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일상의 풍경 속, 보이지 않는 권력에 대한 통찰- 2018 서로단막극장 ‘말없이’ [공연]

글 입력 2018.11.06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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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이른 추위가 거리 곳곳에 감돌던 지난 화요일, 서촌 통인시장 근처 어느 골목에 숨어있는 작은 극장 ‘서촌공간 서로’에서 진행된 <2018 서로단막극장- 우리서로각자서로>의 첫 작품 ‘말없이’를 감상하고 왔다. ㄱ 자의 객석 구성과,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따로 없는 아담하고도 독특한 형식의 공간을 가진 극장이었다. 공연은 한 시간 여 정도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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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달라진 이야기



사실 이 작품의 프리뷰를 소개할 당시의 시놉시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아동을 키우는 부모가 말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아이와 소통하는 방법을 깨우쳐 나가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실제 공연의 시놉시스는 이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혼 후 홀로 경증 발달 장애아를 키우는 어머니에게 입시 부정을 저지른 대안 학교의 교감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실제 극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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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과 분노와 무기력, 그 어딘가의 현실

극은 명확한 시작 표지 없이 주인공인 엄마(효선)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초조한 얼굴로 식탁 주위를 맴돌다가 앉아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이윽고 아이의 이모이자 효선의 동생인 지선이 등장하면 조명이 무대만을 비추며 본격적으로 극이 진행되고, 이야기가 오간다. 경증 발달 장애아인 아이를 대안 학교에 입학시키고자 했던 효선은 아이가 떨어졌다는 통보를 받지만, 얼마 못 가 뉴스를 통해 해당 학교의 부정 입시 사건이 폭로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곧 있을 해당 학교 교감과의 만남을 통해 아이의 입학이 다시 허가될 것임을 기대한다. 효선이 그 사실을 지선에게 말하며 초조함과 기대감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을 때 쯤, 본격적인 갈등의 중심 인물이 되는 교감이 극에 등장하며 이 작품의 본격적인 서사가 시작된다.


비타민 음료 두 박스를 들고 효선의 집에 찾아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넙죽 90도 인사부터 올리는 교감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끝없이 변명과 말 바꾸기, 합리화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효선에게 언급한다. 그러나 극이 진행될수록 점점 드러나는 교감의 끊임없는 거짓말과 위선적인 면모는 결국 극 종반부에 이르러 본색을 드러내고, 효선에게 아예 대놓고 입학을 포기할 것을 권유한다. 이처럼 교감은 ‘변명’을 통해 현대 사회의 부조리들이 합리화의 포장지로 꾸며지는 것을 여실없이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효선은 그런 교감의 변명에 처음에는 예의를 차리며 응수하지만, 곧 그의 진짜 속내를 알고 나서는 분노와 참담함을 동시에 내비친다. 또한 이는 곧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는다. 하지만 이러한 분노와 참담함은 곧 교감, 그리고 그 위에 있는 어떤 권력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금세 좌절과 체념으로 바뀐다. 개인적으로 이런 효선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답답함을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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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선의 동생인 지선은 세 인물 중 유일하게 대화의 핵심을 극의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짚어내는 인물이다. 변명과 말 바꾸기, 말 돌리기로 일관하는 교감에게 그녀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큰 경계의 대상이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지선이 교감에 대한 저항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기대를 하며 극을 지켜보았다. 교감의 의도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줄곧 교감을 바라보는 지선의 눈빛은 그녀가 <죄와 벌>의 로쟈(물론 좀 극단적인 예시기는 하지만)처럼 이 작품에서 영웅의 면모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관객으로 하여금 갖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그런 기대는 종반부에서 이내 사라지고 말았다. 교감이 결국 자신의 의도를 달성한 후 뇌물이 담긴 비타민 음료 박스를 두고 집을 빠져나가고 나서 내적 갈등과 참담함에 빠진 효선에게 그녀는 그 어떤 위로나 공감의 말이 아닌, ‘언니가 알아서 해. 언니 일이잖아.’라는 한마디만 남긴 채 무대에서 퇴장한다. 결국 효선은 이 작품의 인물들 가운데 가장 현실과 보이지 않는 권력 앞에 무기력해져 버린, 대다수 현대인의 전형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말없이’에 등장하는 교감, 지선, 효선이라는 세 인물은 각각 ‘변명’과 ‘분노’와 ‘무기력’을 대변하며 결코 이상적인 모습이 존재하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현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처럼 그들이 오고 가는 대화 속에서 보여주는 사회의 단면은 이를 지켜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부조리를 돌이켜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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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이라는 공간의 이중성



이 작품의 유일한 극 중 공간이 되는 것은 지선의 집, 세 식구가 둘러 앉는 작은 식탁이다. 가족이 모여 앉아 밥을 먹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화목한 공간인 식탁은 곧 극이 시작되면서 점차 일상적인 공간으로 남아있지 않게 된다.


교감의 등장과 지선과 교감의 이어지는 대화, 그리고 곧 조명이 바뀌며 두 인물만을 비추는 장면, 특히 식탁에 앉은 교감의 얼굴을 자세히 비추는 장면에서 식탁이라는 공간은 마치 취조실 또는 조사실과 같은 분위기로 순식간에 변한다. 그리고 이는 본격적인 극 중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지점이 된다.


이후 극의 갈등이 진행되고 점점 심화될수록, 음식과 젓가락과 화목한 대화들이 오고 갔을 식탁은 이제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많은 것들이 오고 가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식탁에서 실제로 오고 가는 것은 결코 효선과 교감의 대화만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권력과 수많은 정치적 이해관계들, 비리와 거짓말 등의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그들의 대화 저 너머에서 작은 식탁을 오고 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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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말없이’ 혼자 있을 아이를 위하여



이 극에서 이 모든 어른들의 갈등에 깊게 연관되어 있는 아이는 사실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극의 시작 부분에서 오가는 지선과 효선의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무대 공간 밖의 또 다른 극 중 공간 어딘가에 있을 방에서 아이가 나오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윽고 이어지는 교감의 등장, 그리고 이어지는 갈등, 자신을 두고 발생한 부조리한 일들… 결국 연극 내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아이는 방 안에서 이 모든 상황을 듣고 있다는 셈이 된다.


오늘 어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갈등이 아이에게는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홀로 방에서 이 모든 것들을 ‘말없이’ 견뎌내고 있을, 또는 견뎌내야만 할 이 보이지 않는 아이는 사실상 이 작품에서 어른들과 사회가 만들어 낸 잔인한 부조리의 가장 큰 피해자이자, 작품의 주제가 되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결국 이 작품은 ‘말없이’ 받은 상처를 스스로 삼켜야만 하는 이 아이와 효선과 같은 이들을 위한 현실의 짧은 고발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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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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