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도넛 [기타]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글 입력 2018.11.05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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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 텅 빈 부분을 채우기 위해 살아왔다.


사랑할 만한 것이라면 무엇에든 빠져들었고

아파야만 한다면 기꺼이 아파했으며

이 생에서 다 배우지 못하면

다음 생에서 배우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그 텅 빈 부분은 채워지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건 슬픈 말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면서

나는 내가 도넛과 같은 존재라는 걸 깨닫게 됐다.

빵집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도넛으로 태어났다.

그 가운데가 채워지면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7페이지 中-






완전한 나를 바랄 때가 있다. 완전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내 기준에서 이상적인 정도의 나를 바라곤 한다. 그래도 이 정도는 밝았으면, 이 정도로는 긍정적이었으면. 내 안의 마음들을, 이야기를 다 전해주고만 싶을 때도 적당한 만큼만, 딱 그만큼의 말만 건네는 내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 적이 많다.


특히 연애의 관계가 끝나고 나면, 내가 쏟아냈던 모든 말들이, 그 내용이 상처받을 만한 것이었든 혹은 상대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었든, 나는 상대에 비해 말이 많다고 생각했다. 뭘 그렇게 안에 있는 마음을 다 쏟아내는지, 굳이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지. 나름 성숙해졌기 때문일까, 이제 관계가 저물어갈 때, 각자의 마지막 말을 건네야 하는 순간 나는 꽤나 이성적인 척하며 나름 절제한 말들을 건네려 애쓴다. 여전히 많은 말을 건네지만.


어떤 사람은 나에게, 생각이 너무 많다고 한다.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는 나에게, ‘넌 왠지 남들보다 조금 더 예민할 것 같다. 혹시 마음에 있는 모든 말을 쏟아내는 편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


그러면 나 역시 내게 묻게 된다.

나는 누군가, 하고 말이다.



비단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내가 비교적 더욱 진솔하게, 그리고 내면 깊은 곳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일기장에서도 나의 문장들은 너무나 붕 떠 보였다. 왜 그날 그날의 사소한 이야기들을 하는 것에 그치지 못하는 걸까? 왜, 그냥 단순하게, 오늘의 사소한 일들 가끔은 큰 문제일지라도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쓰는 데서 멈추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나는 나의 일기를 보며 이 땐 이랬구나, 그런 생각에 그치지 않고 동시에 자기 검열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일기장에 쓰인 내 감정들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똑같은 일이라도 말은 하기 나름인데, 내가 너무 감정을 부풀린 것 같다. 나는, 이 아니라 ‘너는’이 되며, ‘너는 무슨 그런 일 하나로 이렇게나 많은 생각을 하니. 어떻게 이렇게까지 생각이 퍼지지.’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내 마음을 의심했다. 과연 그런 감정들을 느낄 만큼의 일이었냐고 말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오버스러운 사람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도넛이라고 말하는, 그리고 그런 자신을 그냥 받아들이는 이 작가의 책을 읽으며 나도 어쩌면 마음 속에 도넛 하나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내가 생겨 먹은 게, 나라는 삶이 도넛이라면, 도넛까진 아니더라도 그냥 마음 속에 도넛 하나가 있는 거라면. 굳이 그걸 채워야 하나, 아니 채울 필요가 없다고, 왜냐면 나는 도넛이라고 말하는 문장을 보며 나는 그제서야 크게 안도했다.


내가 누군지 잘 모르면서 남들 보기에 오버스럽지 않은, 심지어는 스스로 보기에도 그저 적당하고 괜찮은 사람이 되려 했던 시간들이 그 문장을 앞에 멈춰 섰다. 그 문장을 이후로 다른 사람이 되려 애쓰고, 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던 시간을 조금 내려놓게 되었다. 도넛인 나를 억지로 채우려 애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두어도 그대로 나 자신일 텐데, 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이 부족해서 다른 내가 되려 애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더 나은 내가 될 수는 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나대로 살아가는 방식이 무엇이고 진짜 나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텅 빈 것을 어떻게 채울 것인지, 혹은 텅 비었지만 나는 어떻기에 잘 살 수 있다는 말보다는, 그냥 나는 도넛이고 그렇게 태어났다는 말이 좋다. 아니, 텅 비지 않았을 수 있다. 그런 공간 하나쯤은 있어도 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결핍이 되어 뻥 뚫린 곳보다는, 그냥 내가 내 마음에 하나쯤 놓아둔 공간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런 공간 하나쯤 있는 것도 뭐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때로 어떤 것은 도넛만이 가질 수 있는 그 빈 공간을 통과해, 가벼이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여유로운 생각까지 든다.


아직까지 어느 것이 적당한 것이며, 어느 모습이 진정 성숙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여전히 나는 자기 검열적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편집적인 나의 모습을 보여준다. 좀 더 예민하거나, 조금 더 나의 감정을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나의 모습을 완전히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들켰을 때면 나는 더욱더 내 모습을 고치고 싶어 한다. 그래도, 적어도 나는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게 된 것 같다. 도넛의 모양을, 도넛의 성격을. 도넛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남윤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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