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FILO》 같이 보는 영화의 즐거움을 상기시키다

글 입력 2018.11.05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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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보는 영화, 같이 보는 영화


영화 보기를 좋아한다. 특히 혼자 보는 영화를 좋아한다. 보고 싶은 영화가 상영을 시작하면 막이 내리기 직전까지 기다리다 관객이 최대한 모이지 않을 때, 그리고 가장 사람이 적은 시간대에 영화표를 예매한다. 스무 살이 되고 영화관에서 혼자서 영화를 처음 봤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사실 그전까지는 영화를 단순 오락으로 소비한 게 컸는데, 그때 영화의 감상을 오롯이 혼자서 즐기며 '혼영'의 재미를 깨달은 이후로 그렇게 된 것 같다. 혼자 기대하고, 혼자 예매하여 혼자 감상하고, 혼자의 경험을 비추고, 혼자만 알아듣는 해석을 하고,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앉아있다 영화관을 나가는 순간에도 혼자 영화를 곱씹는다. 사소해 보이지만 감상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나의 내면에 있는 생각과 경험을 더욱 많이 끌어낼 수 있고, 스크린 속에만 존재하던 영화는 천천히 나의 마음에 축적되어 내 것이 된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관람하고 대화를 나누며 감상을 모아 공유하는 것도 가치 있는 감상법이다. 같이 봐야 재미가 배가될 것 같은 영화는 지인을 모아 함께 보려고 노력한다. 혼자 간직되는 감상의 애틋함은 특별하지만, 감상이 모이는 곳에는 공감과 충돌이 함께 하는 즐거운 일이 많이 일어나며 예기치 못한 새로운 것이 반짝 떠오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이 보는 영화의 가치가 요새 들어 많이 퇴색된 것이 사실이다. 관객들이 많이 모인 영화관에서는 일부 관객의 매너 없는 행동으로 인해 영화 관람에 방해가 될까 영화관으로의 발길을 끊은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다수의 관객과 함께 울고 웃으며 반응을 공유하고 싶다는 이유로 가장 관객이 많은 시간대의 상영관을 찾는 사람들도 있다. 같이 보는 영화만이 갖는 가치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만큼 그 즐거움을 찾기 어려운 지금이다.



영화와 언어와 사랑의 탐색지


영화 비평 잡지 ‘필로’는 다양한 ‘혼자’들의 비평을 모아 담백하게 엮어내고 감상을 공유하며 ‘같이’ 보는 영화의 가치를 구현한다. 1인 미디어, SNS 등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을 공유할 수 있는 수단이 즐비해지면서 영화의 학술적 지식을 기반으로 한 전문 비평의 입지가 위태해지고 있다. 예술작품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것을 반기는 편은 아니지만, 가이드라인으로 삼을지에 대한 결정은 어쨌든 독자에게 내맡겨지며 전문적으로 구축된 지식을 참고하는 것은 감상을 제한하기보다 더욱 확장하는 순기능을 하기도 한다. 특히 국내에선 관람이 쉽지 않은 다양성 영화를 심도 있게 다룬다는 점에서 ‘필로’의 비평이 지닌 가치는 주목할 만하다. 영화를 같이 관람할 기회가 없던 관객들에게 필로는 ‘영화와 언어와 사랑의 탐색지’로써 훌륭한 안내자이자 동행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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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개봉했던 이창동 감독의 ‘버닝’에 대해 비평한 목차가 눈길을 끌었다. 몰입감 있게 봤지만 나에겐 여전히 빈칸과 수수께끼가 가득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궁금한 점이 너무도 많아 많은 리뷰를 찾아봤는데, 다들 전체적인 감상의 뉘앙스는 비슷하나 구체적인 해석은 각양각색이었기에 감상을 완결할 수 있는 확실한 해석은 애초부터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지만 감독의 평소 연출 방식 및 영화에 대한 태도와 같은 외적 정보 혹은 영화에서 자주 쓰이는 상징과 같이 전문적으로 축적된 지식 체계를 참조해보는 것은 마구 흐트러져 있는 퍼즐을 맞춰볼 기회 즈음은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충분한 근거를 갖는 비평은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를 주는 하나의 작품이 된다. 혼자 봐서 더욱 강한 인상이 남았던, 하지만 그래서 더욱 모호했던 영화 <버닝>에 관한 정한석 비평가의 <이창동의 꽃병>과 감상을 ‘함께’ 해보았다.



