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들끓는 욕망을 표출하는 것은 나쁜 것인가 [공연]

진짜가 되려는 가짜, 애들러와 깁
글 입력 2018.10.24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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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시작되기 전에


따로 preview를 쓰지 않은 문화초대였기에 <애들러와 깁>이라는 공연의 제목만 보고서는 과연 어떤 극일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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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공간 서울로 가는 길은 무척 즐거웠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걷는 것은 나에게 늘 새로운 감각을 준다. 이 길에서 같은 곳으로 향하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저 사람은 어디에서 왔을지를 상상하게 된다. 이 길에서 보게 되는 새로운 건물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혼자 상상한다. 내가 좋아하는 빵집이 있다면 어떤 빵을 파는지 길가에서 흘긋흘긋 구경을 하기도 하고, 체인점이 들어서있다면 실망을 하며,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것은 내가 문화초대를 받을 때 느끼는 또다른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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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까지 봤던 대학로의 공연장보다 좀 더 깊숙한 길로 들어가 예술공간 서울에 도착했다. 건물을 지은 사람이 무슨 취향인지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파사드를 볼 수 있었다. 왼쪽으로는 빛을 반사하는 막을 씌운 매스와 오른쪽으로는 마구 접혀있는 듯한, 겹쳐보이는 매스가 하나 있었다. 저층부는 주차 공간을 확보하려는 듯 필로티로 띄워져있었고, 인형이 두 개 정도 있었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형의 집으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여기서부터 현실과 멀어지고, 우리는 연극의 세계로 들어간다고 말하듯이. 공연은 지하에서 봤는데 상층부는 연기자들의 공간인지 궁금하긴 했다.

거대한 직육면체로 된 검은 공간에 들어가 원하는 자리에 앉았다. 마침 내 옆에는 어떤 담배 냄새를 뿜는 남자분이 앉았다. 그 분은 코가 막히셨는지 감기에 걸리셨는지 모르겠지만 입으로 숨을 쉬어대서 몹시 불쾌했다. 아니, 담배를 피는 사람을 증오하는 것은 아니다. 담배가 스트레스 해소 수단인 것은 알지만 하필이면 그런 냄새를 뿜는 사람이 내 옆에 앉아서 적어도 90분, 길면 120분 동안 그 냄새를 견뎌야 한다는 게 처음부터 큰 스트레스였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태어난 나의 위장은 저녁으로 먹은 연어 샐러드로 체해서 말도 안되는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연극이 절반 정도 진행되는 동안 '나가서 토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손이 덜덜 떨렸고, 숨을 쉴 수 없는데 옆에서 흘러오는 담배 냄새때문에 더 상태가 나빠져서 입을 막고 공연을 봐야 했다. 이때까지 밤을 새고 피곤하게 연극을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최악의 상태에서 가만 앉아있어야 했던 적은 처음이라 그만큼 내적 갈등으로 가득찼던, 길고 긴 시간이 또 인생에 있을까 싶다.

평소의 나라면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나갔겠지만, 문화초대를 받은 자리인만큼의 최소한의 책임은 다 해야 한다는 것과 예술공간 서울의 관람석 특성상 내가 나가려면 출구쪽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나가야 겨우 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상태가 너무 안 좋아 계속 삐그덕거리고 괴로워했던 터라 내 주변에 앉아있던 관람객들에게 무척이나 미안하다. 다만 그게 용서가 되지 않을까 싶던 것은, 극이 어두워질때마다 사람들이 모두 다같이 삐그덕거렸다는 거였다. 나의 괴로움이 모두의 불편함과 동일하게 해석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에서 이해받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건 역시 나의 이기심이겠지. 이 자리를 빌어 용서를 구한다.



극의 시작 _ 이상한 소녀, 대학원생과 슬라이드 속의 병행 전개


정말로 이상한 연극이었다. 처음에 소녀 한 명이 나타나서 흙 주변에 여러가지 장난감들을 갖다놓는다. 연극이 시작된다는 어떠한 특정한 메시지도 없이 아주 담담하게 나타나서 물건을 하나씩 옮겨둔다. 그래서 관객들은 한동안 극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웃긴 일이 아니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웃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아니, 그 사람에게는 웃긴 일이었을 수도 있지. 내가 그 생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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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도 모를만하게, 숏컷을 한 소녀는 오버롤을 입고 자꾸만 무대 바깥과 무대 속을 왔다갔다하며 무대 바깥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잔뜩 가져와 가운데 흙 옆에 가져다놓았다. 만약 물건이 필요했다면 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가져다놓으면 되는데, 왜 소녀는 이제서야 물건을 가져올까? 그것도 한번에 못 옮기는 무거운 물건이라도 되는 양 하나씩 옮기느라 극의 전반부의 많은 시간을 써버리는 것일까?

