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이 땅의 모든 흰개미들에게, 연극 <사막속의 흰개미> [공연]

진실을 외치는데, 정작 그 대상은 들은 체도 안했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들에게.
글 입력 2018.11.19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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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밑에 흰개미들이 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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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 무대 일부



일요일 오후와 어울리지 않는 스산한 바람이 불던 11일, 세종S씨어터의 개관기념작인 연극 <사막 속의 흰개미>를 만났다.


100년 된 고택과 그 속에 얽힌 비밀, 뭔가를 감추려는 사람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끌릴 법한 시놉시스를 자랑했기에, 을씨년스러운 날씨는 오히려 극에 대한 기대를 증폭시켰다. 아, 어떤 이야기, 어떤 인과관계, 어떤 자극적인 사건들이 일어날까! 더구나 내 자리는 무대 바로 옆, 아니 무대와 경계가 없었으니 무대 위의 의자라고 해야 할까, 배우들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감상할 수 있는 자리였다.


흰개미 서식지를 찾아다니며 연구하는 ‘에밀리아’의 연구 발표로 극이 시작되었고, 처음부터 다소 낯선 얘기들을 늘어놓는 그녀 덕에 ‘아, 이해하는 데 애 좀 먹겠는 극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사막 속의 흰개미>는 아주 명쾌한 주제를 가진 연극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냥 내 삶을 통째로 투영해보게 해 이입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연극이었다. 적어도 나는 진실을 외치는데, 정작 그 대상은 들은 체도 안했던 경험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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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속엔 수많은 갈등이 나온다. 흰개미가 있는지 조사해봐야 한다며 집을 들쑤시는 연구원들과 석필, 석필과 그의 어머니 현숙, 석필과 의문의 여인 지한, 그리고 석필과 그의 환상 속에 사는 아버지 태식과의 갈등까지, 계속해서 갈등으로만 서사가 진행된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반적으로 대립과 갈등의 연속은 지켜보는 이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명백히 구분지어야 할 지점이 있다. 과연 싸우는 이가 그저 고성을 지르고 행동이 공격적이기 때문에 불편한 것인지, 아니면 한 쪽에게 몰입해서 그 사람이 받는 감정적 고통을 함께 고스란히 느끼기 때문인지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극의 의미 해석이 갈린다.

  

사실 나는 전적으로 후자의 경우다. 앞서 말했듯 극에는 여러 갈등들이 나타나지만, 나는 이 갈등들 모두가 ‘지한’의 얘기에 관객들이 귀를 기울이도록 짜여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기억나지 않느냐’는 얘기를 반복하며, 자신을 기억하는 석필의 모습이 어이없다는 듯 허탈한 미소를 남기기만 했던 지한. 그녀가 내 쪽으로 가까이오자 나는 그녀의 얼굴이 눈물 범벅이라는 걸 비로소 알아챘다. 15년 전 어느 날, 바로 이 고택에서, 석필의 아버지에 의해, 그녀는 끔찍한 일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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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른 갈등들이 지한의 이야기에 또다시 포커스를 맞추도록 관객들을 이끄는지, 대체 흰개미는 어떤 의미로 사용된 제재인지 살펴보자. 극의 전반에 걸쳐 연구원들ㅡ팀장인 윤재는 제외한다ㅡ과 석필의 대립이 계속해서 나타나는데, 이는 흰개미와 석필의 가족의 대립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흰개미는 자연의 섭리에 의해 수분을 찾아 모여든 것일 뿐이지만, 석필 일가는 흰개미들을 ‘박멸의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흰개미들이 살 만한 환경을 만든 건 바로 그 고택의 주인들이었다. 우물을 막아 고택 너머 마을은 건조하게 만들고, 우물 밑에 고여버린 물은 흰개미가 그 곳을 찾아오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싹 다 죽여버려.”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난 건지는 중요한 화제가 아닌 것이다.

 

우습게도 이 일가 내부에서도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난다. 석필은 아버지가 저지른 온갖 추악한 짓들을 해결하겠다고 나섰다. 아버지와 같음을 부정하고, 사과할 것이며, 보상도 해줄 계획이란다. 높은 담벼락의 넓디 넓은 저택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사모님, 석필의 어머니는 당연히 이 이야기가 달갑지 않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저들에게 내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일까. 아무리 소리쳐도 듣지 않는 석필에게, 마침내 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아버지들이 이어온 그 습성을 버릴 수 없다고.


그리고 실제로 석필은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애를 썼지만 그는 자기에게 투영된 아버지의 모습을 지워내는 데 실패했다. 지한에게 “왜 이제와서”, “왜 말하지 않았어” 따위의 말들을 늘어놓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아버지는 죽었다. 그러나 석필은 아버지를 죽이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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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르르 떨리는 입술, 눈물로 얼룩진 얼굴, 울음을 토해내는 듯한 말투의 지한은 관객으로서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힘든 캐릭터였다. 그런 그녀가 미소를 띠던 장면이 드물게 있었다. 지한은 에밀리아로부터 이 저택 밑에, 그들이 딛고 있는 땅 밑에 흰개미들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연구 장비를 통해 흰개미들의 날갯짓소리를 실제로 ‘듣는다.’ 마침내 흰개미들의 존재를 확인한 지한은 무척이나 신기해하며, 이곳에 뿌리를 내린 그것들이, 그리고 끊임없이 날갯짓을 하며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그 흰개미들이 “참 용기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이렇게 일단 들어보기만 하면 될 일을, 석필과 그의 일가는 100년동안 차곡차곡 외면해 왔던 것이다. 어떤 일이 터질 때마다 담벼락을 높게 쌓는 것으로 무마하려했지만 끊임없는 생명력은 고택 밖과 안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박멸은 이제 불가능할 것이고, 고택은 무너져 내릴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 대입해서 생각하든 <사막 속의 흰개미>는 명쾌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제 몫이 아닌 부분까지 축적한 권력은 결국 제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생명력을 가진 이 땅의 모든 흰개미들에게로 말이다. 그리고 이 변화를 감지하기 위한 방법은, 바로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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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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