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log] 책표지에서 만난 그림

글 입력 2018.11.16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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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떠올려보자.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몇몇은 인상 깊었던 구절, 등장인물, 개인적인 추억이 생각나겠지만 대부분은 책의 실물과 겉표지의 생김새, 일러스트를 가장 먼저 기억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같은 책을 읽었지만 다른 느낌으로 추억한다. 『어린 왕자』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출판사의 수많은 버전으로 출판되었고 우리에게 각각 다른 표지와 삽화로, 누군가에겐 그림 없는 줄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엔 색연필로 그린듯한 바보 같은 어린 왕자가 자신의 소행성 B612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남색 배경에 은색 실로 장식이 되어있는 표지는 딱딱한 하드커버 재질이었고 손톱으로 긁으면 도르륵 소리가 나서 그 책의 질감을 특히 좋아했던 것 같다.


이 외에도 서너 가지의 『어린 왕자』를 더 읽어봤지만 나에게 어린 왕자는 이 책이다.


은색 실이 반짝이고 도르륵 긁을 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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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고 보니 소설의 이미지라는 게, 단순히 내용만이 아니라 내가 집어들었던 그 책의 모든 것으로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책의 내용이 중요하지 부피나 크기, 색깔 같은 것은 상관없다 생각했는데, 무의식적으로 책의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모양이구나, 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중 흥미를 끄는 것은 세계문학 전집이다. 고등학생 시절 도서관에 들어서면 내 발걸음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내가 그것들을 가장 좋아했던 첫 번째 이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명작이라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현대가 아닌 다른 시간에 갇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바로 내가 지금 말하려는 것이다.

 


책표지 속 명화의 적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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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6펜스』에 드러난 찰스 스트릭랜드의 삶은 폴 고갱의 삶과 비슷하다. 실제로 작가가 이 소설의 모티브를 그에게서 가져왔기 때문에, 달과 6펜스는 마치 폴 고갱의 각색된 전기와도 같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당연하게도 서머싯 몸의 이 소설엔 항상 폴 고갱과 관련된 그림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생김새에 대한 상상이 어려워지긴 하지만, 뭔가 '잘못된' 표지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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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날 출판사에서 출간한 단테 알레기에리의 『신곡』의 표지엔 중세 시대 화가인 두오모의 그림이 걸려 있다. 재밌게도 이 그림에서 단테가 들고 있는 책은 바로 『신곡』이다. 신곡을 들고 있는 단테 그림으로 장식된 단테의 신곡, 마주한 두 거울이 무한대로 반복하는 느낌이라 유독 재밌다고 느껴진 표지였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책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지가 아닐까.




햄릿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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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하게도 민음사에서 출판한 『햄릿』은 표지에 존 에버렛 밀레이의 작품 <오필리아>가 있다. 오필리아가 햄릿과의 실연, 아버지의 죽음으로 자살하는 장면은 물론 책 속에 있는 내용이지만, 왜 주인공이 아닌 그녀를 표지에 등장시켰을까?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명대사는 현실에 수긍하는 삶과 진실을 밝히는 대담한 죽음 사이의 고민을 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음의 무지가 주는 두려움이 삶의 고통만큼이나 강하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 <오필리아>에는 상징적 의미가 담긴 꽃과 나무들이 여기저기에 들어가 있는데, 우측 강기슭의 나뭇가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숨겨진 해골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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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은 죽음을 의미하는 상징물로 자주 쓰인다. 특히 17세기에 유행한 바니타스 정물화에서 해골은 자주 등장하는 요소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즉,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점을 상기시켜 인생의 덧없음을 나타낸다.


