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angle] 완벽한 날 2-2. 안녕

저는 반 시간이 흘러갔는데, 여기는 한 시간이 흘러갔군요
글 입력 2018.11.1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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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날 2-1.



*



공간에서는 조용한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한쪽에서는 한 무리가 회의 같은 것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의 웅얼거림과 함께 이따금씩 울음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다른 모습의 여러 소리가 기웃기웃 뒤섞이면서 허공을 떠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아주 조용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쉴새 없이 공기가 목소리와 함께 헤엄치고 있었고 종종 천장을 칠 정도로 상승하기도 했다. 그 발랄한 리듬의 공기가 갑자기,



2-2title.jpg
 


{Untangle}

-여름빛물-

완벽한 날 2-2. 안녕




뚝.

 .

차분해지는 것이다. 



뚝.

 .

그 사람에게만 닿으면.




언제부터 이곳에 와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그는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소리들에 전혀 휩쓸리지 않고. 이따금씩 자세를 조금조금 바꾸며. 지금은 뭔가를 계속 쓰고 있다. 뭔가를. 그전에는 책을 읽더니, 묵묵히 타자를 치고 있더니, 그림을 그리고 있더니 지금은 다시 책을 펼치고 뭔가를 말없이 쓰고 있다. 그렇게 지금은 거의 한 시간째 손으로 뭔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뭘 쓰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그와 책상을 비추고 있는 작은 노란 불이 어딘가 다른 세상 같기도 한 차분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가 노란불 아래 앉아있는 시간 내내 공기는 계속 그 사람에게 부딪쳐 차분함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저...지금 무엇을 쓰고 계신가요?"



그는 시선을 그대로 두고 묵묵히 계속 뭔가를 쓰며 말한다.



"마뜨료슈까요"



마뜨료슈까? 나는 다소 복잡한 단어에 다시 물었다.



"마뜨료슈까가 뭔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 책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어렴풋이 뭔지는 알 것 같아요"


"왜 마뜨료슈까를 쓰고 있는 건가요"


"이 책이 그걸 이야기하고 있어서요"



여전히 시선은 이동하지 않은 채 그는 말했다.



"제가 마뜨료슈까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거예요?"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 자리를 뜨려는 찰나 그가 갑자기 말한다.



"제 안에 얼마나 많은 제가 있을까요? 제가 과연 한 사람일까요"


"...그게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늘 제가 결코 한 사람일 리가 없다고, 그렇게 느꼈어요. 왜냐하면, 저는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시간에 따라 계속 변하거든요. 정말 부정할 수가 없어요"


"음...그렇다면 지금의 당신도 어제의 당신과 다를 수 있나요?"


"그건...흠, 생각해보면 저는 어제부터 여기 와있었거든요, 그래서 어제의 저와 오늘의 저는 상당히 닮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마도 같은 것 같아요. 다르다면 이틀 전 조그만 방에서 공기 아래를 기어 다니는 눅눅함을 홀짝거리며 살던 저와는 확실히 다른 것 같아요"


“...그렇군요"



나의 이해보다 그의 생각이 앞서는 대화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틀 전과 지금의 당신이 다르다는 의미인 것은 알겠다.



"아, 아니에요 제가 마뜨료슈까 같다고 한 말은 잊어주세요"


"왜죠?"


"그럼 바다를 배신하는 것만 같거든요"


"바다요?"


"어제 기필코 바다를 갔어요. 바다의 수평선을 봐야 했거든요."


"왜 봐야 했나요"


"봄에 생각 없이 바다를 보면서 아,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나라는 존재가 가진 경계 같다는 생각을 해버렸는데, 다시 일상을 살다 보니 의심이 되는 거예요, 정말 바다 수평선의 경계가 모호했을까?"


"바다와 하늘의 수평선 경계가 모호한가요?"


"네, 저는 그러던걸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어요."


"음...사실 바다를 보러 갈 때 바다 수평선을 그렇게 자세히 보지는 않아서요"


"그럼 한번 가서 확인해 보는 건 어때요, 왜냐하면 저는 다른 사람 시선에는 어떻게 보일지 너무 궁금해요"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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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앞서나가는 그의 말에, 나는 이해를 다 하기도 전이지만, 일단 대답했다.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의 경계가 도대체 어떤 모습이지. 모호했던가.



"얼핏 보면 딱 갈라져 있는 것 같잖아요. 근데 자세히, 자세히 선명한 경계선을 찾으려고 하면 오히려 뿌연 안개만 보이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랬어요"



신기할 정도로 그는 대화하면서 손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덧 다음 장으로 넘어가고 위를 조금 채우더니 딸깍, 하고 펜을 내려놓는다. 그는 그제야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처음으로 눈을 마주친다. 대화하면서 상대의 얼굴을 이토록 늦게 알게 되는 것도 처음이었다. 