함께 하는 <버닝>


나는 관객의 입장에서 인물과 인물의 관계가 드러내는 상징성과 거기서 오는 느낌에 주목했다. 가장 주목한 것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지만 또렷이 눈에 보이는 신기루 같은 존재인 해미가 진실을 상징하는지, 혹은 거짓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여부였다.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해미였다. 영화에서는 해미의 말의 진위에 대한 확증을 끝까지 주지 않으며 양극단을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거짓을 의심하게 하거나 인물 자체가 거짓처럼 보이게 되는 해미에 관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고양이 '보일이'의 유무, 어렸을 때 우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경험, 그리고 남산타워에 굴절된 햇빛이다. 관객은 처음에는 해미가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한다. 고양이도 없는 것 같고, 우물에 관한 경험도 거짓말이라 하는 증인이 있고, 해미의 방에는 햇빛이 아닌 남산타워에 굴절된 '가짜 햇빛'이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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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것이 진실임을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등장한다. '보일아'라고 부르자 반응하는 고양이가 나타났고, 우물이 실재했다는 증언도 등장한다. 그렇다고 해미가 진실을 상징한다고 확언할 수 없다. 고양이가 진짜 '보일이'인지, 우물이 진짜 있었던 것인지에 대한 진위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해미의 가족이 말한 것처럼 해미가 단순한 거짓말쟁이로 해석되기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미는 오히려 작열하는 일몰의 노을을 보며 삶의 의미를 관철한 '그레이트 헝거'에 가까워 보인다.

영화를 매우 평면적으로 감상했을 때에 벤은 해미를 죽인 것처럼, 종수는 벤을 죽인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해미는 진실, 그런 해미를 죽인 벤은 거짓, 중반까지는 벤과 해미의 세계를 넘나들며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며 혼란스러워하던 종수는 벤을 '태움'으로써 진실에 가까워진 자로 해석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정말 평면적인 분석이며 어느 정도 자의적이기까지 하다. 정한석 비평가는 벤이 정말 해미를 죽였는지, 종수가 벤을 정말 죽였는지에 대해선 확증할 수 없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고 기술한다. 종수가 벤을 죽인 상황이 꿈일 수도 있으며, 그는 벤을 죽임으로써 '해피엔딩'을 관철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벤처럼 방화하는 꿈을 꾸던 모습처럼 벌거벗었다는 점에서 벤과 동일시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어있는 감상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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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은 아무도 모른다. 정한석 비평가는 <버닝>의 가치를 여기서 발견한다. 빈칸투성이고 채우고 채워도 또다시 채울 공간이 생긴다. 비평가 자신과 이 비평을 읽고 있는 누군가의 해석이 충분히 다를 수 있으며 그것이 영화의 가치라는 점을 역설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문제지가 아니고, 비유하자면 추상화에 가깝다. 영화의 우아한 느슨함은 문제를 풀거나 빈칸을 채우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오히려 남겨두라고 종용한다. 여백의 아름다움은 이 영화에서 고요하게 빛난다. 진위를 판가름하던 관객의 오만함을 비웃듯, 수수께끼 세상은 어차피 빈칸 가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영화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하러 펼쳤던 비평의 페이지에서 그 시도의 불필요를 느낀 셈이다. 같이 보는 영화의 즐거움 중 하나는 빈칸에 쓰인 생각들이 모두 다르며 누구 하나 자신의 생각을 정답이라고 주장하거나 우위를 점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비평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정도 안내의 속성이 있지만, 어떤 빈 칸에 주목했고 어떤 생각으로 그곳을 꾸몄는지에 대한 자신과의 차이를 목도함에서 나오는 재미가 있다. 우리는 그 재미의 중요성을 잊으면 안 된다. 무한한 생각으로 채우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빈칸으로 놓아 두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면 전자는 혼자 감상할 때 흔히 경험하고 후자는 같이 감상할 때 자주 경험한다. '같이'의 즐거움을 잊어버리기 십상인 지금, 비어 있는 감상의 가치를 조명한다는 점에서 <필로>의 의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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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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