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사막 속의 흰 개미 -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

글 입력 2018.11.20 02:3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Review]
사막 속의 흰 개미
-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


1.jpg


Entropy : 자연 물질이 변형되어,
다시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게되는 현상


자연은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른다. 다들 과학 시간에 한 번쯤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대해 배웠을 것이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은 자연 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매우 기본적인 법칙이다. 거기에 한 가지 법칙이 더 있다. 바로 자연에서 에너지가 흐르는 방향은 일정하다는 것.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기압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에너지의 총량이 큰 곳에서 작은 곳으로 이동하는 현상은 어디서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집약되고 응축되기 보다는 퍼지고 해체되는 것, 그게 자연의 법칙이다.

자세히 설명하거나 이론적인 설명을 가져다 붙이기는 어렵지만, 철학사에서 종종 엔트로피 법칙이 인간 사회와 자연을 비교하는 도구로 자주 쓰이는 경우를 보았다. 간단하게 이해한 바로는 자연 상태는 '섞인 상태' 즉 무질서 상태를 향해서 계속 나아가는 반면, 인간은 자연 법칙을 거슬러 지속적으로 체계를 유지하고 물질을 응축시키려 한다는 말이다. 즉 자연이 섞인 상태를 통해서 안정감을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 인간은 그 속에서 에너지를 투여해 억지로 응집된 불안정 상태를  만들어내 자연을 흔들고 있다는 뜻이다.


2.jpg
 

굳이 엔트로피 법칙을 끌어다 쓴 이유는 이 연극이 인간과 자연의 흐름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프리뷰에서 이 극을 이루는 핵심 개념 중 하나가 '개미지옥'과 '페어리 서클'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개미지옥은 말 그대로 늪과 같은 공간으로, 한 번 빠져들어가면 왠만해선 나오기 힘든 공간이다. 흔히 개미지옥은 개인을 구속하는 너무나 커져버린 사회를 비유하기도 한다. 페어리 서클은 사막 위에 둥글게, 원 형태의 자국이 남아 있는 것으로 이 현상이 어떤 원리로 나타나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아 자연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극은 이 두 개념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자연에서만 나타나는 페어리 서클이 한 마을에 나타나고, 그 마을에는 흰 개미떼가 같이 출몰한다. 자연을 상징하는 흰 개미는 여기서 페어리 서클의 원인으로 등장한다. 마을에는 높디 높은 꼭대기에 혼자 외따로 떨어진 고택이 한 채 있다. 집 자체가 '사회적'으로 명망있고, 그 집에 사는 사람들도 '교회'의 사람들로 마을에서 꽤나 명망 있는 인물로 꼽힌다. 자연의 법칙이 인간 사회로 들어왔다는 설정이 꽤나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3.jpg
 

대형 교회의 목사 석필은 거대한 아버지들의 그림자를 짊어지고 산다. 수 대에 걸쳐 석필의 집안은 대형 교회를 '경영'해왔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검은 행위들을 지속해왔다. 극 중에서 이 검은 행위들이 어떤 일들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단서들을 종합해보았을 때, 우리가 흔히 뉴스에서 접하는 '목사'와 관련된 여러 부정적인 스캔들이 떠올랐다. 교인들에게 돈을 뜯어 낸다거나, 성폭행이나 성희롱 등등 우리 나라의 수많은 교회들은 종교라는 이름 하에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혹자는 한국에서 교회는 인맥관리를 하러 가는 곳이라 일갈하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 교회를 좋아하지 않는 나 역시 부정할 수는 없는 발언이었다. (물론 선한 교회들도 있다는 걸 알지만, 전체적인 이미지가 부정적인 건 사실이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워낙에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런 검은 행위들이 수 대에 걸쳐 일어난 석필의 가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커다란 체계이자 권력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권력의 상징으로 수 대간 고고하기 높은 자리를 지켜온 고택이 존재하고 있다. 무대의 큰 축을 이루는 고택은 인간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문명의 검은 그림자이자,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부정적인 존재이다. 석필은 이런 고택과 자신의 가문이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고자 발악한다. 수많은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그 무게와 압박은 그를 붙들어 매는 개미지옥과 같았다. 빠져 나오고 싶어도 빠져 나올 수 없는 악의 구렁텅이. 석필의 정신적인 갈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요소는 '아버지'의 허상이다. 그의 아버지는 분명 죽었다. 그러나 너무나 생생히 살아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석필은 아버지의 무게에서,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의 집안이 저질러온 비리 속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4.jpg
 


