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는 그들에게 일어난 가장 아름다운 사건이야, 연극 애들러와 깁 [공연예술]

글 입력 2018.10.2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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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이한 행동과 충격적인 작품으로 20세기 말 미국 현대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자넷 애들러와 마가렛 깁. 레즈비언 커플인 두 사람은 '더 이상의 작품 활동은 의미 없다'는 선언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들을 파괴한 후 세상을 등진다. 몇 년 뒤, 애들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깁 또한 죽었을 거라 추정되지만 그 진실을 아는 사람은 없다.


2018년, 오래전부터 애들러를 흠모하던 배우 '루이즈 메인'은 그녀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에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애들러를 '진짜'처럼 연기하기 위해 루이즈는 매니저 샘과 함께 폐허가 된 그들의 은둔지를 찾아간다. 그런데 버려진 폐가인 줄 알았던 그 집에서 살아있는 깁과 맞닥뜨리게 된다.



연극 <애들러와 깁>의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은 위와 같다. 깁과 마주친 루이즈와 샘은 자넷 애들러의 생을 따라가기 위해 깁에게 그들을 도와줄 것을 강요하고, 루이즈는 결국 평범한 인간으로 죽었던 자넷 애들러의 인생을 깁에게서 빼앗아 오는 데 성공한다. 진짜 애들러와 가짜 애들러, 진짜와 가짜의 경계 사이에서 사라지고 새로이 생기는 의미와 암시들, 욕망에 가까워지면서 생명력을 얻던 루이즈 메인 등, 이 연극은 이야기의 서사 면에서도, 그 안에 담고 있는 철학적 논쟁이나 연출적 기법에 대해서도 논할 거리가 상당히 많은, 입체적이고 재밌는 극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내게 제일 와닿은 부분은 대중이 예술과 예술가를 소비하는 방식에 있었다.

 

극 중 애들러와 깁이 은둔한 이후 애들러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밝혀지자 깁은 주요 용의자 선상에 떠오르게 된다. 루이즈도, 샘도, 객석에 앉은 우리 관객들도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으레 그렇듯 깁이 자신의 연인이었던 천재 예술가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 거기에는 별 이유가 없다. 생전에 애들러와 깁의 사이가 나빠지기라도 했나? 깁의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나기라도 한 건가? 깁은 천재 예술가였던 애들러를 마음 속 깊이 질투하고 있었나? 어떤 근거도 없이, 우리는 그저 으레 그렇듯, 애들러에게서 어떤 예술적이고 드라마틱한 죽음을 바라고 있다. 그러나 밝혀진 진실은 생각보다 초라하다. 한때 미국 예술계를 뒤흔들었던 예술가의 죽음은 치매라는, 아름답지도 극적이지도 않은 사건으로 벌어진 것이다. 루이즈는 저택의 앞마당에서 애들러의 시체를 파내어 유골을 들고 속삭인다. 어떤 일이 있었느냐고. 깁이 당신을 죽였어? 이미 밝혀진 진실을 거부하고 그는 새로운, 더 재밌는 드라마를 계속해서 갈구한다. 학부 때부터 애들러와 깁의 오랜 팬이었다는 루이즈는 정말 그들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팬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방식으로, 예술가이자 공인으로 잊히기를 바라는 그들을 철저하고 잔인하게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다. 오로지 자신의 완벽한 연기를 위해 깁의 곁에 남은 노견을 때려 죽이고, 나가달라고 애원하는 깁을 무시하며 심지어는 협박하기까지 한다. 그가 완벽한 예술을 위해 깁을, 애들러를 이용하는 방식은 폭력적이고 잔인하다. 결국 애들러의 시신을 훼손하고 깁을 살해한 후 얻은 자신의 애들러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낸 루이즈가 눈물을 흘리며 애들러를 기리는 모습은 일반 사람의 눈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광기에 휩싸인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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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는 정말 미친 사람인 걸까. 여기서의 ‘미쳤다’라는 표현은 당연히 정신의학적인 소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테다. 그는 과연 남다르게 끔찍스러운 인간인가? 그가 애들러를 소비하는 방식은 잔인하다. 그 시선 속에서 인간 애들러는 지워지고 천재 예술가 애들러만이 마음에 드는 형태로 조각나 있다. 극 중에서는 그 시선 끝의 욕망이 위험하게 다루어지지만, 과연 그런가. 모든 예술 작품은 어딘가에서 영감을 얻기 마련이다. 그리고 영감이란, 예술가가 바라보는 어떤 인물, 사물, 사건, 현상 등에 대해 예술가 본인만의 시선으로 오려낸 한 조각 힌트 같은 것이다. 결국 예술 행위는 대상화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깁에게서, 애들러의 시체에서 영감을 얻고자 하는 루이즈의 욕망 자체는 위험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잘 것 없이 평범하다.