"휴, 아마 삼십 분 동안 이걸 쓰고 있던 것 같네요"


"음...제가 보기에는 한 시간은 흘렀는걸요?"


"정말인가요? 한 시간이 흘렀나요?"



네, 나는 핸드폰 화면을 띄워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나만 겨우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놀란 표정을 짓는다. 



"저는 반 시간이 흘러갔는데, 여기는 한 시간이 흘러갔군요"


"... 그게 무슨 말이죠"



나는 조금이라도 그의 생각을 같은 속도로 이해하고 싶어서 질문한다. 이상한 대화라고 생각되면서도 계속 머물고 싶어지는 이상한 대화였다.



"말 그대로예요, 저는 반 시간이 흘러갔는데 세상은 한 시간이 흘러갔다고요"


"음...그렇군요"



이해가 되지 않지만 일단 그렇다고 대답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있나요?"


"...예?"


"흠, 한번 생각해보세요"



나의 시간? 나의 시간이 뭐지. 나의 시간이 뭐냐고 묻는 나는 대체 뭐지.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의 질문에 정신을 차렸다.



"더 궁금한 게 있나요?"


“아...그...왜 처음에는 마뜨료슈까가 당신 같다면서 왜 지금은 아니라고 한 건가요?"



나는 이 이상한 대화에서 겨우 이해된 내용을 물어본다. 궁금한 게 없다고 하면 대화를 끝낼 수 있었을 텐데 대체 왜 물어보고 싶었던 걸까.



"흠...첫번째는 아까 말한 바다를 배신하는 기분이 들어서고요. 생각해보니 정말 순진한 이유네요"


"두 번째가 있나요?"


"두 번째는 이 책에 담긴 마뜨료슈까 이야기가 끝에서는 속에 아무것도 없대요. 알맹이가 없대요. 마뜨료슈까가. 결국엔"


"...그...렇군요"


"저는 제가 알맹이 없는 사람이 되길 바라지 않아요"


"근데 정말...없으면 어떡하실 건가요?"


"없으면요?"



나는 던져 놓고 괜한 말을 던진 건가 싶었다. 사실 뭔 이야기를 하는지도 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질문이 정신 차리기도 전에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지금의 저는 없다고 해도 믿지 않을걸요. 없다면 알맹이를 만들려고 난리를 치고 있겠죠"


"지금의 당신이라면, 앞으로의 당신은 또 다른 대답을 할 거라는 건가요?"


"그렇죠, 저는 아직 어린 냄새만 나는 새파란 새싹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만 그렇게 믿는다면요"


"그럼 그런 거겠죠"


"그렇군요"


"누가 보면 저 사람 혼자서 네버랜드에 갇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그만큼 아직 더 많이 보고 받아보고 들어보고 싶다는 의미에요."


"무엇을요?"


"음, 새싹이니까 햇빛과 물이면 좋겠네요"


"그게 무슨 의미죠?"


"더 성장하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예요"



묘한 침묵이 이어진다. 나는 문득 정신이 든다. 그와 대화를 하다 보니 그만의 공간에, 그 세계에 정말 빨려 들어간 것만 같았다. 차분하게 추락하는 공기의 경계가 나에게까지 들어찼다. 그러다 그의 질문에 나는 잠시 그 경계에서 깨버렸다.



"지금 몇 시죠?"


"다섯 시가 넘었네요, 다섯 시 오 분이요."


"말도 안 돼요, 저희가 이 대화를 지금 삼십 분 동안 한 거라는 말인가요"


"어...그렇게 되네요"



삼십 분? 나조차도 놀랐다. 그만의 시간에 정말 빨려 들어간 걸까.



"이제 당신은 뭘 할 건가요?"


"어...글쎄요"


"당신도 저처럼 아무 계획이 없군요"


"그럼 당신은 무엇을 할 건가요"


"저요? 배고프면 맥주를 마시러 가려고요"


"그게 다인가요"


"네, 다예요"


"그렇군요"


"심심하면 같이 맥주나 마실까요"


"글쎄요"


"흠, 마음대로 하세요. 그게 최고니까”



아이의 울음소리에 추락하던 공기가 뚝 멈춰버린다. 그리고 한없이 차분하던 그의 주변마저 급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나와 그는 놀라며 아이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다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눈웃음과 함께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다. 나도 얼떨결에 그렇게 했다. 