이렇게 개미지옥처럼 그를 옭아매고 있는 '인간 문명의 어두운 그림자'는 자연의 일부인 흰 개미로 인해 파괴되기 시작한다. 극에서 흰 개미는 어딘가가 변하면 그 장소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존재로 등장한다. 흰 개미가 터를 잡고 사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의 법칙이다. 인간만이 존재하던 공간에 자연의 일부가 터를 잡고 들어와 살면서 '부자연스러웠던' 고택은 '자연스럽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물리적인 변화와 더불어 인문적인 변화도 나타난다. 석필의 고택에 한 여인, 임지한이 등장하면서 그의 가문이 쌓아왔던 사회적 명성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성폭행일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지만, 자세한 사건은 사실 잘 모르겠다. 어찌하던 그녀는 석필네 교회의 피해자임이 틀림없었고, 그녀의 등장으로 고택과 함께 교회의 입지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 가지 눈 여겨 볼 점은 개미가 고택에 집을 트고 살기 시작한 이유이다. 고택엔 우물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 우물을 막았고, 우물이 막히면서 자연의 흐름에 인위적인 변화가 생기면서 흰개미가 집을 트고 살기 시작한 것이었다. 우물은 막은 사람은 누구였을까? 우물을 막은 이는 석필의 할머니, 인위적인 힘의 권력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 사실 수많은 '아버지'로 대표되는 석필네 가문은 전형적인 '가부장적 구조'를 통해 권력을 키워나간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분명히 '여성'으로 존재하는 '며느리'들은 전통적 여성상을 강요받으며 말라갔을 것이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쥐어짰을 수 많은 아버지들, 그 아래서 억압당하며 마을 사람들은 고택에 흘러들어가는 우물에 동물의 사체를 버림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표현했다. 그리고 피로 물든 우물을 마주하는 고통은 오롯이 집 안의 여성들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수 대에 걸쳐 내려오는 여성들의 고통의 고리를 우물을 막음으로써 끊어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행동은 일종의 나비효과로 점점 커져 고택의 존재와, 가문의 존재 자체에 위협을 가한다.


5.jpg
출처 Getty Images
 

개미들에 우물에 보금자리를 틀고, 끊임없이 수분을 빨아들여 고택의 주변만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란다. 이외의 지역은 모두 메마르고 황폐해진다. 도시 안에서 일어나는 페어리 서클은, 중앙에 집중되는 권력이 작동되는 방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겉으로는 고택을 둘러싼 나무들이 풍성해지면서 이외의 지역과 풍요/빈곤의 극명한 대비를 보이지만, 그 안을 뒤집어 보면 고택 밑에는 흰 개미들이 번식을 하면서 땅 밑에 텅 비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허공에 집이 떠있는 셈이고, 결국엔 집중된 권력 역시도 언제 무너질 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엔트로피 법칙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자연은 집중과 응축을 허용하지 않는다. 분해되고 퍼지는 성질의 자연 법칙을 인간은 인위적인 힘으로 거스르고 역행한다. 고택과 교회에서 일어나는 '인간 문명의 검은 그림자'는 이러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 상태이며 결국 개미집 위에 놓인 고택의 처지처럼 아슬아슬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인간이 반(反) 엔트로피 법칙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에너지 공급이 필요하다. 극 중에서 고택과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는 에너지는 무엇일까? 나는 그 에너지원이 사람들로부터 나왔다고 본다. 고택과 가문의 권력 유지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대표적인 피해자로 상징되는 임지한, 동물의 사체를 넣었던 마을 사람들, 그 외 극 속에서 단서로만 존재하는 '교회' 경영의 피해자들, 수많은 아버지들의 안 사람이었던 며느리들, 심지어 권력을 행하는 주체였던 수많은 아버지들까지. 사실 모두가 권력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석필은 벗어날 수 없는 가문의 무게에서 갈등하고 발악한다. 결국엔 체념하고 그 굴레를 받아들이지만, 그의 아버지도, 그의 할아버지도 같은 과정을 겪었을 것이다. 개인의 주체성을 완전히 무시한 사회 구조, 근대 문명의 가장 큰 폐해인 사회 집약적 구조에 결국 갇혀 버리는 것이다. 완전한 개미지옥. 고택과 가문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미지옥에 지나지 않는다.


