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과 괴물, 같고도 다른 소망 [공연예술]

뮤지컬 '프랑켄슈타인' 리뷰
글 입력 2018.11.17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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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겨울, 신당역에 위치한 충무아트홀(현: 충무아트센터)에서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막이 처음 올랐다. 화려한 무대와 매력적인 캐릭터, 결말로 치달을수록 요동치는 감정까지, 창작극에 대한 일말의 편견을 날려버리는 퀄리티의 뮤지컬이었다. 그 후 4년이 흐른 2017년 여름에도 어김없이 관객들 앞에 찾아왔고, 찬바람이 불어오는 11월 현재에는 부산에서 공연을 앞두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을 가장 잘 설명하는 문구는 초연 카피인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 인간을 동경한 괴물’이 아닐까 한다. 메리 셸리의 동명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원작으로 캐릭터를 손 보고 줄거리를 수정해 인간과 괴물의 관계에 초점을 둔 뮤지컬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원작에서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 홀로 괴물을 창조해내지만, 공연에서는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이하 빅터)의 절친한 친구 앙리 뒤프레(이하 앙리)가 그의 연구를 돕는다는 차이도 있다. 결국 이 공연에서는 빅터와 앙리, 그리고 괴물 세 인물의 관계가 극을 이끄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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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배경인 19세기 유럽은 과학 혁명 아래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변화는 언제나 혼란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인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고뇌가 담긴 소설이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이 발행된 후 약 90년 후인 1932년,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를 세상에 내놓았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SF가 유행처럼 번진 건 19, 20세기 유럽이 얼마나 큰 혼란에 빠져 있었는가를 증명한다. 신을 동경하며 생명을 창조하려 한 빅터가 정말 그의 꿈을 이루고 신이 되었다면 이 작품은 그다지 큰 매력이 없었을 수도 있다. 작품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인간다운 인간’을 역설한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다시 공연으로 돌아와 보면, 이 작품은 초연에서 재연, 그리고 올해 3연까지 거치며 크고 작은 변화를 거쳤다. 초연에서는 빅터의 후회를, 재연에서는 빅터의 미련을 주로 보여주었다가 이번 3연에 오면서 일종의 절충 내지는 완성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넘버를 추가하기도, 삭제하기도, 다시 추가하기도 하고 장면을 바꾸고 연출을 수정하기도 했다. 수정의 이유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개연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초연부터 “작품에 개연성이 부족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은 꾸준히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이 뮤지컬이 사랑 받는 이유는 캐릭터의 매력과 그 관계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위님은 신을 믿지 않으십니까?”

“아니, 나는 믿어. 그것도 아주 지독하게. 하지만 내가 신을 믿는 건 축복을 통해서가 아니야, 저주를 통해서지. 만약 신이 아니었다면 누가 이 세상을 이런 지옥으로 만들 수 있었겠나.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과학은 먼 미래를 열자는 것이 아니야, 지금 당장을 바꾸자는 거지. 죽음, 지옥, 운명, 저주. 이런 미신들의 속박에서 벗어나 좀 더 훌륭한 인간의 세계관을 만들고 싶네.”


  

빅터와 앙리가 처음으로 손을 맞잡던 장면에서 빅터는 자신의 커다란 포부를 당당히 밝힌다. 훌륭한 인간의 세계관을 만드는 것. 죽음을 정복하고자 했던 인간이 생명 앞에서 무너지는 모순이 이 작품의 매력이다. 자신의 욕심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잃고, 결국 유일하게 남아 있던 자신의 피조물까지 잃어가며 빅터는 무엇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앙리는 어째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빅터의 꿈을 응원한 것일까. 피조물은 인간을 그토록 증오하면서 어째서 빅터에게 마지막까지 기회를 준 것일까. 생각해 볼 점이 많은 작품이다.


“위대한 생명창조의 역사가 시작된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

“당신의 피조물이 겪어야했던 이야기.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존재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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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이 두 가사의 멜로디는 동일하다. 전자는 빅터가 피조물을 창조할 때 근엄하게 외치는 말이라면 후자는 피조물이 빅터에게 돌아와 제 비참함을 호소하는 말이라는 점을 볼 때 가사의 내용은 완벽히 반대라는 걸 알 수 있다. 완전한 반대, 신과 인간, 인간과 괴물이 외치는 악상은 같다는 것. 결국은 빅터나 피조물 모두 처절하게 외로운 존재였다는 것. 극에 막이 내려간 후 모든 인물에 동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 괴물이 있었네. 그저 상처 속에 살던. 저 세상 끝 그곳엔 행복, 그런 게 있을까.”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 북극의 가장 높은 곳에서 괴물은 행복을 보았을까.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오로라는 괴물이 눈을 감은 후에야 하늘에 수놓아졌다. 지독히도 운 없는 존재, 탄생했을 때부터 저주를 감고 나온 존재의 말로를 보며 빅터는 앙리를 보았을까. 세상 끝 그곳엔 모두가 웃을 수 있는 낙원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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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서문에는 존 밀턴의 <실낙원> 속 구절이 실려 있다. 괴물과 빅터의 낙원은 어디일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절대 서로 다른 낙원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창조주여, 흙으로 나를 인간으로 빚어 달라고 내가 간청하더이까? 어둠에서 끌어올려달라고 애원하더이까? 내 뜻이 내 존재에 맞지 않으니 나를 본래의 흙으로 돌려보냄이 옳고 마땅하리다. (존 밀턴, <실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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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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