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와 독립된 비평에 관해 [도서]

글 입력 2018.11.06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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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매거진 <필로FILO>에 수록된 글은 한 영화로부터 나올 수 있는 수많은 감상 중에 선택된 하나의 글이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한 편의 영화와 한 편의 글이 마치 일대일 매칭처럼 수록되어있는 이 잡지에서, ‘무게 배분’이 과연 잘 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차라리 하나의 영화를 다각도로 분석하는 일이 더 재밌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또 하나의 생각이 방해였다. 보지 않은 영화에 관한 글을 읽는다는 건, 원하지 않는 스포일러를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매거진을 신청할 때 나의 습관을 떠올렸다. 때때로 나는 보지 않은 영화에 관한 리뷰를 찬찬히 읽으면서, 온갖 스포일러를 ‘당한’ 다음, 영화를 보기도 한다. 스펙터클한 체험이 덜 중요한 영화를 볼 때 그렇다. 그래서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고 실제로도 가능했다.

 

*

 

애초에 영화가 먼저였다. 영화가 없었다면 그에 관한 비평은 나오지 못했을 것이므로. 음악 비평도, 미술 비평도 다 마찬가지다. 비평은 그래서, 어쩌면 작품에 빚진 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사실 최근에 고민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이렇게 단편적으로 이야기하면 위험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 생각에 ‘예술가 > 해석자’다. 만드는 사람이 말하는 사람에 선행한다는 의미다. 경지가 어떠하든 말이다. 시쳇말로 ‘쓰레기 같은’ 무엇이더라도, 비판하는 그이의 ‘말’은 결국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않은가. 빈약한 논리인가? 그래도 어떤 순간엔 통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비평과 비판의 경계에서 생기는 이슈는 예민하다. 예를 들어, 애써 만든 작품에 관하여 비평가의 잣대가 논란이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혹은 평론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순서가 바뀌는’ 일도 생긴다. 자주, 갤러리에서 보는 그림과 팸플렛 안의 비평문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 미묘한 차이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감상자가 평론가만큼의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고, 그래서 은연중에 감상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때로는 작가마저도 자신의 작품에 관하여 ‘정확히’ 얘기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더 큰 어려움은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과연 ‘정확히’ 말한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이 과연 가리키는 ‘정확한’ 하나의 방향이 있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좋은 비평은, 이 방향에 도달하기 위해 애쓰는 하나의 몸짓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도, 비평이 작품과 완벽하게 조력했을 때, 어느 지점에서 비평은 작품과 분리된다. 비평은 작품의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라 했던가. 일단의 칼질로 작품의 구조를 파헤치고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사유를 읽어내, 조각난 이야기를 다른 순서로 이어 붙이는 과정에서, 이야기는 '다시 만들어진다'. 비평은 작품을 재배치한다. 모양이 바뀌고, 결이 달라진다. 원본에서 비롯되었으나 그와는 완전히 다른 영역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시, ‘좋은’ 비평일 경우에 그렇다.

 

*


결과적으로 매거진 <필로FILO>의 구성은 한 작품과 비평, 아니 하나의 또 다른 작품을 매치시킨 것이나 다름없다고 표현해야겠다. 무작정 수록된 글을 찬양하려는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 견해를 밝혔듯 비평이 쓰이는 과정 때문이다. 영화로부터 비롯된 비평은, 어느 순간 영화로부터 독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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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그래야 한다고 영화는 설정한다. (26)


영화가 해미라는 인물을 각인시키는 방식은 무엇이었나 (26)


영화는 해미에게 그런 장면을 주지 않는다. (27)


영화 스스로 드러내 보이기를 자처하는 구조 (38)


 

영화 <버닝>에 관한 정한석의 비평에서 ‘영화’라는 단어가 중심이 된 몇 문장을 발견했다. 사실 ‘감독’으로 단어를 바꿔도 어느 정도 말은 된다. 그러나 어떤 웹툰 작가가 줄거리를 어떻게 구상했냐는 질문에, 캐릭터를 따라가니 줄거리가 정해졌다고 답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영화는 감독의 손을 떠날 것이다. 이 비평을 읽고 문득 깨닫게 되었다. 비평은 감독의 의도보다 영화 자체에 집중하는 것인가. 마음이 환해질 만큼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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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행위와 비평을 읽는 행위는 목적이 다르다. 아마 <버닝>을 보면서 '영화'가 사람의 손을 떠난 주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풀잎들>을 보면서도 영화감독과 기예의 관계를 나는 떠올릴 수 없을 것이다. 영화를 '다시 쓴' 자들의 글을 읽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