맥주? 갑자기 맥주가 당긴다.


아이는 계속 울었다. 아이의 부모가 아이를 달랜다. 다시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높은 공기가 다시 차분함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그는 노트와 책을 밀어 놓고 다시 타자를 치고 있었다. 한 공간에 지나치게 높은 공기와 지나치게 낮은 공기가 함께 숨 쉬고 있었다. 저 사람, 이번에는 뭘 쓰는 걸까, 하루종일 뭔갈 쓰고 있는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는 이 공간을 나갈 때까지 줄곧 그러고 있었다.



*



"이상하다, 문이 안 열려있네요"


"그럼 어떡하죠"


"어쩌긴요 못 마시는 거지"


"다른 갈 만한 곳은 없나요"


"글쎄요 아무 계획이 없어서"



그는 어제 마셨던 곳이 좋아서 다시 왔다고 하는데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나 또한 계획이 없어 가만히 있었다.



"배도 안 고프니까 그냥 안 먹을래요"


"그런가요"


"사실 이제 와서 뭘 먹을지 고민하는 것도 귀찮아요. 큰일이네요"


"무엇이요?"


"저는 밥을 안 먹으면 어지럼증이 오거든요"


"그럼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귀찮아요...저는 쉬러 왔지 먹으러 온 게 아니에요"



쉬러 왔기 때문에 밥 먹는 건 계획에도 없다니, 이상한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당신 이상한 사람 같아요"


"제가요?"


"네, 왜 아무 재미 없는 저와 시간을 더 보내겠다고 하신 건가요”


"..."



생각해보니 나도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냥, 당신과 대화하면 아무것도 모르겠어서 차분해지거든요"



그냥 대놓고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래요? 그럼 당신 저와 맞는 것 같네요"



네? 속으로 외쳤다.



"그렇다면 당신과는 이런 대화를 계속해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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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웃으면서 말한다. 가게를 뒤로하고 다시 걸어가는 그를 말 없이 따라갔다. 터벅터벅. 하늘은 먹구름이 다시 몰려와 있었다. 밤에 비가 올 것 같기도 하다. 아까는 지나치리만큼 공기를 차분하게 추락시키던 당신은 먹구름 아래에서는 유독 밝아 보인다.



“있잖아요"


"?"


"당신과의 대화를 다른 이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요"


"...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요"


"풉, 이제서야 솔직하시네요"


"다른 사람들이 보기는 할까요"


"제가 글로 남긴다면요, 아마 누군가는 보겠죠"


"글을 쓰고 계시는군요"


"당신도 글을 쓰시잖아요"



맞긴 맞는데 아무래도 당신은 나와 전혀 다른 글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



"이 대화를 글로 남기면 지나치게 짧고 길어질 것 같아요, 그럼 편집할 때 고민이 되는데..."


"짧으니까 길어도 괜찮아요"


"그럴까요?"


"그러겠죠"



나는 대충 대답했다. 내가 뭔가를 이러쿵저러쿵 말해도 그는 자기 맘대로 글을 쓰든 말든 할 것이었다. 우리는 먹구름 아래를 계속해서 걷다가 계단을 올라가 노랗고 차분한 공간에 가서 앉아버렸다. 아까 처음 만난 그곳에서 그를 비추던 빛도 이런 노란색이었다. 침묵해야 할 것만 같은 노란색. 그를 위한 침묵, 조용함을 위한.



"당신도 글을 쓰는 사람이니 하나 물어보고 싶어요"


"무엇인가요?"


"글을 꼭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써야 할까요"


"흠...그건 어떤 글인지에 따라 차이가 있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그렇네요. 저는 작품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글을 쓰고 있어요 그림과 함께"


"글이 그림을 해석해주는 건가요"


 

글을 그림과 함께 쓰고 있다는 그의 말에 떠오르는 대로 물어보았다.



"정말 어려운 질문이에요, 왜냐하면 저는 제가 좀 특이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왜죠?"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풀어내는데... 제 이야기인지 그림 이야기인지 분간이 안 가요. 그리고 계속해서 풀어내는데 선명한 게 하나도 없어요”


"정말... 특이하네요"



맞장구 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그가 한 말을 반복했다. 



"그래서 제가 모호한 사람인가 봐요, 사실 저도 절 모르겠어요"


"...'나'라는 존재를 완벽히 파악하는 게 가능할까요"



물어봤다.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궁금해졌기에.



"당신 정말 저 같아요"


"그런가요?"