그러나 그 욕망이 표출되는 수위가 일반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다. 루이즈가 정말 미친 여자라면, 애초에 이를 인지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루이즈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의 행위는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을. 그러나 위대한 예술을 위해서라면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의 행위는 예술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아니다. 예술이며 폭력이다. 예술은 어떤 불법적 혹은 비도덕적 행위를 포장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예술은 우리 삶의 일부일 뿐, 결코 분리되어 도덕이나 법의 지배를 피해갈 수는 없다.


그러나 루이즈에게는 아니다. 솔직해지자. 객석에 앉은 우리에게도, 역시 아니다. 애들러의 유골을 집어 드는 루이즈나, 루이즈의 세계 속 애들러와 깁을 바라보는 대중이나, 사건의 전말을 알기 전의 우리 관객들이나 모두 애들러의 죽음에는 깁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연극은 대체로 깁의 시점에 관객들을 가까이 배치해 놓는다. 자연스럽게 그와 대치하는 루이즈는 관객들에게 멀어진다. 멀어지며 타자화되고 대상화된다. 애들러의 유골을 파내어 그를 예찬하는 루이즈의 모습은 가히 광기의 정점으로 보인다. 루이즈가 바라보는 애들러는 깁이 서술하는 애들러와 다르다. 루이즈는 자신만의 관점에서 애들러를 대상화하고 천재적인 예술가로서만 철저히 소비한다. 그러니 깁의 시점에서 우리는 그가 비정상적이라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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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시선 끝에, 루이즈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미친 예술가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러나 예술이 도덕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다는 그의 가치관은 특별하게 비윤리적인가? 예술가인 애들러에게서 죽음마저 예술적이기를 바라는 시선의 폭력은 루이즈만이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선이 남달리 유해한 것이 아니라면, 시선이 드러나는 방식 또한 남달리 유해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지 않나. 결국은 예술이 드러나는 방식이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술을 기대하는 방식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것이다. 평범을 깨는 무조건적인 파격, 그로 인한 충격에서 얻는 정신적 쾌감, 영원히 알 수 없을 세계에 대한 최대한의 자극적인 묘사. 자넷 애들러가 루이즈에게 대상화되고 조각난 것처럼, 루이즈가 그에게 끝까지 예술가다운 모습을 기대한 것처럼 우리 역시 루이즈라는 예술가에게, 우리가 알 수 없을 ‘궁극의 예술’에 닿기 위해 예술가다운 광기, 예술적인 비정상을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루이즈에게 기대하는 광기 어린 예술가의 모습을 벗겨내면, 그 뒤에 남은 루이즈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최소한 우리가 그의 광기를 혐오하든 흠모하든 그 어떤 방식으로라도 타자화하는 순간, 어디선가 애들러의 유골은 끊임없이 파헤쳐질 것이다.

 

***


최근에는 글을 쓰고 있다. 공교롭게도 역시 천재 예술가에 대한 소설을 쓰고 있는데, 자살이라는 결말로 끝맺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예술은 죽음과 함께 언급되지 않는 적이 드문 것 같다. 둘 다 평범한 사람들이 결코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세계처럼 느껴지기 때문일까. 예술가에게는 언제나 범인의 세계를 깨부수는 파격이 요구된다. 우리가 예술을 바라보는 시선은 루이즈가 애들러를 해부하는 손길과 얼마나 다를까.


연극 <애들러와 깁>을 보면서 생각나던 작품이 하나 있다. 바로 학창 시절 나에게 큰 충격을 던져 준, 김동인의 <광염 소나타>라는 단편 소설이다. 광염 소나타 속 화자는 그가 한때 만난 젊은 천재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연주는 범인이라면 상상도 못할, 광염의 연주이나 그것은 오직 그가 살인이나 강간, 방화를 저지른 직후에나 피어날 수 있는 재능이다. 작품은 화자의 입을 빌려 질문을 던진다. 그러한 위대한 예술이 드러날 수만 있다면, 한갓 짐승이나 시골 바닥의 무지랭이 여인이 죽는 쯤의 희생은 눈감아줄 수 있는가? 루이즈나, 광염 소나타 속 젊은 연주가의 포악한 광기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소비자로서도, 창작자로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연극이었다.



[이채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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