햄릿에는 수많은 죽음이 나온다. 햄릿의 아버지도, 폴로니우스도, 오필리아도, 레어티즈도, 거트루드도, 클로디우스도, 햄릿도 결국은 죽는다. 그 죽음의 이유가 무엇이건 죽음은 한순간에 찾아오고, 그 삶이 어떤 삶이건 끝내 마무리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햄릿』과 <오필리아>를 다시 바라보면 죽음을 논하고 있다는 밀접한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 실격』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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왠지 모르게 어떤 표지는 책에 착 붙어 떨어지지 않고, 어떤 표지는 살짝 떠서 한눈에 책을 못 알아보게끔 한다. 떼려야 뗄 수 없이 밀착된 표지들은 책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나곤 하는데, 이는 내 어린 왕자처럼 개인적인 느낌일 수도,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느낌일 수도 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은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다. 『인간 실격』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도 이 표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표지에 끌려 책을 읽게 되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표지로 쓰인 에곤 실레의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을 보고 『인간 실격』을 먼저 떠올렸다고 말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작품들과 달리 책과 표지 그림에 큰 연관이 없는데도 『인간 실격』은 그 자체로 완성된 표지, 주인공의 모습 같아 보인다.

 



가볍디가벼운 존재에 관하여



또 한 가지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 서점을 돌며 찾던 책이 있는데, 바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러나 나는 몇 년 전과 달리 바뀐 표지를 만날 수 있었는데, 꽤나 아쉬운 부분이었다.


검색을 통해 알게 된 내용으로는 2013년 민음사에서 총 15권의 밀란 쿤데라 전집을 출간했는데, 이 표지들을 전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으로 선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최근 2018년 6월, 리뉴얼 버전이 또 출간되어 총 3가지의 책이 존재한다고 한다. (사실은 1988년부터 3권이 더 존재하나, 이 책들은 시판 중이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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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사람에 따라 각각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열대>, 르네 마그리트의 <중산모를 쓴 남자>, 그리고 밀란 쿤데라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로 이 책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래도 자기가 읽었던 버전의 표지를 가장 익숙하고 적절하게 느끼겠지만, 나는 뒤의 두 권보다 <열대> 버전에 큰 애착을 가진다. 마그리트 버전은 작가가 직접 마음에 든다고 인터뷰했고, 심지어 일러스트 버전은 작가가 직접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열대>는 피카비아의 작품에서 그리 유명하지 않은 편에 속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구글에 이미지 파일을 검색하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표지'라는 결과와 함께 책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떴다. 당연히 읽기 쉽게 설명된 작품 해설은 찾을 수 없었고, 나는 직접 가능한 방법들을 동원해 이 작품의 의미를 알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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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라는 번역된 제목을 들었을 때는, 작품에서 열대적 요소나 분위기를 볼 수 있긴 했지만 솔직히 그리 적절한 제목은 아니라고 느꼈다. 그래서 찾아본 작품의 원제는 <Torrid Zone>, 뜨겁다는 의미 외에 영어로 torrid는 격정에 찬, 열렬한, 몹시 힘든 이라는 뜻을 갖고 있고, 피카비아의 모국어인 프랑스어torride는 관능적인 이라는 비유적 의미도 갖고 있다. 나는 아마 이런 복합적인 의미를 포함해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즉, 이 그림은 관능적이고 열렬한 분위기에 싸여져 있는 듯하다.


그러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토마스와 사비나가 여러 명과의 애정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자유를 원하고, <열대>의 두 남녀가 키스하고 있지만 얼굴의 수많은 눈들이 각자 다른 곳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연관성이 있어 보인다. 결국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인간 삶의 가벼움이 이런 것이라는 말이다. 안정적인 관계와 진지한 사랑을 추구하더라도 모두 다 잠깐 스쳐갈 인생이고, 인간은 영속적인 존재가 아닌 금세 사라져버릴, 가볍디가벼운 존재라는 점을 이 소설은 강하게 인식시켜준다. 책을 펼치기 전 바라본 정열적인 연인의 모습은 책을 덮고 나서 달리 보일 것이다. 나는 이 개인적인 인상의 반전이 이 책 표지가 주는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


그래서 나는 이런 책들의 표지를 좋아하고, 표지는 책을 읽는 즐거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책을 위해 제작된 일러스트 표지가 많은 편이지만, 책이 쓰이기 전이나 책과 상관없이 그려진 그림이 퍼즐처럼 적절하게 들어맞을 때를 보면 그 즐거움은 배가 되는 것 같다. 특히나 예술을 공부하는 나에게 책표지에서 만난 그림은, 반가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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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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