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못생긴 여자의 역사

'못생긴 여자의 역사' 리뷰
글 입력 2018.10.25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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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운동


올 상반기부터 최근까지 '탈코르셋 운동'은 큰 화젯거리다. '탈코 인증'이라며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화장품을 다 버린 사진을 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자기 자신을 꾸밀 자유를 이야기하며 '탈코르셋'이라는 용어 자체가 유난이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어느 입장에 가깝든 이번 논의가 여성의 꾸밈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가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전까지 여성이 화장하거나 다이어트를 하는 일은 은연중에 당연하게 생각되어왔다. 여성이 2명 이상 모이면 자연스레 다이어트 이야기가 나왔고(놀랍게도 모두가 다이어트 중이거나 계획하고 있다!) 인터넷에는 여성을 위한 상황별 메이크업 팁이 넘쳐났다. 탈코르셋 운동은 이 모든 통념에 물음표를 던진다. 꾸밈이라는 행위에 '노동'이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자연스럽게 행하던 일에서 이질감이 느껴지도록 만든다. 이 논의가 이토록 혼란스럽고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까닭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의지라고 믿어왔던 '꾸밈'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서 올 것이다. 자신이 하는 행동의 주체가 자기 자신이라는 철석같은 믿음이 흔들릴 때 사람은 불쾌함을 느낀다.


여성은 어떤 의미에서는 늘 재현의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외모와 나이에 대한 평가는 무자비하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성의 가치는 얼마만큼 유혹적인 몸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광고는 존재하지도 않는 추함의 위협을 계속 경고하고, 그 결과, 여성을 하나의 기준 안에 가둔다.


- 15쪽



<못생긴 여자의 역사>는 그런 점에서 불편한 책이다. 우리의 욕망과 생각의 뿌리를 파헤쳐 그것이 우리의 머릿속이 아니라 아주 오랜 옛날에서 비롯되었다고 낱낱이 밝히기 때문이다.



'추한 여성'의 역사


<못생긴 여자의 역사>는 '추함'이라는 개념이 단순히 사람이나 사물의 외적인 부분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라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위한 지표였다고 주장한다. '추하다'라는 형용사는 객관적인 단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치판단이 포함된 말이다. 추하지 않은 것, 즉 아름다움 없이 '추함'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다. 지배계층은 자기 자신을 아름다운 존재로 설정하고 다른 이들을 추한 존재로 취급하거나, 피지배계층 안에서 자신의 입맛에 맞게 아름다움의 기준을 세워놓고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이들을 추한 존재로 낙인찍었다. 그렇게 백인은 아름다운 것, 흑인은 추한 것이 되었고 왕족은 아름다운 것, 천민은 추한 것이 되었다. 사례는 수없이 많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특히 남성이 '추함'을 이용해 여성을 억압해 온 역사를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순으로 보여준다. 본래 도구는 그 목적에 따라 사용하는 사람이 편리하도록 개조된다. '추한 여성' 역시 언제나 존재했지만, 시대에 따라 그 의미는 조금씩 달랐다.


고대 시대부터 중세 시대에 이르기까지 존재 자체의 추함, 그리고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권위에 불복하는 삶의 방식의 추함으로 여성의 추함은 완성된다.


- 101쪽



고대 및 중세에 여성은 존재 자체가 추한 것으로 여겨졌다. 여성은 질료로, 남성은 형상으로 표현되었기에 여성은 늘 남성보다 열등하고 불완전한 존재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은 지적 활동을 기반으로 가능했는데, 여성은 지적 활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출생부터 부재하므로 여성은 결코 아름다워질 수 없었다. 간혹 여성이 아름다움이 이야기될 때는 언제나 외양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대 외면의 아름다움은 결코 내면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는 거짓된 것이었다. 여성은 불온함과 음탕함으로 '완전한' 남성을 유혹에 빠뜨리는 위험한 존재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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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를 표현한 Bing&Sigl의 풍자화(1909)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부족한 남성'이기 때문에 진정한 아름다움은 남성의 소유로 인정되던 시대를 지나, 근대에 들어서며 여성에 대한 개념도 크게 바뀌었다. 바로 여성 고유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남성에게는 없는 여성 신체의 곡선과 생산능력이 아름답다고 평가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시대 아름다운 여성이란 남성중심사회의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의미했다. 그 외에 어머니가 될 일도, 남성과 성관계를 맺을 일도 없는 노처녀, 독신가, 동성애자는 추한 여성 취급을 받았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거나 학문을 하는 여성의 취급도 비슷했다. 고대, 중세와 달리 아름다운 여성성이 고정되어 있고 이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을 모두 '추한 여성'으로 취급했고 추한 여성은 곧 완전한 여성이 아닌 혼종이었다. 추한 여성은 그렇게 남성과 가부장제의 입맛에 맛지 않는 여성들로 만들어졌고, '구성'되었다.