여전히 심오한 철학적 사유와 언어, 익숙하지 않은 표현과 개념은 ‘우리’와 거리를 만들 위험을 담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게 재미있다. 다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아무도 가능하지 못하다. 영화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고, 말해진 무엇을 비평이 다시 파헤치려 한다. 정확한 방향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서 어렵고 낯선 개념들이 등장한다. 이 개념 때문에 영화는 누군가의 이해에서 멀어지고 다시 미끄러진다. 단지 할 수 있는 건 이미지와 글, 글과 이미지 사이를 계속해서 유영하는 것 뿐이다. 그래도 결국 손에 잡히는 건 없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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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O>는 '영화'를 뜻하는 'film'과 '어떤 것을 좋아하는'이란 뜻의 'philo-'를 결합한 말로 영화에 대한 사랑을 글의 행로로 옮겨보고자 하는 격월간 잡지다.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5명의 영화평론가 남다은, 이후경, 정성일, 정한석, 허문영이 국내 고정 필진으로 참여하고, 매호 다양한 해외, 초대 필진이 함께 최근까지 상영되었거나, 앞으로 상영될 가능성이 있는 동시대 영화를 중심적으로 다룬다.

<키노>가 씨네필 문화를 이끌고, <씨네21> <필름2.0> <무비위크>라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영화주간지 전성시대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긴 호흡과 깊은 통찰이 담긴 글보다 포털사이트 별점, SNS상 정보, TV 프로그램, 시네토크, 팟캐스트로 영화 감상을 정리하는 일이 흔해지지면서 여전히 이런저런 원칙과 논리에 의해 외면당하는 영화마저 끌어안으려는 영화비평은 설 곳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FILO>는 '영화비평'을 중심으로, 어딘가에서 영화비평의 지속을 기다리고 응원하고 있을 독자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탄생되었다. '영화와 언어와 사랑의 탐색지'라는 슬로건을 걸고, 우리 시대의 좋은 영화, 중요한 영화, 특별한 영화에 글과 사랑을 아끼지 않는 잡지가 되고자 한다.

4호(9.10월)에는 고정 필진인 남다은 평론가의 <린 온 피트>(앤드루 헤이그), 이후경 평론가의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크리스토퍼 매쿼리), 정한석 평론가의 <버닝>(이창동), 허문영 평론가의 <더 스퀘어>(루벤 외스틀룬드)에 대한 비평을 중심으로, 일본 영화배우 카세 료의 '영화에 관한 요즘 감상 노트', 프랑스 영화평론가 장미셸 프로동의 故 클로드 란즈만 감독에 대한 추모 기사, 영화감독 아오야마 신지가 쓴 <풀잎들>(홍상수), 정홍수 문학평론가, 김병규 평론가, 손시내 평론가가 각각 <모래의 여자>(테시가하라 히로시), <산책하는 침략자>(구로사와 기요시), <디트로이트>(캐스린 비글로)에 대해 비평한 글이 실려있다.

*

목차

5
편집의 글

6
카세 료 <스즈키 가족의 거짓말> 외
영화에 관한 요즘 감상 노트

12
남다은 <린 온 피트>
사막을 걷고 밤을 건너

24
정한석 <버닝>
이창동의 꽃병

50
김병규 <산책하는 침략자>
부축하는 연인들

62
아오야마 신지 <풀잎들>
영화는 거기 있었다

80
허문영 <더 스퀘어>
스크린 붕괴의 두려움

94
이후경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
액션은 저 너머에 있다

108
정홍수 <모래의 여자>
삶이라는 지속, 영화의 충실성

124
장미셸 프로동 클로드 란즈만
비가시사의 현시자

144
손시내 <디트로이트>
응답 없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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