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겐 정말 보물 같은, 나의 엄마 [음악]

'엄마'라는 이름에 대하여
글 입력 2018.11.0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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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겐 정말 보물 같은, 나의 엄마 

'엄마'라는 이름에 대하여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너에게 해줄 말이 없지만
네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내 가슴 속을 뒤져 할 말을 찾지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러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노래가 있다. 양희은 선생님의 엄마가 딸에게.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늘 감정이 북받친다. 계속 우리 엄마가 생각이 난다.




'엄마'라는 이름


엄마라는 단어는 만고불변의 진리처럼 눈물샘을 자극하는 마성의 단어다. 나는 ‘엄마’라는 단어에 희생, 숭고함, 헌신이라는 프레임이 씌워지는 걸 누구보다도 부정하는 사람이다. 부모의 헌신이라는 표현도 마땅찮은 마당에 한 쪽 성에게만 과도하게 편향된 노동의 굴레가 그렇게 아름답고 숭고하고, 듣기만 하면 눈물이 날 것 같은 감성으로 점철되는 현실은 분노를 넘어 어이가 없다. 우리네 아버지, 우리네 어머니로 대변되는 우리 부모님 세대에 뿌리 박힌 성 역할의 구분은 참 한숨을 짓게 만든다.

가부장적인 젠더관 속에서 여성은 남편을 잘 내조하는 아내로, 아이를 잘 키우는 어머니로 구분 지어진다. 정확히 현 20대 여성들의 어머니들은 이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각 개인의 경험의 차이에 따라 지금 우리 세대에서도 이런 사회적인 틀 자체로 인해 피해를 보는 여성, (더불어 가부장적 젠더 패러다임 아래 경제적 책임감에 압박을 느끼는 남성들 역시) 존재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주례사에 매우 당당하게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라는 문구가 들어가던 시대였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엄마들의 세대는 얼마나 심했을 지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엄마’라는 이름에 울컥 눈물이 나는 사회적인 상징적 의미가 무척이나 싫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에 숨어든 신화적 의미를 알고 있더라도 나는 엄마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우리 엄마가 살아온 삶은 이 단어 속에 녹아든 그 상징적 의미를 충분히 담고 있기에.



나의 엄마


평소에는 우리 엄마라는 말을 쓰지만, 여기선 내 엄마라고 지칭하겠다. 나의 어머니는 어찌됐든 한 분이고, 나는 그 분이 사회적 정체성이 집약된 ‘우리 엄마’라는 표현으로 일반화되는 것보단 나의 엄마로 이야기되길 바란다. 엄마가 당신의 이름으로 존재하는 게 더 좋지만, 엄마가 나를 위해 살아준 ‘엄마’로서의 삶을 나는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우리 엄마는 혼자서 가장 노릇과 양육의 역할을 다 하신 분이다. 보통의 엄마들보다 2배로 사회적으로 부여된 ‘남성’의 역할까지 모두 다 해내셨다. (무서운 건 내가 보통이라고 지칭하지만, 이렇게 남자의 사회적 역할이라고 일컬어지던 가장의 역할을 동시에 해낸 엄마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보통이란 표현은 이들에게 써야 할 지도 모른다) 정말 판에 박힌 표현이지만 엄마가 딸들을 위해 버텨낸 하루 하루가 쌓여갈수록 엄마의 주름이 늘어갔다. 막내 딸이 성인이 되고도 5년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 엄마는 거울을 보기가 싫다고 이야기하신다.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 한 켠이 시리다.



‘엄마도 여자야’ 라는 말


나는 ‘엄마’라는 이름만큼 저 말도 싫어한다. ‘엄마도 여자야’라는 말은 문맥적으로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엄마는 엄마기에 여자로서의 욕망을 제어하고 산다는 의미가 더 섬뜩하게 다가온다. 심지어 여자의 욕망은 무엇일까. 이런 모호하고 애매모호한 단어로 점철된 저 문장은 은연 중에 사회적 성 역할을 강조하고 고정시키는 언어적 작용이다. 나는 그래서 결혼식 때 우는 신부도,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남편에게 가는 입장 방식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독립을 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마치 딸을 더 이상은 볼 수 없는 것처럼 그리 울어댄다. 화가 나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게 우리네 어머니들이 살아온 현실이고, 진실이다. 부정할 수 없다. 나의 엄마는 당당한 사람이다. 아들들에게만 지원을 몰아주는 가정환경에서도 엄마는 스스로 벌어 대학을 다니셨고, 멋있게 일하셨다. 나는 내가 엄마를 자빠뜨린 돌이 된 것 같아 가끔씩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그런 자식들까지도 엄마는 키워냈다. 혼자서 굳건히. 나는 우리 엄마가 산 삶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 덕분에 내가 있는 것이니까. 그래서 엄마가 자라온 환경, 그 시대를 관통하는 저 말 조차 엄마에게만은 예외를 둔다. 엄마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젊은)‘여성으로서’의 누리던 것들을 다시 누리고 싶다면 나를 기꺼이 엄마를 응원하고 지원할 것이다. 엄마에 대한 차원이라면 저런 사회적인 의식체계의 담론도 부분적으론 인정할 수 있다.



