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끔찍하고 잔인한 현대예술의 쉬운 풀이, 혐오와 매혹사이

글 입력 2018.10.30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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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끔찍하고 잔인한 현대예술의 쉬운 풀이

혐오와 매혹사이



섹스는 없다. 남녀를 불구하고 섹스는 없다. 이는 행위의 존재를 부정하는 문장이 아니다. 정확히는 '완벽한' 섹스는 없다. 필자가 말하는 섹스는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온전한 하나가 되기 위한 행위다. 욕망의 대상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사람이건, 물건이건, 사상이건, 우리는 완벽한 합일을 위해 몸을 섞길 바란다. 그렇기 떄문에 욕망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이나 환경적 요소에 의해 생겨나지 않는다. 욕망은 개개인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욕구가 세상의 이름을 빌려 재현한 모습이다.


세상의 모습을 빌려 나타난 욕망의 대상은, 우리의 환상을 놀랍도록 재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정말 내 욕구를 그대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욕구를 바로 마주할 수 없기 때문에, 완벽해 보이지만 태생적인 한계를 가진 것들을 갈구한다. 그래서 사랑이 순수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고통과 폭력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목이 잘린 닭이 거리를 내달리는 것처럼, 욕망의 대상을 향해 통제력을 잃고 내달린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특성 때문에 욕망은 좌절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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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 프란시스코 고야


하지만 우리가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 과정을 이어나간다. 괴리는 지연을 낳는다. 우리는 삶 앞에서 스스로를 고통으로 밀어넣는 마조히스트가 된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고통은 또다른 쾌락을 수반한다. 라캉은 이를 주이상스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왜 현대예술에 끌리는가에 대해 책이 서술한 부분에서 가장 공감이 가는 설명을 나름대로 재정의해 서술해봤다. 현대 예술이 만드는 빈 공간, 그러니까 혐오와 매혹 사이에 존재하는 주이상스가 우리의 성장을 낳는다는 것이다. 반쪽짜리 의식의 옷을 입은 우리는 혐오스러운 것에 끌릴 수 밖에 없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안에 우리의 욕구와 진리가 잠들어있다. 저자의 주장을 나름대로 정리해보자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현대예술은 이 주이상스의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이미 우리는 인간의 근원과 미술사의 장황한 역사와 시대의 변화를 이야기하지 않아도 미추와 선악의 판단이 얄팍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기성세대와 비교할 수 없을만큼개인들의 다양한 특질과 동성애를 받아들인다. 네트워크를 넘나드는 이들에게 다양함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현대예술의 해괴함이 제대로 논의될 수 있는 것도 우리 사회가 그렇게 발달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세상에 오늘날 고급예술과 저급예술, 예술의 올바른 표현을 논의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블랙아트가 준 최초의 충격도 이미 오랜 시간 전의 이야기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치 갤러리에서 yba 전시회가 열렸으니, 이십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 현대예술은 또 다른 형태를 띄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현대예술은 국내 대중들로부터 '해괴한 짓'이나 '어그로'라는 오명을 쓰곤 한다. '현대예술'은 복합적인 문제이기에 진중한 접근이 필요하겠지만, 필자는 현대예술이 엘리트주의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해괴한 형상에 형이상학적인 설명만 늘어놓으니 납득이 될리 없다. 국내에 있었던 현대예술과 관련한 이슈도 한몫했을 것이다. 필자는 현대예술의 혁신은 경계의 해체에 있었는데, 가끔 국내의 예술계를 보면 그 경계를 다시 세운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점이 책 <혐오와 매혹사이>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점이다. 끔찍한 현대예술에 대해 이야기는 늦은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국내 대중의 친숙하지 않은 현대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이정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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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깃발, 주디 시카고, 1971



책이 소개한 여러 사례 중 인상 깊었던 한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자기의 질에서 월경혈이 묻은 탐폰을 꺼내는 모습을 클로즈업해서 보여주고 있다. 피나 성기의 노출 자체가 터부시되지만, 이 작품은 그 피 중에서도 끔찍한 '월경혈'이다. 하지만 시카고의 작업은 여성에게 부과되었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다. 여성에게만 나타나는 월경은 여성의 낮은 지위와 결탁해 더욱 사회 주변으로 몰아넣었다.


