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 것인 듯 우리 것 아닌 우리 것 같은 것 [예술철학]

근대회화 속 한국의 미(美)
글 입력 2018.10.22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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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한국적 미’는 무엇일까? 대표적으로 곡선, 흙빛, 오방색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렇다면 미술을 통해 대표되는 ‘한국적 미’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대부분 고려청자, 조선백자, 동양화의 먹색 혹은 근대 화가들의 흙색 등을 말할 것이다. 그 중 근대회화의 흙색은 오늘날 토속적이고 서민적인 한국을 대변하는 요소로서, 널리 알려진 박수근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박수근 - 빨래터.jpg
박수근, 빨래터,1950


그렇다면 박수근의 그림 속 흙색이 어떤 색이며, 왜 한국적 미를 대표하는지 알아보자. 박수근은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화가를 물을 때면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가장 '한국적'이고 '민족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례로 수많은 평론가가 그를 가장 '한국적인 풍토성' 을 가진 작가라 평하고 그러한 의견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어 국민화가라는 칭호도 붙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작품들이 국내최고가로 사고 팔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박수근이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인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바로 색과 소재 때문이다. 채도 낮은 흙색과 무채색은 한국의 흙을 연상케 하며 흙색으로 이루어진 표면은 거친 화강암을 떠올리게 한다.


박수근 소녀.jpg
 

그의 그림을 이루는 수많은 여인은 가장 '한국적'이고 전통적인 형상이다. 그의 그림엔 빨래터에 옹기종기 모여 빨래를 하는 여인들과 동생을 업은 단발머리 소녀가 주로 등장한다. 소쿠리를 머리에 인 여인은 아이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가며 그 길에는 나뭇잎 하나 없는 가지만 앙상한 나목이 우뚝 서 있다.


박수근-1960-061.jpg
 

이 여성들을 보고 단지 향토적이고 정겹기만 했다면 그림 속 한국의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그저 여인이 아니다. 오랫동안 지속하여온 한국의 '어머니' 이고 '며느리'이자 '누나'로서의 여성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 가부장제의 희생양이었던 여성들은 그 자체로 존재한다기보다, 절망하여 무너진 남성들을 묵묵히 기다려주고 뒷바라지하는 사회적 역할로서 존재한다. 여성의 지위가 한참 아래였던 시기에 여자는 태어나면 아버지의 딸로, 남동생의 누나로, 남편의 아내로, 아들의 어머니의 역할만을 하며 그 의무는 살림과 노동으로 나타난다. 그저 다정하고 평화로운 농촌생활을 그린 줄 알았던 그림에서 이런 속사정을 알게 되면 오히려 그 분위기가 이질적이게 느껴질 것이다.
 
이러한 소재들은 현실이면서도 현실이 아니기도 하다. 그림 속의 여자들은 당시 남성들의 환상이 타자화한 여성상이라는 것이다. 육안으로 보이듯, 그림의 시점은 제 3자로 존재하는데 이는 박수근 자신으로 대변되는 남성들의 시선이다. 그림 속 여성들은 거친 노동을 하지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생활력이 강하고 제도에 순종적이다. 이런 요소들로 미루어 보았을 때 혼란스러운 시대상에도 불구하고 고요하고 아늑한 그림의 느낌은 사회에 절망해 회복하지 못한 남성들이 언제고 돌아올 수 있는 '집'을 여성으로 형상화하여 고향에 대한 향수를 되뇌는 것이다.
 

고갱 타히티.jpg
고갱, 타히티의 여인들, 1891

가을어느날.jpg
이인성, 가을어느날, 1934


그림을 볼 때는 그 시대상을 알아야 제대로 된 감상을 할 수 있다. 박수근이 활동하던 시기인 1930년대에는 조선총독부의 오락정책에 의해 문화가 정착되는 시기였다. 이때 한국은 조선 봉건왕조미술에서 벗어나 근대미술로 나아가게 되며 그 바탕이 된 것이 조선 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이다. 1922년 한국 근대미술을 운영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의 주관 아래 조선미전이 설립된다.

조선미전이 설립된 배경에는 식민지배를 좀 더 수월히 하기 위한 일본의 문화통치방식이 깔렸다. 또한, 일본화가들의 조선진출 발판이 되어 활발한 활동의 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유화가 국내에 반입되면서 고갱이나 밀레 같은 유명서양화가들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으며 조선 미술로 대표되는 '향토색'이 확립되었다.

한국의 '향토색'이란 농촌, 산, 자연을 포함하여 빨래터, 기생, 가사노동 등 생활 전반의 소재를 다룬 색채로 정의할 수 있다. 여기까지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다. 한국 최초의 여성화가인 나혜석(1896-1948)도 '향토'나, '조선 특유의 표현력'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향토색이 여타 서양화와는 구분되는 한국미술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작가가 일본과 서양과는 다른 조선만의 특색을 자연환경, 중후한 색채를 포함하는 '향토색'이라고 여겼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조선미전 심사위원들은 줄곧 향토색을 요구했고 국내화가들은 그에 맞춰 그린 작품을 출품하였다.

지금도, 향토색이라는 단어가 낯설 뿐 "한국의 미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흙색, 흰색, 칙칙하고 텁텁한 낮은 채도의 색 등 '향토색'에 포함되는 색들을 떠올린다.