극이 끝날 때까지, 이 리뷰를 쓸 때까지 그 소녀에게 나는 성별을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소녀라고 부르는 것은 극의 소개에 등장인물로 소녀라고 소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녀가 짐을 다 옮기고 흙 뒤에 앉아서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있을 때 갑자기 자기가 대학원생이라며 애들러와 깁에 대해 논문을 쓴 것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연극의 줄거리는 팸플릿으로 미리 봐서 대충 알고 있었다. 대학원생이 말하는 이야기는 몇년도에 두 사람이 만났고, 몇년도에 그림을 냈고 뭐 언제부터 언제까지 갑자기 작품을 그만뒀고 하는 이야기라 정말 듣고싶지 않았다.


기이한 행동과 충격적인 작품으로 20세기 말 미국 현대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자넷 애들러와 마가렛 깁. 레즈비언 커플인 두 사람은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은 의미 없다'는 선언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들을 파괴한 후 세상을 등진다. 몇년 뒤, 애들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깁 또한 죽었을 거라 추정되지만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일목요연하게 이렇게만 정리하면 이해하기 쉬운데, 그 대학원생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제발 알아주라고 외치는 것처럼 모든 말에 년도를 붙여서 말했다. 그렇게 말해도 빔슬라이드가 없으면 우리 머릿속에는 들어오지도 않아. 사회 시간에 30년 동안 진행되는 연표를 그림, 글 하나없이 그냥 듣는다고 생각해보자. 이순신 장군의 생애만 들어봐도 그렇다. 몇년도에 결혼을 했고, 몇년도에 무슨 대첩을 했고, 몇년도에 감옥에 들어갔고 그런 서사를 한번에 말하는 거다. 이해하려는 노력을 점점 포기했다. 마치 수업을 듣는 듯한 그 느낌이었다. 나는 거기 앉아있었지만 거기 없었다. 속은 좋지 않았고, 이해하기 힘든 수업을 들어야 하니 괴로울 뿐이었다.

팸플릿 속의 첫 작품 소개만 봤을 때는 미술가, 그들의 그림, 예술에 관한 얘기겠거니 생각했다. 예술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자체로 광기적이라 관심있게 보는 편이다. 음악이든, 미술과 같이 평범한 사람은 이해조차 하기 힘든 그들의 정신세계를 숨김없이 보여주는 작품에 관해서 다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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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늘, 미술 공부를 하면 나오는 '모나리자'에 숨겨진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다. 모나리자라는 대상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려준 리자라는 부인이라는 설이 가장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모나리자는 다 빈치 그 자신의 초상화여서 4년 동안 그리고도 미완성인 채로 끝났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설이 설득력있는 이유는 모나리자의 두개골 모양과 다 빈치의 두개골 모양이 일치한다는 것이고, 눈썹이 없는 이유는 그 당시 넓은 이마가 미인의 전형으로 여겨져서 눈썹을 뽑아버리는 일이 유행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술을 즐길 때에 다행인 것은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물리적인 형태의 기록이 남아있음에도, 어째서 그 작품이 남게 되었는지 진실을 알고 있는 것은 작가 한 사람밖에 없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숨기고 싶다면 다르게 발표를 해도 상관이 없다. 자신의 작품이 마음을 대변하기를 바라는 예술가도 있는 반면, 그저 분노와 충동의 해소구이기만을 바라는 작가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 작가마저도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구체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의 형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언제까지고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을 것이다.


