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의도된 용기가 소시민에 미치는 영향, 연극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

두려움도 태연함도 아닌 이상적인 용기 그 자체를 향하여
글 입력 2018.11.03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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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연극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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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개인의 마음에는 스스로 정립한 준칙이 있다. 이따금 내가 세운 준칙은 세상이 정한 질서와 충돌하곤 한다. 이때 ‘개인과 사회 중 무엇이 우선해야하는가?’라는 딜레마에 빠지곤 한다. 개인의 마음에 깃든 준칙은 대개 정도에 관한 것이다. 지나침과 모자람이 없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행위의 준칙이 되어 어떻게 살 것인가란 윤리학적 물음을 던진다. 생각의 무능을 벗어난 인간은 생각하고 행동함으로서 자신의 삶을 영위해 나간다. 잠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빌리자면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은 마땅한 것에 대한 마땅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그는 <중용>에서 인간행위의 이상적 기준을 제시한다.

 

<중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핵심이다. 인간이 지닌 충동과 욕망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며 절제를 통해서 조정해 나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행동으로 인한 양 극단 사이에 중간을 취하면서 최고선을 실현해 가는 것이 이상적인 삶으로 다가온다. 이때 이상은 곧 행복을 의미한다. 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 용기, 절제를 중용의 덕으로 살펴보며 이상적인 덕을 취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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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에서 볼 수 있는 중용의 상태는 ‘용기’에 관한 것이다. 용기는 두려움과 태연함 사이에 발현되는 탁월성이다. 너무 두려워하지도 너무 태연하지도 않는 상태에서 마땅한 행동을 하는 것이 곧 용기의 상태다. 그런 점에서 작품은 중용을 상실한 용기는 어떻게 드러나는지 세밀하게 묘사한다. 극은 크게 이오구와 김두관의 갈등과 소시민과 국가의 갈등으로 나뉜다. 두려움에 치우쳐진 용기는 이오구와 김두관을 통해서, 태연함의 상태는 소시민을 향한 국가의 상태에서 볼 수 있다.

 



용기를 찾아 떠나는 운명의 수레바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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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제 5공화국 시절 용감한 시민상을 소시민 김두관에게 주기 위해서 이오구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된다. 억울한 시간을 보낸 이오구는 출소 이후 김두관을 찾아가서 자신이 호구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한다. 김두관 또한 얼떨결에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처지라 이오구의 요청이 곤란하기만 하다. 이오구의 끈질긴 요구로 인해 김두관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만 둘 만의 문제 해결은 범죄가 되어 또 다시 운명의 장난에 휩쓸리게 된다. 작품이 관통하는 1980년대부터 2016년에 이르기까지 김두관과 이오구는 용감한 시민상으로 인해서 질긴 인연을 이어간다.


두 인물의 갈등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용감한 시민상’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용감한 시민상’은 말 그대로 용감한 시민에게 주는 상이다. 하지만 이는 굉장히 모호한 상이다. 용감은 곧 용기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 용기는 개개인의 마음속에서 발현되는 이상적인 중용의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가 생각하는 용기의 정도는 다르다. 개인이 모여 집단을 형성한다면 그 속에서 보편적인 용기의 개념이 등장할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 ‘용감한 시민상’의 의의는 진정으로 마땅한 때에 마땅한 용기를 보인 이에게 주는 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 ‘용감한 시민상’은 개별의 용기가 모여 만든 보편의 용감함에 부합하지 않는다. 국가 권력에 의해 철저히 조작된 상태에서 수여하는 상이기에 ‘용감’의 정도는 언제나 변동될 수 있다. 변동만 되는가. 국가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기에 중용의 용기와 거리가 멀다. 철저하게 계획되고 의도된 ‘용감한 시민’에게만 상을 수여한다. 그렇기에 용감한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용감한 시민이 될 수 있고, 악의를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악인으로 낙인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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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이오구와 김두관이 보이는 용기는 진정한 용기가 아닌 두려움의 상태에 빠진 용기다. 이오구는 자신의 억울함이 풀리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김두관에 자신이 입은 피해에 응당한 복수(?)를 요청한다. 두 인물이 억울함을 푸는 범위는 협소하다. 국가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지레짐작한 듯 두 인물은 서로간의 문제만을 해결하려 한다.


