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1인치 살덩이가 나에게 다가와 마데카솔을 진하게 발라주었다.

영화 헤드윅
글 입력 2018.10.22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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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알 수 없는 대상이 계속해서 나에게 폭력을 가하였다. 도움을 청하려고 주변을 돌아보니 남들도 나와 같이 누군가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그저 묵묵하게 견딜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 이 고통이 지속될 거라는 생각. 거기서부터 오는 무력감이 습하고 진득하게 온 몸을 잠식했다. 정말이지, 너무 피로한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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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느날, 긴 금발을 풀어헤친 채 기괴하게 짙은 화장을 한, 그러나 목 가운데에는 목젓이 버젓이 튀어나온 낯선 사람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 사람은 어느새 온 몸에 새겨진 나의 상처를 물끄럼히 바라보다가, 이내 나를 끌어안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Breath.. Feel.. Love ..Give Free.. Know in you soul ..Like your blood knows the way.. From you heart to your brain ..Know that you're whole.. (헤드윅 ost, midnight radio 中) 그 노래를 듣고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동시에 진득하게 온 몸을 잠식했던 응어리들이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Angry inch, 헤드윅

본명은 ‘한셀’, 그러나 ‘헤드윅’이라는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고 있는 사람.

동독에서 살고 있던 헤드윅은 성전환 수술을 하고 자신과 결혼해주면 미국에 데려가주겠다는 미군의 제안에 성전환 수술을 하게된다. 그러나 미숙한 의료수술로 수술은 실패로 돌아가 그의 성기는 없어지지 않고 1인치만 남게된다. 결국 헤드윅은 여성도, 남성도 아닌 존재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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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남편도 떠나가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이방인이 되어버린 그의 삶은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분노만 남게된다. 이를 표현한 노래가 바로 헤드윅의 <Angry inch>다.


‘성전환 수술은 실패했지 내 수호천사는 졸고 있었어 내게 남은 것은 바비 인형의 가랑이 뿐 수술에서 깨어나니 피 흘리고 있었지 다리 사이의 피를 본 게 여성으로서 첫째 날, 벌써 생리였나? 이틀 뒤 구멍은 막히고 상처는 아물어 살점 1인치만 남았어 페니스가 있던 곳에 질은 없고 1인치의 살점만 남았어 난 성난 1인치! 6인치 빼기 5인치!밤이 될 때까지 숨어 있어야 해난 1인치로 공격준비 끝 난 성난 1인치!’ 


- 헤드윅 ost, Aangry inch中



헤드윅은 이러한 성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분노를 ‘모방’으로써 극복하려고 했다. 생물학적 성에서 어느 위치도 차지하지 못하자 헤드윅은 사회적 성 정체성인 ‘젠더’에 기대기 시작했다. 사회가 추구하는 여성의 모습을 따라하고, 자신의 새로운 남편이자 헤드윅과 같은 드랙퀸인 이츠윅에게도 남성의 모습을 강요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려고 시도했다. 그럼에도 헤드윅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자신이 불완전하고 느끼자, 이때 등장한 젊은 남성 ‘토미’를 통해 자신을 채우려고 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한 ‘사랑의 기원’과 같이 자신의 잃어버린 한쪽이 토미라고 생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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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쌍의 팔과 두 쌍의 다리를 가진 사람
하나로 된 머리 안에 두 개의 얼굴 가진 사람
(중략)
그래 다시 한 몸이 되기 위해 서롤 사랑해
그건 Making love, Making love 
오랜 옛날 춥고 어두운 어느 밤
신들이 내린 잔인한 운명
그건 슬픈 얘기 반 쪽 되어 외로워진 우리'

<헤드윅 ost, The origin of love 中>


헤드윅은 토미와 락음악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헤드윅이 트렌스젠더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토미는 이내 떠나고 만다. 화가 난 헤드윅은 토미를 쫒아다니면서 그의 공연장 옆에서 그의 노래를 따라부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렇게 헤드윅은 성난 1인치, 1인치의 살덩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부터 사랑은 시작된다.

헤드윅은 사랑을 원했다.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대한 공허함을 진정한 사랑만이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간과한 것은,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한 사랑의 기원과 같이 잃어버린 한쪽을 찾는다고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 사랑은 결핍을 채우는 것에서 나아가 창조를 발생케 해야한다. 그걸 몰랐기에 헤드윅은 그렇게나 방황을 했다. 사실 토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토니를 통해 원하는 자신을 만들고 싶어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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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윅이 자신이 입고있던 여성 복장을 던지고 무대에 선 장면은 마침내 헤드윅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인 것을 보여주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옭아맸던 모든 이분법적인 젠더를 깨트리고 새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창조했다. 이전의 헤드윅이 아닌 새로운 헤드윅이 되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불완전한 헤드윅을 표상하는 것으로 보여진 헤드윅의 몸에 새겨진 갈라진 타투가 하나로 완전해진다.



깊숙히 스며든 헤드윅의 치료

모든 개인은 다르다. 그리고 ‘나’는 또 ‘나’와 다르다. 우리는 수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전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를 수 있고 내일의 나 역시 다를 수 있다. 정체성은 정해질 수 없으며 다만 내 자신이 주체적으로 선택한 정체성만이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이토록 사람은 유동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인데 우리는 끝없이 ‘다름’을 부정한다. 익숙한 것만이 옳은 세상에서 무언가 다른 것은 낯설음을 만들어내고, 결국 그 낯설음은 쉽게 틀리다고 규정된다. 그로부터 오는 폭력성의 농도는 얼마나 짙은가.

우리는 어쩌면 트루먼 쇼의 트루먼처럼 만들어진 세계, 정해진 시나리오 속에 갇혀서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욕망은 남들에 의해서 수없이 좌절되고 우리의 정체성은 남들에 의해서 수없이 많이 정해진다. 가장 폭력적인 폭력에 매일을 시달리고 있지만 그 폭력은 너무나 익숙하다. 그렇기에 오히려 벗어나는 때에 느낄 수 있다. 나에겐 헤드윅이 바로 이를 보여준 영화였다. 약 90분가량의 상영시간동안 울러펴진 아름답지만 파괴력있는 헤드윅의 노래는 나의 모든 좌절을 씻기웠다. 온 몸의 감각이 헤드윅의 노래에 반응했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이야기를 끝나자 이미 나는 물먹은 솜같이 무거웠던 과거를 버리고 자유를 얻은듯 달라져있었다. 헤드윅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다. ‘성소수자’라는 사회적인 폭력에 가장 노출되어있는 낯선 존재가 자신을 사랑하라고 던진 메시지는 그만큼 강렬했다.


[김량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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