 두 남학생이 교실을 박차고 나간 것은, 이러한 직종 차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직종 차는, 곧 임금 차이를 의미했다.  경제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마이라가 이 차이를 그냥 넘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마이라는 본인의 경험과 생각을 바탕으로, 그 원인을 밝혀내려 노력했다. 이 부분은 다른 어느 회고록보다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는데, 젠더 간의 직종 차이를 보다 경제학적으로 파헤쳐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직종이 여성 직종이 되는 현상을 이야기할 때, 여성이 해당 직종에 유입되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우리 연구는 일자리 의자 뺏기 놀이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남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어떤 직업이 똑같은 교육 수준을 요구하는 다른 직업보다 매력도가 낮으면, 남성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남성이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여성이 그 자리로 들어간다. 이는 초등학교 교사가 여성 직종이 된 현상을 발견한 것과 완전히 똑같다. ...(중략)... 이런 현상은 고용주가 남성에게 직종을 선택할 첫 번째 기회를 주며, 이는 어떤 직종이 여성 직종이 되는 것은 남성이 그 직종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라는 내 이론을 확인해주는 증거다. -p. 313-315



마이라는 ‘일하는 여성’으로, 그의 커리어 곳곳이 성차별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마이라가 종신직 심사에서 이유를 알 수 없이 3번이나 떨어지고, 모든 경험 연수에서 여성이 급여 분포 하위 5분의 1을 과대 대표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마이라에 대한 세 번째 평가 요청을 받은 이들이 말한 것처럼, 성차별은 ‘전부 완전히 미치게’ 한다. 그러나 마이라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위와 같은 연구 끝에 다양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 변화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페미니즘 경제학은 숱한 불평등을 고발해냈으나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순이 많다. <82년생 김지영>이 오늘날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남편과 결혼해 자신의 직장을 포기하는 김지영의 삶이, ‘여전히’ 엄청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마이라의 성공 사례가 우리에게 더 특별한 것은, ‘여전한’ 모순된 현실 속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커리어와 아이, 가정 모두 누릴 수 있냐는 질문에 마이라는 ‘모두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족과 힘겨운 커리어에 함께 헌신한다면 양쪽 다 성공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대답을 남겼다. 그리고 ‘좋은 배우자를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내게 이 질문은 굉장히 익숙하고도 생소했다. 직장과 동시에 가정을 가지게 된 여성들이 숱하게 던져온 질문임과 동시에, 그간 남성중심적인 사회에서 남성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두 누릴 수 없나요?’라고 전전긍긍하며 묻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마이라는 좋은 배우자를 찾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지만, 그 것 이상으로 우리는 계속되는 혁명이 필요하다.




연대라는 길



마이라가 페미니즘 경제학의 선구자가 되었던 것은 결단코 그 혼자만의 선택, 혹은 그 혼자만의 과업이 아니었다. 마이라에게 영감을 주는 앞선 페미니스트들이 있었고, 그를 지지해준 가족들이 있었고,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뒤에서 밀고 앞에서 끌어준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은 ‘연대’라는 이름으로 여러 결과를 쟁취해냈고,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 전보다는 더 나은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이제는 우리 차례다.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해야겠다. 우리는 지금 ‘바뀌고 있다’. 완료가 아닌 진행이다. 아직도 수많은 관습과 부족한 제도, 오래된 인식들이 기울어진 저울을 만들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뒤에 올 여성들에게’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제목 뒤에는 ‘평등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동참해주길 바란다’가 붙는다.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마이라와 그의 세대가 하나의 성공을 이룩했던 것처럼, 연대를 통해서라면 우리도 한 차례의 큰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 마이라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아보고 함께 이겨낼 것이다. 마이라가 걸었던 길을 우리도 걸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 루크리셔 모트가 마이라에게 그러했듯, 마이라는 우리에게 새로운 원동력이 된다. 마이라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힘을 주고, 더 싸울 용기를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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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Damien Maloney 출처 스탠포드 비지니스

지은이 마이라 스트로버 Myra Strober


평생 노동의 관점에서 성차별과 싸워온 경제학자다. 박사 학위 면접에서 면접관에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을 거면서 왜 박사 학위를 따려고 하느냐는 말을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남편의 커리어를 우선시했고, 혼자 집안일과 육아를 떠맡았다. 단지 ‘엄마’라는 이유로 종신교수 트랙 고용이 거부당했을 때, 스트로버는 성차별주의라는 자물쇠를 열기로 결심한다.


남성의 세계나 다름없던 경제학계에서 스트로버는 고군분투한다. 버클리대학교 경제학과에서 ‘여성과 노동’이라는 강좌를 처음 개설했으며,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사상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되었다. 성별에 따른 직업 분리, 가사 노동의 가치 정량화, 차별의 비용 등 새로운 개념들을 정립하여 페미니스트 경제학의 장을 열었다. 스탠퍼드대학교 여성 교수들의 임금 인상을 위해 ‘스트로버 보고서’를 작성하고, 결국 급여 차별을 바로잡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코넬대학교에서 노사관계학을 공부했고, 터프츠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MIT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학교 교육대학원 명예교수이자 비즈니스스쿨 경제학 명예교수다. 저널 <페미니즘 경제학Feminist Economics>의 편집위원이었으며, 스탠퍼드 여성연구센터의 초대 디렉터였다. 현재 이 센터는 젠더에 관한 좋은 기사를 쓰는 스탠퍼드 학생들에게 ‘마이라 스트로버 상’을 수여하고 있다.


저서로 《다학문적 대화: 사고의 습관에 도전하기Interdisciplinary Conversations: Challenging Habits of Thought》, 공저로 《길은 저 끝까지 오르막: 미국과 일본의 젠더, 일과 가정The Road Winds Uphill All the Way: Gender, Work, and Family in the United States and Japan》 등이 있다.



*



옮긴이 제현주


투자를 통해 소셜 임팩트를 창출하는 임팩트 투자 벤처캐피털 ‘옐로우독’의 대표를 맡고 있다. 경영 컨설팅업체, 투자은행과 사모펀드운용사 등에서 일했고, 일하는 사람들이 직접 소유하는 협동조합 롤링다이스를 함께 창립했다. 뒤에 올 여성들에게 작게나마 희망을 품을 이유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19년째 일해오고 있다.


카이스트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내리막 세상에서 일하는 노마드를 위한 안내서》, 함께 지은 책으로 《일상기술연구소》 등이 있고,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 《경제학의 배신》, 《21세기 시민경제학의 탄생》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차례


옮긴이의 말
추천하는 말


1부 1970~1971
1장 자매애는 힘이 세다, 1970~1971


2부 1950~1970
2장 발코니로 쫓겨나다, 1950~1953
3장 도약 1954~1958
4장 성소 안으로, 1958~1964
5장 아이가 생기고 격동이 이어지다, 1964~1970


3부 1971~2012
6장 과업을 시작하다, 1971~1972
7장 남성 아흔 명 그리고 나, 1972~1974
8장 새로운 문을 만들기, 1974~1981
9장 재발명, 1982~1989
10장 몰입, 1989~2000
11장 변혁, 2000~2012
12장 세대를 건너 함께 일하기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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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올 여성들에게


페미니즘 경제학을 연 선구자,
여성의 일을 말하다


마이라 스트로버 지음
제현주 옮김
140*217 / 400쪽 / 19,800원
ISBN 978-89-7297-926-5 03330
국내도서>사회과학>여성학/젠더>여성문화
국내도서>에세이>외국에세이
펴낸곳 : 도서출판 동녘
출간일 : 2018년 10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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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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