성서에서는 월경 중인 여성은 불결하고 그 여성의 몸에 닿는 모든 것이 불결해진다고 적었으며, 이브의 원죄였다. 심지어 월경이 병리학적 연구대상이라는 주장한 학자도 있었다. 이런 현실에 맞서 시카고는 이 일상적인 경험이 왜 부정당하는지에 대해 물었다. 그녀의 작품은 충격적이지만, 터부라는 이름으로 묻어왔던 질문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경계와 형식의 해체는 권력과 상식(혹은 우리의 의식체계)에 대한 비판으로 넘어간다. 현대예술이 포르노가 아니라 작품이 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지점에 있다. 예술이 선사하는 창조적 공간에서 우리는 불쾌함에 전면적으로 맞선다. 그리고 그 고통은 인식의 확장을 낳는다.


이처럼 책은 "왜 우리는 이 끔찍한 예술을 진지하게 생각해야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사례와 탁월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윤리적 설명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에는 예술이 포르노화 되었다는 비판이나, 현대자본주의 체제의 자극추구가 만든 아트스타에 대한 비판은 없다. 현대예술의 불편함을 다루는 책인만큼 자극적인 제목과 작품이 소개되어있다. '폭력', '죽음', '질병', '피', '배설물', '섹스', '괴물'과 같은 끔찍한 주제를 카테고리로 내세운 이 책에는, 이름만큼이나 끔찍한 작품들과 주제에 관한 성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끔찍한 것은 '이미지'뿐이다. 저자는 현대예술이 가지는 불편한 매력과 어려운 주제를 소화하기 쉽게 써내려갔다.


미술에 대한 관심이 아니었어도, 늘 고민했었던 '어두워 보이는 주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여러 작가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어서 즐거운 책이었다. 기쁨과 행복은 만끽하면 되지만, 공포와 불안은 우리에게고통스러운 대면을 강요한다. 현대예술은 그 과정의 수많은 시뮬레이션이다. 끔찍한 것들이 이미 우리 안에서 반복되고 있으니, 현대예술의 끔찍함에 끌린다고해서 기죽을 필요 없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혐오와 매혹사이>는 어렵게 쓰여지기 쉬운 예술 책들 사이에서 찾은 보물이었다. 현대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들춰보길 바란다.



책정보


제목: 혐오와 매혹사이
출판사: 동녘
출간일: 2018년 9월 3일
페이지: 336쪽
가격: 23000원


책속으로

언젠가부터 나는 불편한 미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스스로 웃으면서 농담조로 어둠의 미술을 좋아한다고 말할 때도 있다. 어둠이란 단어는 혐오스럽거나, 잔인하거나, 끔찍한 무엇,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불편한 주제와 재료를 전면에 내세운 미술, 그와 관련된 이론들을 연구한다. 아직 연구자라는 단어가 조심스러울 정도로 초짜이지만 그럼에도 내 취향은 분명하다. “왜 그렇게 끔찍한 것을 좋아하는 거야?”와 같은 질문도 수없이 받았다. 그러나 온전한 답변을 해본 적은 거의 없다. 질문자들 대부분은 내 답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그 질문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5쪽

세라노는〈시체 안치소(The Morgue)〉시리즈에서 실제 시체를 사진 촬영했다. 〈시체 안치소〉가 허스트의 작품들에 비해 우리나라에 덜 알려진 것은 그 강도가 너무 세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이 작품들은 발표 당시 죽은 자의 존엄을 훼손했다는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시체 안치소에 냉동 보관되어 있던 인간의 시체를 촬영한 것이라 당시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클로즈업(close-up)되어 피부의 주름과 솜털까지 선명히 보이는 거대한 사진들은 관객들이 관음증적 엿보기를 하는 것 같은 불편함까지 이끌어낸다. 그러나 사람들을 자극하거나 분노하게 하는 것은 세라노의 목표가 아니었다. -96쪽

〈자아(Self)〉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몸 안에 있을 때에는 생명의 상징, 몸 밖으로 나오면 죽음의 상징인 피를 재료로 자신의 자화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유한한 존재인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을 위한 것이다. 사실 혈액은 특정한 개인의 정체성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몸의 일부다. 피는 DNA 정보를 비롯한 몸의 상태를 고스란히 담아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혈액 검사만으로 질병의 유무와 건강 상태, 가족 관계 등을 알아낼 수 있다. 따라서 〈자아〉는 겉모습을 재현해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겉과 속 모두 퀸 자체인 진정한 자화상이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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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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