2018년, 오래 전부터 애들러를 흠모하던 배우 '루이즈 메인'은 그녀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에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애들러를 '진짜'처럼 연기하기 위해 루이즈는 매니저 샘과 함께 폐허가 된 그들의 은둔지를 찾아간다. 그런데 버려진 폐가인 줄 알았던 그 집에서 살아있는 깁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알고보니 이 이야기는 2018년의 한 배우의 이야기였다. 대학원생이 애들러와 깁의 생애를 설명한 뒤 슬라이드를 보여주세요, 라고 하며 두 사람이 등장해 관객석을 보고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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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여자가 루이즈 메인, 왼쪽 거대한 남자가 루이즈 메인의 내연남이자 매니저인 샘이다. 둘은 영화의 모티브를 얻기 위해 애들러와 깁의 숨겨진 집을 향해 찾아간다. 둘은 정말 글자를 그대로 읽듯이 연기를 한다. 표정도 억양도 아무것도 없다. 루이즈가 처음에 말을 할 때 무기력하고 감정없는 목소리가 꼭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서 기억해내려고 해도 기억나는 게 없었다.

대학원생의 설명에 이어서 이 사람 둘도 도대체 뭘 하는건가 이해하지 못했다. 둘은 뭔가 목적이 없는 사람처럼 움직이지도 않고 원숭이 따위나 외쳐대고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하거나 알 수 없는 관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소녀는 두 사람이 말할 때마다, 여자를 쳐다봤다가 남자를 쳐다본 뒤 곧 흥미를 잃었다는 듯이 뒤에 의자에 가서 앉아버린다.

시간 순서에 의해서 진행되고는 있지만,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따라오고 있다. 애초에 샘과 루이즈가 깁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은 대학원생이 보여주라는 슬라이드 속의 내용이 아니었다. 대학원생이 슬라이드를 보여달라고 하는 동안 그 순간에 다른 현실이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굳이 슬라이드 속의 내용을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슬라이드에 나오는 내용은 대학원생이 머리아프게 외운 결과물을 이미 다 말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 외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루이즈와 샘이 나오는 공허한 대화였다.

같은 공간 속에 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유일하게 움직이는 사람은 소녀였지만 그마저도 사람인지 확신할 수도 없었다. 루이즈와 샘은 소녀가 없는 듯이 공허하게 말을 주고 받았고, 소녀는 두 사람을 바라보지만 마치 tv를 보듯이 가까이서 관찰하고 갑자기 지루해한다.



극의 중반부_소녀의 정체에 대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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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대학원생이 나와 애들러와 깁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한껏 설명하고 다음 슬라이드가 계속 펼쳐지는 구조가 반복된다. 이 장면에서도 소녀는 루이즈와 깁의 손에 자신의 장난감을 들려준다. 이야기의 전개에 등장하는 물건이긴 하지만 왜 등장인물들은 가만히 있는데 소녀만 움직이는 걸까? 등장인물들이 굳어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물건을 들고 나르도록 만들어둔 장치인건가?

하지만 곧 알 수 있다. 사실은 저 물건이 없어도 이해가 되는 극이라는 것을. 주인공들이 가만히 서서 이야기만 해도 상관은 없었다. 괜히 소녀가 등장해서 한번은 깁의 편에 서서 루이즈를 바라보며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함께 보기도 하고, 물건을 이것저것 줬다가 뺏으며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다.



극의 후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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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진행될수록 주인공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샘은 직접 삽을 들고 의자에 앉거나 서있거나 구토를 하는 시늉을 했고, 루이즈는 돌아다녔다. 루이즈와 샘이 애들러의 무덤을 파헤쳐서 애들러의 시신을 찾아내는데 무덤에는 누워 있는 소녀가 있다. 루이즈는 소녀를 애들러로 대한다. 샘은 시체를 보고 구토를 하고 피를 흘리고 난리지만 애들러를 찾아낸 루이즈는 시체의 냄새를 맡고 경이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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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가 애들러가 되는 순간. 소녀는 애들러, 자신의 두개골을 들고 있다. 뒤에선 샘이 구토를 하고 있다. 루이즈는 애들러를 예찬한다.

이제 사람들이 자넷 애들러를 떠올리면 나를 생각하게 될 거에요.

루이즈는 애들러를 연기하면서 동시에 완전히 애들러가 되고 싶어했고, 그에 따라 깁을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게 명예욕이 불러온 결과일지 모르지만, 깁의 전 생애에 미칠 영향은 생각지도 않은 채 "우린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야"라고 외친다.