"어떻게 그렇게 불친절하게 어려운 질문만 하시는 건가요"


"그 말은 당신이 불친절하다는 의미인가요"


"네, 제 글은 언어를 마구 쏟아내면서 선명해지려고 닦기는커녕 흐리게 문대기만 하거든요."



당신은 살짝 이마를 찌푸린다. 짧게 한숨을 내쉰다. 아마 남들 시선에는 그럴 거예요, 차분한 공기 뒤섞인 목소리를 대충 떨구듯이 그는 덧붙였다. 나는 묵묵히 앉아있었다. 노란 불 아래서 이따금씩 그의 알 수 없는 차분함에 압도당하는 기분이 왠지 모르게 들면서.



"질문에 답하자면, 저는 불가능할 것 같아요. 저는."


"..."


"왜냐하면 지금의 저는 앞으로의 저를 전혀 모르는걸요. 지금도 당장 한 시간 앞의 저를 모르는 것처럼요"


"앞으로의 나를 알아야 나를 완벽하게 아는 걸까요?"


"왜냐하면 앞으로도 저는 존재하기 때문이죠, 그것도 부정할 수 없는 존재잖아요"



왜냐하면,이라는 뭔가 대답을 생략한 듯 당신은 대답했다. 앞으로의 나... 한번 속으로 읽어 본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잠시 침묵을 깨고 그가 덧붙인다. 나는 슬몃 고개를 끄덕였다.



"휴, 머리가 복잡해졌어요, 그래도 밥 뭐 먹을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훨 낫네요"


"죄송해요 괜한 질문을 한 것 같네요"


"아니에요, 정말 즐거웠어요"



한번도 궁금해 보지 못한 즐거움의 정의가 궁금해져 버리는 대답이었다. 또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노란 불 아래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그냥 든다. 덩그러니 놓여져 어색할 침묵이 다른 침묵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저 이제 옷 좀 갈아입고 씻어야겠어요, 혹시 대화를 더 하고 싶으시면 기다려주시겠어요? 아, 물론 강요는 아니구요 가셔야 하시면 가셔도 좋아요"



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나는 잠자코 그를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나는 고민했다. 갈까, 말까. 마음대로 하는 게 최고라는 그의 말이 떠올라 그냥 마음가는대로 하기로 했다. 그래서 일단은 노란 불 아래에 머물기로 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아서. 그냥 마음이 그렇게 갔다. 



*



"오, 아직도 계셨군요"



그가 웃으며 걸어 나온다. 편한 반바지, 반팔티에 머리에 수건을 감고 있었다. 얼굴에 뭔가 덜 발렸는지 뺨과 턱선 주변을 문지르며 나오고 있었다.



"좋네요, 씻으면서 당신과의 대화를 다시 생각해봤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즐거운 대화였던 것 같아요"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뜬금없는데 한 가지 물어보고 싶어요"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이 대화를 읽으면 이 글이 여행 기록이라고 믿을까요?"


"그것이 걱정이라면 여행 기록이라고 당신이 말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네요, 그래야겠어요"



그의 질문에 그제야 나는 그가 여행 온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대화만 가득한 여행. 그렇게 생각해보니 어쩌다 내가 그의 여행의 큰 일부가 돼버린 것만 같다. 대화만 있는 여행, 그런 여행이 있구나. 있구나 라고 외치지만 느낌표는 하나도 없다. 새삼 무미건조하게 생각해본다. 그러는 사이 그는 책 한 권을 들고 온다.



"아직 이 책을 다 못 읽었어요, 마저 다 읽으려구요"


"엄...그럼 저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요..."



그냥 돌아갈까요? 라고 물어보려던 찰나에, 그럼 같이 읽자고 하는 당신이다. 나는 그러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밤 10시 14분.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는 책에 푹 빠져있었다. 아까 처음 만났을 때 보고 있던 책을 마저 다 읽고 나서도, 벌써 두 권을 더 읽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추천받은 책이라며 잠깐 읽었는데 재미있었다고 한다. 글이 아니라 만화책이었는데, 슬쩍슬쩍 함께 읽으며 그가 이 책을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줄곧 망설이다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요?"


"열 시가 넘었어요"


"네? 정말요?"



나는 핸드폰 화면을 켜고 그에게 보여줬다. 몇 시간 전의 모습이 스쳐 간다. 그는 정말 놀랐다, 아까 낮보다 더.



"아, 아쉬워요 이제 책 읽는 게 재미있는데"



여기는 11시에 소등이었다. 나도 이제 가야 할 것 같았다.



"저는 이제 가보겠습니다"


"....그래요, 너무 아쉽네요. 당신과 함께하는 게 정말 즐거웠는데"


"저희 그냥 대화만 하고 말없이 책만 읽었는데도요?"