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으로 이오구가 김두관을 찌르는 행위는 갈등 해소에 직접적인 요인이 되어주지 못한다. 관계는 오히려 전보다 복잡해지며 직접적인 용기 없이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나락으로 빠지게 된다.

 



개인과 국가, 국가 속 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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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개인에게 상을 준다. 용감한 시민상, 봉사상, 노래상 등 여러 상을 주면서 상에 걸맞는 인간상을 배출한다. 김두관은 불의를 보고 분노에 차올라서 마땅한 용기를 선보여서 ‘용감한 시민상’을 받는 게 아니다. 철저히 의도되고 연출된 국가의 지휘 하에서 탄생된 시민영웅 김두관이다. 절대 선이 있기 위해서는 절대 악이 있어야 한다. 용감한 시민의 탄생을 알리는 대목에서 이오구는 용감한 시민을 있게 한 절대 악인으로 존재한다. 그 시절 국가는 개인의 용기를 국가 통치의 합리화와 건전한 국가 건설을 위하여 이리저리 남용하였다. 그렇게 의도된 영웅과 의도된 악인이 혼재한 사회에서 개인은 국가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존재로 있었다. 용기는 철저히 만들어진 마땅함이었으며, 국가의 지시를 잘 따르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었다. 이오구와 김두관도 국가의 부속물 중 하나로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용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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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시의 국가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바로 집단지성의 힘이다. 하나의 용기는 쓸모없거나 국가의 정당화에 도움을 주곤 한다. 하지만 하나의 용기가 모여 여럿의 용기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개인의 용기는 통치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집단의 용기는 권력을 통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명제처럼, 집단의 용기가 세상에 변화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2016년의 배경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개인과 국가에 있어 그 어느 것도 우선할 수 없다. 개인은 국가의 존속을 위해, 국가는 개인의 안녕을 위해 존재한다. 1980년대의 이오구와 김두관을 통해서 국가는 개인의 통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2016년의 모두의 외침을 통해서 국가의 절대 권력은 언제든지 시민에 의해 전도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일상 곳곳에 침투된 그늘에 대하여



블랙 코미디 형식의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다. 작품은 블랙 코미디란 장르를 통해서 일상 속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권력에 의한 위협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이때의 위협은 작품상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자리에 앉아 있는 관객 모두가 살면서 한번쯤은 집단을 통해서 들어 보았을법한 대사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안차려?’와 같은 학교, 군대, 회사에서 등 이른바 군기 잡는다는 명목 하에 개인의 인격을 묵살시키는 말들은 무대 위에서 자연스레 오간다. 극을 보는 관객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국가의 개인 모독을 받아들인다. 살면서 들어는 보았지만 들은 사회는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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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권력에 의한 개인의 말살은 이오구와 김두관 같은 특이 케이스에만 머무르는 게 아니다. 자연히 일상을 파고들어 세뇌시킨다. 그렇게 집단은 개인의 준칙을 무시하고 집단이 만든 원칙을 주입시킨다. 이때 상은 개인을 현혹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다. 하지만 이때 상은 개개인의 탁월성 발현에 의한 것이 아닌 교화와 통치 수단의 목적으로 존재한다. 용감한 시민은 곳곳에 있다. 말을 잘 듣는 사람, 규칙을 잘 따르는 사람 등 오늘날 탁월성은 법과 제도 속에서 형성된다. 하지만 작품은 당연하게 생각해온 것들에 대한 반문을 제기한다.


극 중반에 등장하는 판사는 앵무새 이야기를 하면서 ‘어쩌나’만을 습득하여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앵무새의 모습을 흉내 낸다. ‘어쩌나!’라고 외치는 순간은 이미 어쩌다 그렇게 된 상황에서만 가능하다. 촛불을 들어 제 목소리를 외치는 과정을 거쳤다. 하나의 촛불은 여럿의 촛불이 되어 권력 너머에도 힘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작품은 일상 곳곳에 침투한 당연한 것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이유 있는 외침을 던지며 바꾼 세상도 시간이 지나면 당연하고 이미 그래 왔던 것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우를 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그렇게 되는 것들은 없다. 일상에 대해 조금 더 면밀하고 세심하게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는 <어쩌나, 어쩌다, 어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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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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