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지는 별] 02. 감정 탄압의 시대

글 입력 2018.11.04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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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가치를 역설하는 영화 <인사이드 아웃>은 그동안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았던 아픔을 위로하며 사회가 도외시하는 가치를 조명했다는 평을 받는다. 슬퍼해도 된다는 메시지는 왜 그토록 강한 울림을 갖는 위로가 되었을까. 슬퍼하면 안 된다고 가르침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았고 가르침에 완벽하게 응할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은 자신 안의 슬픔을 억누르기에 급급했다. 결국 사람들은 슬퍼해도 된다는 다독임을 무의식적으로 절박하게 요구하는 데 이르렀다. 이 영화의 위로는 감정이 제한되는 사회의 전반을 향해 뻗었고 그렇기에 더욱 강한 울림을 선사했다.



감정 탄압의 시대


다원주의 시대에서 감정의 다양성은 여전히 탄압받는다. 어딜 가나 열린 광장인 시대에서 타인의 감정을 받아들이는 데 과부하를 느끼는 현대인의 피로감 때문일까? 탄압은 타인에만 머물지 않고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할 만한, 그리고 적정량은 필요할지도 모르는 슬픔이나 우울과 같은 감정은 소유 자체로 낙오자의 기준이 되고 사람들은 그러한 감정을 갖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자책에 시달린다. 그러나 나는 그 또한 가려지는 별이라고 생각한다. 기쁘고 즐겁기만 한 인간은 세상에 없다. 이 세계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감정들을 직면하고 존중할 필요를 느낀다. 볕에는 없는데 그림자에만 있는 가치가 분명히 있다.

이 소재를 생각하게 된 것은 어느 새벽이었다. 낙천적인 성격이지만 가끔 새벽에 잠이 오지 않을 때 끝없는 고독에 휘말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걱정할 때가 있다. 그러지 않는 자는 없겠지만, 그러지 않는 자를 상상하며 부러워한다. 그럴 때마다 우울을 더하는 것은 이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자체가 단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 누구나 느끼는 이 감정이 단점이 되는 것이며 나는 왜 그것을 걱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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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한 감정뿐 아니라 사실 감정 그 자체에 대한 탄압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글거린다’는 말이 표현의 폭을 축소시켰다는 의견이 빈번히 등장한다. 공감한다. 대체 정의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르는 말 한마디에 수많은 감정과 표현이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렸다. 평소에 문학적 표현을 쓰거나 읽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어렵게 꺼낸 진심의 말에 ‘오글거린다’라는 대답을 들을 때가 많다. ‘너를 이만큼의 감정으로 생각하고 있어’라는 말에 마치 ‘그 정도의 감정까지는 필요 없어’라는 대답을 듣는 기분이다. 많은 사람이 경험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제한되는 대화와 감정 교류가 계속되다 보면 내 자신을 일정한 너비에 가두게 된다.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줄어든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다. 영화 <클래식>에서 부모님의 연애 편지를 발견한 지혜는 사랑의 감정을 아낌없이 담아낸 문장들에 유치하다고 몸서리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래, 클래식이라고 해두지 뭐.” ‘유치’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클래식은 분명 감동을 준다. 우리는 감동의 기회를 너무 많이 놓치고 있다.



‘느껴야 하는’ 감정


우리나라에서 성행하는 ‘신파 영화’가 반감을 사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 안에 있다고 본다. 신파 영화란 관객에게 눈물을 흘리게 해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주는 영화를 이르는데, 신파 영화의 성행은 거대 자본의 배급 시장 점령과 그에 따른 영화의 획일화와 같은 논지로 지적되는 현상이다. 신파 영화는 최대한의 감정을 끌어내고 표현 방식이 일정한 규범을 따른다는 점에서는 그야말로 ‘클래식’인데, 왜 오히려 감동의 기회를 제한하는 영화로 지적받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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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주제를 바꾸어 조각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그리스 헬레니즘 문명의 정신을 그대로 담아낸 걸작, ‘라오콘 군상’이다. 미학자 빙켈만은 이 조각상의 가치가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으로 대표되는 고전의 정신에서 나온다고 설명한다. 감정이 과잉되지 않고 적절히 절제되어 표현되었기 때문에 더욱 아름답다는 것이다. 아주 먼 옛날, 고대의 사람들에게 감정표현의 적절함은 예술의 고귀함과 위대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왜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을까? 사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은 절제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나의 감정에 대해 주체가 되고 싶은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죽어가는 라오콘의 격정적인 표정이 분노를 가리키는지 슬픔을 가리키는지, 어쩌면 죽음 직전에 느끼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약간의 모호함은 관객에게 인물의 감정을 해석할 수 있는, 그리고 자신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감정의 빈 곳에서 오히려 관객은 더욱 풍부한 감정의 주체가 되고 자유로운 감정의 숲을 노닌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세상을 휩쓴 시대에서 수많은 예술은 빈칸을 숭숭 뚫으며 그곳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앞에서 논했듯 이러한 과정에서 자연히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며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도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신파 영화는 어떠한가. 온갖 클리셰와 뻔한 상징들로 ‘지금 울어라’ 하며 외치고 있다. 감정을 주입하고 선택권을 빼앗는다. 아무리 격정적인 감정을 끌어낼 수 있을지라도 그 감정은 결국 제한된 감정이다. 그것이 '클래식'이라 해도 제시되는 규범의 깊이는 한없이 얕다. 결국 눈물을 흘리게 될지언정 그 눈물이 온전히 관객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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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 영화에 대한 다수의 반감이 표출되고 있지만, 모순적이게도 우리나라에서 흥행하는 신파 영화는 아주 많으며 단편적인 감정의 주입 현상은 사회 전반에서 나타난다. 사회는 한정된 감정만을 바라본다. 스펙터클 시대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보길 원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SNS에 즐거운 모습만을 전시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평면적으로 가둬지는 감정들은 우리를 괴롭게 한다.



감정을 기다려줄 줄 아는 세상


‘정’의 나라라며 (자신에게 필요한) 감정을 내쏟기를 바랐던 한국 사회의 이면성이 드디어 본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정'은 개인에 대한 배려를 생략한 채 강요되었다. 사회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원하는 감정이 아니면 철저히 배격했던 것이다.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베풀기를 바랐고, 개인의 희생이 당연시되는 일에도 기쁨으로 힘을 더하기를 원했다. 경쟁 사회에서 괴로워하는 청년들에게는 '노력'을 하지 않아 그런 것이라는 질책만이 돌아왔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허울뿐인 위로는 아픔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버렸다. 공감으로 인해 치유되고 또 치유되며 빛을 발하는 아픔의 가치에 사회는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결국 사람들은 이중으로 고통받는다. 감정을 강요받기 때문에, 감정을 배척받기 때문에.

문을 강제로 열고 물건을 내놓으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더욱 문을 꽁꽁 닫게 되기 마련이다. 모든 감정이 한데 얽혀있는 그 문을 열기까지 신중한 두드림의 자세가 필요하다. 인터넷에서 '자존감 테스트' 사이트를 발견했다. 몇 가지 설문조사로 자존감을 측정하고 점수를 매기는 시스템이다. 점수가 낮게 나온 사람들은 슬퍼하고 높게 나온 사람들은 좋아한다. 감정의 정도마저 도마 위에 올라와 끝없이 측정되고 비교된다는 사실에 씁쓸했다. 온전한 나의 감정을 존중해주고 그것이 다듬어져 표출되기까지의 과정을 천천히 기다려줄 줄 아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더욱 진실된 감정으로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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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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