"네, 당신이 곁에 있어서 즐거웠어요"


"제가 있어서요?"


"당신을 만날 수 있던 건 제가 이 시간과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정말 기적 같았으니까요!"


“...그런가요"



당신은 미소를 지었다. 이곳을 비추는 노란 조명의 차분함은 어디 가고, 응어리진 공기가 살짝 올라오며 그 속에 그의 미소가 들어찼다. 마음에 괜히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대답은 여전히 아무 감정이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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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조용한 틈 사이 바깥에서 울리는 빗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오늘이 완벽한 날이었나요?"


"네?"


"저의 오늘이 완벽한 날이었는지 당신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당신의 오늘을 왜 제게 묻는 거죠?"


"왜냐하면 오늘이라는 여행 내내 당신과 함께했잖아요"



나는 당황스러웠다. 생각해보니 오늘 내내 함께했던 건 사실이었다. 별일 없었지만. 오늘 질문 중 제일 어려운 질문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당신이 상처받지 않을까 고민이 된다. 괜히. 말은 대충 내뱉던 몇 시간 전과 달리 조심스러워졌다. 상처받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상처받지 않을, 않은 존재인 것 같기도 했다. 간신히 입을 열어보았다.



"저는...당신의 오늘이 완벽한 날이었으면 해요"



어쩜 이렇게 애매한 대답을 해버릴 수가,



"...그런가요"


"..."


"...완벽한 날이었어요."


"...왜죠?"



그의 한마디에 앞선 질문을 누가 대답했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선 궁금했다. 왜 그의 오늘이 완벽했는지.



"당신과 대화했기 때문이죠"


"그뿐인가요"


"그뿐이에요. 그래서 오늘 맥주 마시러 가려던 것도 갑자기 못하게 된 것마저도 완벽했어요"


"..."


"당신과의 대화에 조금 더 마음을 둘 수 있었으니까요"



대화만으로도 완벽했다라. 오늘 동안 있던 대화를 다시 떠올려보니 아마 당신은 공간과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아마 대화가 필요했던 사람이었던 걸까. 존재였던 걸까. 감사하게도 내가 유일하게 그 대화에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었던 걸까. 감사하게도? 유일한? 왜 그런 생각이 든 걸까. 생각이 길어졌고 침묵도 길어졌다. 빗방울만이 창문을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톡톡톡.



"당신은 언제 돌아가나요"


"저요?"



내가 언제 돌아가냐고?



"저는 저인데요"


"아, 그렇겠네요"



나만 이해할 수 없던 시작에 있던 대화와는 전혀 달랐다. 어쩌면 나도 그의 세계 속에 포함된 것일지도 모른다. 차분하고 알 수 없는 그런.



"가실 건가요"


"가야죠"



그는 조금 슬퍼 보였다. 하지만 나는 가야 했다. 문을 열려는 찰나 그가 나를 다시 부른다.



“있잖아요"


"네"


"당신, 꼭 행복해야 해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많이 웃어주세요. 숨도 쉬고, 가끔은 저를 떠올려주세요. 힘드실 때마다"


"..."


"아... 제가 말이 너무 많았죠. 당신 정말 소중한 사람이에요"



이번엔 내가 미소지었다. 그의 말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이유도, 모두.



"고마워요"


"잘 가요, 저희 다시 만날 날이 또 왔으면 좋겠어요"


"물론이죠"


"기다리고 있을게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과 또 만나 대화하는 순간이 올 수 있을까. 이제는 습관처럼 시계를 뒤늦게 확인했다. 반 시간이 흘렀다. 이번에는 나도 그의 시간에 포함된 채로. 그의 시간은 아직 반 시간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선연히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게 그도, 나도 같이 느꼈기 때문에. 어쩌면 오늘은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고 이상한, 세상과 달리 차분한 그런, 음, 생각과 감정이 복잡미묘하게 섞여버렸다. 거기에 창문 밖을 가득 메우는 여름비 소리도 뒤섞여 버린다. 은은하고 차분한 노란 불이 몰래 새벽빛의 비를 맞으며 울린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게 했네요"


"아니에요, 그럼 돌아가겠습니다"


"비 많이 오니까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고마워요"



노란 불이 꺼져야 하는 20분 전. 나는 문밖으로 나왔다. 노란 불. 노란 불. 이제는 어디서든 당신을 만나면, 적어도 떠올리면 이 노란 불이 떠오를 것 같다.


...


완벽한 날이었다.





*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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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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