사실 이 향토색은 부정적인 의미가 있다. 일본은 조선 미술이 자연을 묘사하며 중후한 색채를 쓰기 바랐는데 그 이유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출발한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인들이 동양을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용어로, 동양을 서양과는 다른 신비하고 위협적인 세계로서 바라본 배타적인 관념이다. 서양이 동양을 바라보는 고정관념이 오리엔탈리즘이라면, 조선 미술에서 '향토색'은 서구화된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이다. 일본은 줄곧 스스로 탈아시아로서 서양화된 진보국가임을 주장하였는데 이때의 사상이 조선미전에 영향을 끼쳤다. 명칭은 조선미전이지만 심사위원들은 모두 일본인이었고 그들은 조선 화가들에게 '향토색'을 강요했다. 이 '향토색'은 근대화된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문화는 도태되고 낙후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향토는 서구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아직도 농업을 생계로 삼는, 미개한 문화라는 것이다. 조선미전을 필두로 한 총독부는 국내작가에게 '향토색'을 계속 주입하여 우리나라를 타자화시키고 상대적 열등함을 나타내어 일본의 위상을 드러내었다. 즉 서구화된 일본이 서구의 눈으로 동양국가인 조선을 바라보고 명명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산물이 바로 '향토색'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수근의 그림에는 조선미전이 국내화가들에게 요구한 '향토색'이 크게 작용했다. 그 향토색을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소재인 여성 이미지조차 전형적인 농업사회의 전경이라는 사실도 위에서 언급했다. 박수근을 비롯해 국내화가들이 조선만의 '향토색'을 표현하고자 했던 결과들은 주로 시골을 소재로 중후한 색채와 자연주의적인 표현이었으나 그것은 서양인과 일본인 심사위원에게 오히려 이국적인 감상을 불러일으킨 꼴이었다. 즉 오리엔탈리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박수근을 비롯해 조선미전에 입상한 작품 대부분이 오리엔탈리즘이 반영되어 나타난다. 일본은 조선의 농촌을 중심으로 한 문화를 '전통과 향토'라는 맥락으로 건전한 문화작용을 꾀했다. 점차 근대화되는 현실과는 달리 농업으로의 회귀를 이상화하며 식민지배를 철저히 하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발현된 사상은 한국 문화의 전반에 널리 퍼지며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수용되고 굳어졌다.

그렇다면 조선 미술이 향토색을 바탕으로 자연주의를 표방할 때 세계미술의 방향은 어땠을까? 서양에서는 더욱 실험적이고 혁명적인 작품을 통해 전통 형식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조선에 자연을 찬양하라 이야기하던 일본마저도 그에 영향을 받아 혁신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아방가르드 미술이 성행하였다. 그들이 통치하던 옆 나라에서는 '농업을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자'를 외치고 있었는데 말이다.

*

한국적인 미에 대해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개념은 '비애의 미'이다. 비애(悲哀), 슬퍼하고 서러워한다는 단어로 막상 생각했을 때는 의아하겠지만 우리는 일상에서  한(恨)이라는 단어를 접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된다.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이란 뜻의 이 한자는 한국인들에게 굉장히 친숙하다. 한국인은 줄곧 한의 민족으로 표현됐고 비슷한 맥락에는 '비애의 미'라는 개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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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어를 써가면 조선의 미를 주장한 사람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이다. 그는 일본인이지만 역설적이게도 말살될 위기에 처한 조선문화를 수호하고 한국미학을 정의한 이론가이다. 야나기는 조선미술을 '비애의 미'로, 쓸쓸한 선의 예술로, 비극적 운명을 짊어져야 했던 미술이라고 정의한다. 끊임없는 주변국가의 침입으로 반도의 평화가 지속하지 못하고 국민은 고통받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에게 조선의 이미지는 한, 자연미, 소박함 등이었고 그것은 오늘날 한국미를 논하는 데 있어 가장 큰 특징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견해는 매우 주관적이고 우리문화를 수동적으로 해석한 결과로서 지금까지도 비판의 여지가 있다. 또한, 야나기의 논리는 중국과 조선을 비교하여 일본의 미를 강조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야나기가 말한 조선 미술이 가진 민예(民藝)의 미는 향토색과 마찬가지로 '자연'을 동일시한다. 즉 자연에 순종하는, 일상과 신앙, 예술이 일치하는 상태를 한국의 미라고 본 것이다.

설령 이 요소들이 일본과는 다른 조선만의 특출난 개성이라 할지라도 오리엔탈리즘을 표방하고 있는 이상 한 국가를 대표하는 '미' 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서구문명을 통한 근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연으로의 회귀만을 추구하는 사상이 바로 '향토색'이며 한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일반화하는 '비애의 미'가 일본이 우리를  타자화시킨 오리엔탈리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자,  이제 다시 생각을 해보자. 박수근은 아직도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된다. 그런데 그 '한국적'이라는 것은 유교에서 출발한 과거인데 이 과거가 현재를 대변하는가? 그렇다면 우리의 현재는 '과거'인가? 다시 말해, 한국적인 것은 과거로 존재하는 것인가? 또 그 과거가 잘못된 사상이라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오리엔탈리즘과 비인권적인 사상으로 범벅된 과거를 덮어 두고 한국을 대표한다 말할 수 있는지, 우리는 '한국적인 것', '한국적 미'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 보아야 한다.


[장재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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