나를 페미니스트로 기른 건 엄마다.



나는 엄마를 존경해,
하지만 엄마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고등학교 때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던 말이었다. 말 그대로다. 엄마의 삶은 대단했고, 존경하지만 엄마처럼은 살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지금의 나와는 다른 시대에 살았다. 엄마의 회사에선 ‘미스김’ ‘미스리’라는 언어가 여성 직원을 부르는 대명사였고, 30살에 결혼한 엄마는 엄청난 노처녀였으며, 계집애가 설치고 다닌다고 할아버지에게 욕을 먹는 게 당연하던 시기였다. 말 끝마다 계집애가, 계집애가를 달고 살던 엄마의 아버지로 인해 엄마는 딸들에게 절대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혹여나 아빠조차 그런 단어를 뱉지 않았다. 여자라는 이유로 차별 받던 엄마의 사회적 경험 덕에 엄마의 딸들은 그런 차별을 최소한도로 겪으며 자랐다. 우리들은 언니가 큰 집의 적자라는 이유로 작은 집의 오빠들을 다 제치고 제사에 술을 먼저 올리는 환경에서 자랐다. 모두 엄마의 노력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엄마의 노력 덕에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엄마의 삶은 존경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가부장적 젠더관으로 얼룩진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이 생각은 단호했다. 나의 젠더관은 아직도 끊임없이 형성되고 변화하고 있지만, 결국 젠더 논쟁의 종착점이 궁극적인 개인주의란 것은 명확하다. 한 개인이 어떤 젠더적 편견없이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사회, 이상적이지만 그 이상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엄마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여성은 여성이란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생물학적 논리와 상관없는 젠더 관념이 과연 형성 될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이룰 수 있는 일만 꿈꾸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이런 꿈을 준 엄마가 참 소중하다.



다시 한번, 엄마라는 이름



내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걸 용서해줄 수 있겠니
넌 나보다는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약속해주겠니


우리 사회에서 ‘엄마’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소비되는 그런 모든 맥락들은 여전히 ‘여성’을 규정하는 틀 안에서 다시 ‘엄마’라는 틀을 규정하고 그 안에 희생과 헌신을 강요한다.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그러한 ‘엄마’라는 이름 아래 살아간 수많은 엄마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엄마를 비롯한 그분들의 삶은 훌륭하다. 젠더에 대한 논쟁으로 점철되기 전에, ‘엄마’라는 이름 뒤에 숨겨진 사회적 맥락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우리들을 만들어낸 건 결국 그러한 ‘엄마’들이다. 나는 ‘엄마’라는 이름이 과거의 맥락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담아가길 바란다. 양희은 선생님의 가사처럼,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희생한 엄마들의 존재를 기억하는 동시에, 이제는 ‘엄마’라는 이름 하에 누군가 맹목 없는 희생을 강요 받지 않는 단어로 엄마라는 이름이 정의되면 좋겠다. 엄마의 새로운 정의는 이제 우리의 몫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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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으로, 일본으로, 유럽으로 해외여행을 다니고 놀러 다닐 동안 엄마는 여권 하나가 없었다. 어쩌다 일에서 벗어나 시간이 생겼을 때 해외여행을 가겠다고 아이처럼 좋아하며 여권을 만들던 엄마가 기억이 난다. 결국 조건이 맞지 않아 여행이 어그러졌을 때 나는 엄마에게 무척 미안했다. 내가 그 때 한국에 있었다면, 무언 갈 더 해줄 수 있었을 텐데… 자꾸 엄마가 좋아하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올해는 꼭 엄마와 함께 해외여행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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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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