오늘날의 '아름다운 여성'이란


고대, 중세, 근대를 거쳐 우리는 현대를 살고 있다. 앞선 이야기들을 오래된 과거의 일이라 여기며 웃어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는 어느날 갑자기 온 게 아니다. 현대는 근대와 연결되어 있고 근대 또한 중세, 고대와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큰 줄기다. 그러므로 오늘날 여성에게 가해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억압 역시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오늘날 여성이 남성에 비해 열등하다는 말을 대놓고 한다면 손가락질 받을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을 교묘하게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어떠한가. 과연 과거로부터 자유로운가?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성형을 한 여성을 욕하면서 반대로 꾸미는 일에 아무 관심이 없는 여성도 비난하는 모습은 여성은 절대 내적으로 아름다워질 수 없다 생각하던 고대 그리스를 닮았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기사 댓글에는 어김없이 페미니스트들의 외모를 비하하는 내용이 있다. 이는 자기 생각을 가진 여성을 추하다고 비난하던 근대의 유물이다. 외모가 아닌 마음을 봐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동화 속 주인공은 대부분 미인으로 그려지고, 이들을 질투하거나 방해하는 여성은 주인공보다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바늘 구멍같은 미의 기준을 통과한 여자 아나운서와 다소 평범한 외양의 남자 아나운서가 함께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습을 오래 봐 왔다. 여성의 추함을 평가하는 어휘에 비해 남성의 추함을 평가하는 어휘는 많지 않다. 돋보기를 들고 들여다보면 오늘날에도 '추함'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개념이다.


여성은 이제 자기 몸의 주인이다. 그리고 여성은 자신의 모습을 창조하는 예술가다.


- 200쪽



더불어 그 어느 시대보다 자유롭다고 여겨지는 오늘날의 여성에게는 외모까지 자신의 의지로 발전시켜야 하는 영역이 되었다. 그 꾸밈은 너무 과해서도 안되고 너무 부족해서도 안되고 사회가 용인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가꾼 외모에는 '착한'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외면과 내면이 동일시된다. '착한' 외모를 갖고 있지 않은 여성은 노력하지 않는 여성이므로 외면과 내면 모두 추하다고 생각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부당함 투성이다.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개념은 독립적으로 우뚝 서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아래에는 오랜 세월 계속되어 온 여성에 대한 억압이 자리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거 아름답다고 평가되던 여성이든, 추하다고 평가되던 여성이든 모두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모두 피해자다. 보수적인 일부의 사람들이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해온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계속되어 온 여성 억압은 당대 이름난 온갖 유명한 철학자며 과학자, 작가들의 혀끝, 펜 끝에서 이루어진 일들이다. 책을 읽다 보면 익숙한 이름들에 지금까지 배워왔던 것들에 회의감이 들 정도다. 온갖 편견으로 가득 찬 그들의 주장은 오늘날에는 어렵지 않게 부당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진리로 여겨지던 말들이었다. 역사가 진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을 읽고 지금 내가 사는 현실을 돌아보면 확신하지 못하겠다. 방법과 명칭만 조금씩 바뀌면서 억압은 계속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20세기 서구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다. 남성과 동등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몇 개의 권리를 여성들이 쟁취해 낸 덕분이다. 그러나 외모의 영역에서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한 여성에 관해 말할 때 여전히 제일 먼저 언급되는 것은 외모다. 심지어 여성은 자신의 외모에 전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 아주 미미한 결점도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죄의식을 느끼고, 스스로를 수치스러워한다. 타인의 시선의 피해자이면서도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는 타인의 비난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 비난을 내면화하고 결국 자기 비하에 빠진다. 자신을 보며 추하다고 손가락질을 하는 타인보다 더 신랄하게 스스로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 250쪽


아름다움에 대한 억압은 은밀하게,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 마냥 이루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뜨거운 감자인 '탈 코르셋' 문제는 앞으로 페미니즘 운동에서 가장 오랫동안 논의되고 그만큼 합의되기도 힘든 사안일 수 있다. 여성조차 너무 오랫동안 내면화해 온 기존 남성중심사회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개념은 어디부터 풀어가야 할지 쉽지 않다. 문제를 꾸미는 것과 꾸미지 않는 것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면 여기저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애초에 한 사람의 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칼로 무 베듯 간단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가 '꾸밈'이고 또 어디부터는 아닌가. 어디까지가 사회에서 비롯된 억압이고 어디부터가 개인의 욕망인가 명확히 구분하기 힘들다. 혼란 속에서도 분명한 건 과연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 고통받는 것은 누구이고 이득을 보는 자는 누구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세세한 규칙을 점검하기에 앞서 누구도 이길 수 없게 만들어진 게임, 설계 자체가 잘못된 게임이라면 그 게임을 만든 이가 누구인지 직시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못생긴 여자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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