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메이저

메이저의 욕망이 역겹다. 나는 마이너니까
글 입력 2018.10.22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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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론적 관점에서 나는 상당히 관대한 편이다.


그래서인지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규칙들과 도덕이 미학의 기준이 절대로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어떠한 아름다운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를 논함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다른이에게 요구하려 드는 역겨운 선민의식이라 생각한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도 마찬가지이다. 충실한 성적 욕망과 난잡한 행위들, 마약의 흡입에 대한 내용은 사회의 도덕적 기준과는 맞지 않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아름다운 소설이겠고 실제로 수많은 평론가들에게 "인간의 상실성을 그려낸 작품"이라는 극찬을 받고 있다.


허무함, 상실감, 중독, 폭력적 행위를 그저 관찰하듯 묘사한 이 소설은 나에게 분명 아름답다.


약에 취해 끊임없이 오물을 쏟고,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휘두르고, 난잡한 상상을 실현으로 옮기는 모습은 나의 욕망을 대신하는 듯 하다. 욕망하는것조차 죄의식을 들게 하는 도덕의 사회에서 '류'의 행위는 귀 밑이 찌릿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한다.


그러나 동시에 책을 읽는 내내 형용할 수 없는 울렁거림이 나를 지배한다. 책을 마침내 끝 장까지 읽었을때, 입과 목구멍 속 사이 복숭아 씨앗이 걸린듯한 답답함이 느껴진다. 이 구토감의 이유는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가 결국 철저한 메이저의 관점에서 쓰여짐에 있다.


미국이라는 검은새에 물들여진 일본. 일본 또한 검은 새가 되어 날아오른다. 일본은 본래 검지 않았기에 과거의 모습을 잃었다는 상실감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결국 검은새로써의 행동은 잃지 못한다. 결국, 일본은 철저한 메이저의 일부가 되고 그렇기에 상실감을 느낀다. 그러나 검은새에게 먹혀지는 벌레의 입장에서는 그 상실감이 역겨운 위선으로 느껴진다.


류 또한 일종의 검은 새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애벌레들이 가득하다. 애벌레들은 쪼이고, 먹히며 유린당한다. 물론 류 또한 검은새들에 의해 핍박받는다. 그러나 두 생물이 당하는 핍박은 굉장히 다른 의미를 지닌다. 결국 그는 검은새이기 때문이다.


애벌레들이 소비되는 방식은 질릴만큼 상투적이고 짜증난다. 욕망에 대한 파격적 표현이라는 내용과는 달리, 애벌레들이 착취당하는 모습은 현실과 별반 다를비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애벌레인 나는 내 욕망을 류를 통해서 대리만족하지만, 결국 내 존재는 욕망을 이루는 환상 속에서조차 애벌레임에 환멸을 느낀다.


류가, 오키나와가, 가즈오가, 요시야마가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 이 책은 비로소 나에게 아름답고 완벽한 카타르시스이다.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에, 내 마음 속에서 '도덕'으로 감춰놓은 욕망이기에.



[김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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