조금씩 스토리는 진행되어 이해하기는 쉬워졌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소녀의 역할이다. 소녀는 관객의 이해를 하기 쉽도록 물건들을 나르는 존재에서 갑자기 죽은 애들러의 시체가 되었다. 두개골을 들고 있지만 역시 계속 죽어있는 것은 아니다. 죽은 사람답지 않게 갑자기 벌떡 일어나 흥분하는 루이즈를 또 그 특유의 무표정으로 바라본다. 처음에 무표정이었던 루이즈와 깁은 점점 사람이 되어가지만 소녀만이 여전히 사람이 아니다. 그 존재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걸까?



남겨진 의문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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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이 많은 연극이다. 다 적어보라고 하면 끝도 없을만큼, 그들이 말하는 말 하나하나, 행동하는 것 모조리, 던지는 힌트 그 모든 게 의문이었다.

몇가지 말해보라고 하면, 왜 루이즈는 애들러와 깁 커플 중에서 애들러가 되고 싶어했을까? 아마 배역으로 정해져서일거란 말은 하지말자, 그 배역에 지원하는 것도 연기자가 하는 선택일테니. 애들러의 무엇이 루이즈의 광기를 이끌어낸 것일까? 애들러와 깁 모두 은신처로 도피했는데 애들러는 죽고 깁은 살아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신이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죽어버린 애들러이기 때문인건가? 만약 루이즈가 깁의 역할을 선택했다면 이야기는 또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었을지도 궁금하다.

그리고 그 사람을 연기한다고 할 때 정말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마저 사랑할 수 있게 되는지도 궁금하다. 그것은 내가 연기자를 타고나지 않아서 모르겠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다가 사랑에 빠지고는 하는데, 사랑에 빠진 척을 하다보니 사랑을 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호감을 갖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시간을 같이 보내다보니 자연스럽게 정이 든 것인지 모르겠다. 루이즈의 생애는 전부 보여주기인 것일까? 이성애자라서 남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 속에서 깁을 사랑하는 연기가 가능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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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애들러를 루이즈로 기억하게 될까?

나는 해리포터를 영원히 다니엘 래드클리프로 기억하고, 론 위즐리를 루퍼트 그린트로 기억하고, 헤르미온느를 엠마 왓슨으로 기억할 것이다. 엠마 왓슨은 종종 어린 아이들에게 헤르미온느로 불리기도 한다. 영화라는 것은 사람의 뇌에 남아있는 자극이 엄청나서 그 이전의 것은 더 이상 생각하기 힘들어진다.

어린 시절에 판타지 소설을 좋아해서 해리 포터말고도 트와일라잇, 헝거게임, 메이즈러너, 드래곤라자 같은 소설을 많이 읽었었다. 단순히 책을 읽었을 때 트와일라잇에서 내가 상상하던 조각같은 외모와는 달리 턱이 두개인 에드워드가 나왔을 때 놀랐고, 헝거게임에서도 피터가 듬직한 사람으로 영화에 등장해 놀랐다. 메이즈러너에서 책에서는 좋아했던 민호보다 뉴트가 더 미소년이라서 취향이 갑자기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수십번도 더 읽어본 책을, 영화를 보고나서는 읽고 싶지 않아졌다. 아마 나는 내가 상상했던 그들보다 영화 속에서 한번 본 그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미 내가 생각해온 그들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다. 영화를 봐버린 것을 늘 후회하고 있을 정도로 아쉽다. 책을 먼저 읽은 사람의 자부심 따위가 아니다. 영화는 내가 인식하는 세계를 하나로 단정지어 버린다. 2003년부터 수없이 반영된 '대장금'이 이영애인 것이 너무나 당연하듯이 말이다.

역사적인 기록으로만 남아있던 사실을 누군가 재현해서 후대인들이 길이길이 기억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아니 정말 좋은 일인가? 그것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다면, 루이즈가 애들러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나쁜 일인가? 잊혀진 애들러는 루이즈덕에 평생 잊혀지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대신 얼굴과 목소리, 육체 모든 것을 뺏기고 자신의 그림마저도 빼앗긴 채로. 기억한다는 것은 꼭 좋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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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루이즈는 기뻐한다. 울지 않기로 약속했거든요, 라고 하면서 울 것 같지 않은데 우는 척을 한다. 그래, 니가 울리가 없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나도 참 못됐다. 한 사람의 광기, 욕심을 그저 비난하고만 있으니 말이다.

