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는 당신처럼 살고 싶었다 [도서]

백영옥 작가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글 입력 2018.11.14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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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눈이 멀었던 때다. 막연하게 잡아놓은 꿈도 사라지고, 지나온 시간이 덧없게만 느껴졌을 때. 붙잡을 동앗줄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왜 다들, 인생 살면서 그런 경험은 한 번쯤 있지 않나. 이대로 살다 죽기엔 억울한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건 도통 모르겠을 때. 그랬을 때 발견한 짧은 소개글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10년 전 봄, 침대에 누워 천장의 무늬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지쳐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실패했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오랜 꿈에서 멀어졌고, 결국 회사에 사표를 냈다. 버튼 하나를 누를 힘이 없었지만, <빨강머리 앤> 50부작 애니메이션을 봤다. (…) 이마가 툭 불거져 나온 이 수다쟁이 소녀는 내게 쉬지 않고 말이란 걸 했다.

"엘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스톱 버튼! 눈물이 핑.
앤의 말을 한 번, 두 번, 세 번 더 들었다.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나의 앤>에서


별것 아닌 말을 듣고 '그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 나는 전자의 사람들을 믿는다. 그래서 작가가 빨강머리 앤으로부터 위로를 받은 것처럼, 나도 앤으로부터 스스로를 다독이는 법을 배웠다.




실패할 걸 알면서도 열심히 할 수 있을까?




안 되는 걸 하려니까 슬펐던 경험. 나 역시 그런 시절이 있었다. 매번 문학 공모에서 떨어졌지만 그래도 소설을 써야만 살아지던 시절 말이다. 13년이니까 올림픽을 세 번 나가고도 1년이 더 남는 시간이었다. 간절한 꿈이 악몽이 된다는 건 아마도 이런 순간이 아닐까. 그때의 삶은 '산다'가 아니라 '견딘다'쯤으로 치환된다.


― '안 되는 걸 하려니까 슬펐던 날' 중에서



글이 돈이 된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 내 글쓰기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방 안에 혼자서 글을 쓰고 있는데도 누군가 노트북 화면을 멀거니 들여다 보는 기분이었다. 취미였던 것에서 즐거움 말고 다른 걸 바라게 됐을 때, 특히 그게 물질적인 욕심과 관련이 있을 때, 좋아하는 일은 좋아했던 일로 돌변하고 만다.


그렇기에 세상에는 마음대로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다. 내 편이 아닌 세상은 늘 당연하다. 뉴스에서, 책에서, 고막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듣는 사실인데 야속하기만 하다. 노력으로 안 되는 세상에서, 태어난 대로 살 수밖에 없다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 할까.



중요한 건 어쩌면 '노력하면 다 이루어진다'와 '어차피 안 될 거니까 노력하지 마라' 사이에 있는 말들이 아닐까. '꿈은 이루어진다!'와 '꿈은 꾸라고 있는 거지 이루라고 있는 게 아니다!' 사이의 말들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 '인간은 죽는다' 정도가 아닐까.


― '열심히 노력했으나 진다는 것' 중에서



안 될 걸 알면서도 노력하는 일, 이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꿈을 향해 노력하는 일, '하라'와 '하지 말라' 사이에서 길을 찾고 선택하는 일.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그 정도가 다인 것 같다. 이제 필연적인 한계를 인정했으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언제고 또 다시 고난이 닥쳐도, 도망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까 앞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살고 있다면 당신 정말 대단하다. 눈물나게 힘들었을 때, 나는 당신처럼 살고 싶었다.




각자의 방공호

이 책 덕분에 넷플릭스의 <빨간 머리 앤> 드라마 시리즈를 꼭 보고 싶다는 열망이 생겼다. 앤이 성장하면서 나까지 따뜻해지고, '내일도 열심히 살자' 허탈하게 다짐하게 된다. 나에게 그랬듯, 앤이 당신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굳이 앤이 아니더라도, 책이나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사람은 위로가 될 만한 은신처를 하나쯤 갖고 살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모두가 각자의 방공호를 갖고 사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a0109200_49dbffbdadc1f.jpg▲ <빨간 머리 앤>
 


[권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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