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욕망과 연극적 상상력을 묻는 극 <애들러와 깁>

글 입력 2018.10.24 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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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를 떠들썩하게 했던 현대예술가 자넷 애들러는 마가렛 깁이라는 연인이자 인생의 관객을 만난 후 예술계를 떠난다. 그 후 2003년 자택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과거의 루이스와 현재의 루이스가 교차하면서 시작된다. 루이스는 학부 시절 애들러를 주제로 논문을 발표할 만큼 그에게 깊고 오래된 애정이 있음을 보여준다. 시간이 흘러 배우가 된 루이스는 애들러의 삶을 다룬 작품에 주연으로 캐스팅 된다. 자신이 연기할 캐릭터인 애들러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싶던 루이스는 연기 코치이자 불륜 상대인 샘이란 남성과 함께 애들러가 생전에 머물렀던 자택을 찾아간다. 그런데 폐가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뜻밖에도 애들러의 연인이었던 깁을 만나게 된다. 대중들은 깁 역시 죽었다고 알고 있었으나 깁은 애들러와 함께 했던 자택에서 은든생활 중이었다.


이 과정에서 배우들은 줄곧 객석을 바라보며 어떠한 동작 없이 대사로만 모든 장면을 연기한다. 깁이 저택 주변의 철조망을 끊고 무단으로 자신의 공간을 침입한 샘에게 총을 겨누며 살벌한 대치 구도를 형성할 때조차 이들의 시선과 자세는 정면을 향해 있다. 이토록 인위적으로 제한된 움직임은 루이스가 깁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부터 서서히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욕망



극이 활기를 띌수록 애들러의 모든 것을 흡수하고 싶은 루이스의 욕망도 깊어진다. 루이스와 깁의 첫 만남에서 루이스를 애들러로 착각한 깁이 절절한 사랑고백을 하던 모습을 보자. 깁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루이스의 광기가 암시된 예고편처럼 느껴진다. 루이스는 애들러의 동반자였던 깁을 통제하고 지배하고 착취한다. 애들러의 무덤을 파헤치고 애들러와 깁이 그들의 작품이라 명명한 개를 죽인다. 그리고 끝내 깁을 살해하기까지 한다. 루이스는 애들러와 깁을 줄곧 흠모해왔다고 하지만 그것은 경애라기 보단 파괴에 가깝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는 캐릭터다. 루이스가 가장 빈번하게 내뱉는 말이 내 캐릭터라는 점은 자신만의 세계에 미친 이기심을 나타낸다. 그는 애들러와의 작품, 기억이 대중들에게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는 깁을 타이르고 자신이 애들러가 되는 과정에 도구가 되도록 종용한다. 그의 비틀린 욕망은 자신이 무너져가는 깁을 구조하는 것이라 여기는 망상마저 불러일으킨다.

 

루이스의 남편인 아담 하퍼가 애들러와 깁의 작품을 무단 도용한 사건으로 소송을 벌인 사람이라는 점도 루이스가 무자비한 가학자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애들러와 마찰을 빚은 상대와 결혼을 하고 그가 제작하는 애들러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애정을 논한다는 건 모순이다. 그가 진짜 애들러의 삶을 관찰하고 공감할 의지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결국 이 일방적 착취에서 이득을 보는 쪽은 루이스와 그의 남편이다. 두 사람은 실제 인물이 동의하지 않는 캐릭터를 팔아 자본을 축적한다. 윤리의식이 결여된 이성애자 커플에게 왜곡 당하는 레즈비언 커플 예술가라는 설정은 씁쓸함을 넘어 등골이 서늘해진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이러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권력을 지니고 욕망의 주체가 되는 쪽은 욕망의 객체를 거부하는 쪽을 착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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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과 상상



연극은 소녀라는 캐릭터로 관객에게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소녀는 가장 처음 등장하여 극 중에서 쓰일 소품을 무대에 배치한다. 그 후 이야기 속에 개입하여 개가 되기도 하고 사슴이 되기도 하고 애들러의 시체가 되기도 한다. 주인공들에게 삽을 쥐어주고 빨간 물감을 팔뚝에 칠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를 동물 또는 사물이라는 개체로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상상의 힘이다. 연극은 루이스가 개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도 개를 직접적으로 폭행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루이스는 스티로폼 막대로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거칠게 내리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폭압적인 형상을 자아낸다. 이러한 상상력이 배제된 리얼리티의 문제점은 특히 폭력을 나타낼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폭력을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재현하면 폭력 그 자체가 되어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은유와 상상의 힘은 현실세계를 다시 조망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허구를 말하는 연극에서 상상의 한계를 느낀 순간들이 있다. 루이스의 논문 발표 중 애들러와 깁이 남성복을 입는 게 기이한 행동이라고 설명하던 장면은 지독한 현실의 냄새를 풍겼다. 루이스가 자신을 놓아버린 깁을 가엾어 하며 립스틱을 발라주던 장면 또한 그렇다. 이 연극 역시 여성을 규정하는 부분에서는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체감했다. 유독 여성에 관한 주제에서는 예술조차 상상력의 한계가 생겨버리는 현상이 비일비재하다. 옷 뒤에 숨어있던 몸이 드러나듯이 사랑이 드러났다는 표현도 레즈비언들의 사랑이 저런 형식일지 근본적인 의문을 남긴다. 지나친 비약일 수 있지만 에로티시즘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남성 작가의 상상력이 레즈비언 캐릭터에 투영된 것처럼 느껴졌다. 극 초반에 등장하는 루이스와 샘의 성관계 장면도 마찬가지다. 샘의 바나나와 피를 빤다는 대사는 성행위를 형편없이 묘사한 셈이다. 섹스의 방식을 페니스 중심으로만 상상하면 이런 한계가 발생한다. 삽입섹스보다 클리토리스 자극을 통해 오르가즘에 도달하는 여성의 경우가 훨씬 많은데 왜 남자들은 본인의 페니스로 여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왜 여성이 그것을 기쁘게 빨아 주리라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극 중에서는 아주 사소한 대사들이지만 그 사소함 속에서 남성 중심적인 상상이 느껴질 때는 영하 십도의 날씨에 찬물로 샤워를 하는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라는 공간은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실현 가능한 곳이다. 예술적 광기에 미쳐 살인을 하고 마약, 불륜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여성과 가시화되지 못한 레즈비언 캐릭터를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요즘 나에게 어떤 철학적 논제보다 우선시되는 가치이다. 무엇보다도 여성 캐릭터들이 남성과의 결혼과 연애, 모성애가 아닌 욕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여성배우가 극을 이끌고 남성 배우의 비율보다 많은 연극이 극소수인 상황에서 두 조건을 모두 충족시키는 연극은 그 자체로 소중하다. 한 번의 공연으로 끝내기엔 너무나 아까운 소재들이 담겨 있는 연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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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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