애들러는 이미 죽은 사람이고, 루이즈는 연기자로서 성공하고 싶어했다. 존재마저 소유했다는 것 역시 다 의미부여에 불과할 뿐이다. 어느 정도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루이즈가 애들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 유명한 그림들을 루이즈가 그리지 않았다는 것 역시 알고 있다. 그저 루이즈의 이미지만이 애들러를 대신할 뿐, 그녀는 절대 애들러가 될 수 없었다. 우리의 기억에는 루이즈가 남겠지, 하지만 애들러는 자기들의 작품을 파괴한 채 세상을 등진 인물이다. 그런 사람 대신에 물리적인 기록을 남기는 것은 그렇게 비판받아야 할 일인가? 비록 시체를 훼손하고 강렬한 욕망을 드러냈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삶을 옳다 그르다고 판단할수는 없었다.

그녀는 가짜 애들러였지만, 완벽한 애들러였기에 상을 받았다. 그 과정은 사실 우리들이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집착어린 광기와 상상할 수 없는 욕망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여우주연상을 주었을 것이다. 진실을 알게되면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사실 마음 속에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은 누구나 있잖아? 그게 크기가 작고 클 뿐이지. 물론 나도 포함되지만 사람들은 가끔, 그런 본능적인 욕구를 분출하는 사람들을 향해 욕을 한다. 인간이라면, 인간으로서의 도리는 지켜야지 라고 하면서. 사실은 자기들도 다 크고 작은 욕구 몇가지씩은 갖고 있으면서 참 이중적인 잣대다.



그리고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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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소녀는 관객들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실에 흥미를 갖는 것 같다가도 지루해지면 금방 외면하고 자기 할 일을 하는 우리들. 죽은 애들러가 되어, 자기가 되려하는 루이즈를 바라보며 원망하는 우리들. 이야기에 전개되는 물건을 움직이지 않는 주인공들에게 하나씩 쥐어주며 연기를 시키는 우리. 그러고 또 지루해하는 우리. 누군가의 편에 서서 비난하다가 또 다른 편에 서기도 하는 쉽게 흔들리는 우리들. 우리는 끝없이 지루해하다가도 잠깐 흥미를 갖고 보기도 한다. 그러고 또 지루해한다. 내 삶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관객석에 아무도 없고, 극의 주인공들에게도 내가 보이지 않는다면 나도 저 소녀처럼 마구 돌아다니면서 주인공에게 이것저것 들려봤다가, 애들러인척 시체처럼 누워봤다가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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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해리포터를 수도 없이 읽었다. 아직도 인상깊은 말이 있다.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2에 나오는 말이다. 해리가 잠을 자면서 덤블도어가 나타난다. 해리는 덤블도어에게 묻는다.


"이게 현실인가요, 아니면 내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일인가요?"

"이것은 물론 네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란다. 해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대체 왜 그게 현실이 아니란 말이냐?"


여기서 말하는 '진짜와 가짜' 그리고 '무의식과 현실'은 좀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짜가 진짜가 되기를 바라는 것 역시, 무의식인 것처럼 그리고 그것 역시 현실인 것처럼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한 두번 일어나는 일은 아닐까. 소심한 성격을 극복하고자 씩씩하고 당당한 사람을 따라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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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들러와 깁
- 우린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야 -


일자 : 2018.10.12(금) ~ 10.28(일)

시간
평일 8시
주말 4시
월요일 쉼

장소 : 예술공간 서울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제작
극단 코끼리만보

기획
K아트플래닛

관람연령
만 13세 이상

공연시간
90분




문의
극단 코끼리만보
02-742-7563





극단 코끼리만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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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코끼리만보>는 2007년 첫 걸음을 시작한 공동창작집단입니다. 우리들은 '극장'이 습관적이고 일상적인 범주를 넘어서는 곳이라고 믿습니다. 극장은 총체적 삶이 다시 일어나는 시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은유와 상상의 힘으로. 그 총체적 삶 안에는 낯선 공포, 고통, 행복, 현재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하다는 깨달음, 그리고 현재를 넘어선 세계를 인지하는 즐거움들이 있습니다.

<극단 코끼리만보>는 연극이, 극장이 그런 낯섦과 일상 사이의 소통과 긴장을 제공하기를 소망합니다. 코끼리처럼 묵직하고, 느리게. 그러다 어느 순간, 속도와 무게를 상상의 힘으로 털고, 나는 코끼리처럼.





<상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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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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