6.png
살바도르 달리
'The persistence of memory(기억의 잔존)


극의 엔딩은 자연스럽게 모든 응집의 해체, 소멸로 이어진다. 흰 개미가 단체로 날 뛰면서 고택을 지탱하던 약해진 지반은 무너지고, 교회를 지탱하던 허울뿐인 권력도 무너진다. 고택의 대들보가 무너지는 장면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주는데 박스형 극장의 구조 상 그 시각적 청각적 효과가 굉장히 강했다. 내 눈 앞에서 고택의 중심부가 쿵 내려앉는 모습은 결국 무너질 수 밖에 허울 뿐인 권력을 보여줬다.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였던 것이다. 무질서의 상태로 돌아가는 속도만 다를 뿐, 결국 결과는 같으며 그 버팀의 과정 속에 오히려 수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난다. 인간 문명의 병폐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7.png
 


무엇보다 나는 이 연극이 자연에서 아직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한 원인의 현상을 인간 사회에 적용해서 스토리를 구성했다는 점이 무척 대단하다고 여겨진다. 인간 사회의 권력이 집중되고 작동하는 방식을 미스터리 서클의 원인으로 치환시킨 점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연에선 그 일이 자연스러운 현상임을 (흰 개미가 집을 짓고 사는 건 당연한 일이라는 에밀리아의 말은 놓쳐선 안되는 중요한 부분이다), 반면에 인간 사회에선 부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지적한다.
  
고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력 구조(허상의 페어리 서클)엔 변화를 야기하는 시발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 중심의 핵은 그저 인간의 욕심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발생한 개미의 페어리 서클은 이야기가 다르다. 개미의 페어리 서클은 한시적으로 응집된 에너지를 해체하기 위해, 즉 고택이 만든 권력 구조를 부수기 위해 자연적인 법칙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결국 한시적으로 에너지가 응축되는 '개미지옥'이란 개념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 욕심이란 어둠에 갇혀 스스로의 아집을 부수지 못하는 인간들이 만들어낸 비겁한 자기 합리화인 것이다. 자연은 언젠가는 개미지옥을 해체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기에 인간들의 아집도 언젠가는 부서지고 만다.





석필의 아버지,
비록 허상이지만 그가 했던
섬뜩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아버지는 죽었어.
내가 아버지를 죽이지 못한 거야.
날 죽여!"


6.jpg
 


극은 뭐랄까. 다분히 포스트 모던적이었다. 엔트로피 법칙을 실사판으로 느끼면 이런 느낌일까. 주제도 그 방식도 굉장히 독특했다. 내가 극에 일부가 되어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외부에 방관자로 존재한다. 자연과 인간을 평행선 상에서 다루는 듯 하지만, 결말에선 결국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보여주며 인간 사회에 대한 명백한 경고를 던진다. 가부장제로 대표되는 인간 문명에 대한 근본적 물음, 피해자들의 연대(특히 여성들의 연대가 돋보였다), 다양성에 대한 추구, 중간 중간 바뀌는 플롯의 진행 방향, 극을 체험하는 방식까지도.

다만 아쉬운 점은 너무나 다양했기에 극의 묘사가 디테일한 부분을 담고 있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피해자들의 이야기라던가, 가문이 행해온 비리 등 세부적인 디테일이 느껴지지 않아서 개인적으로는 약간 아쉬웠다. 공백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것도 좋지만, 중심 서사를 알아채지 못하면 자칫 약간은 뜬 구름잡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어보였다. 독특한 소재와 독특한 연출임은 분명하지만 얼마나 대중성을 얻을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기대했던 메인 카피.


"우리는 우린 뭘 믿고 살아온 걸까,
또 뭘 믿고 사는 걸까
우린, 우리가 뭐라고 믿는 걸까"


이 문장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사로 인용되서 등장한 부분은 다소 뻔한 느낌이 있어서 극적인 효과가 약간 반감된 느낌이었다. 차라리 직접적인 대사로 등장하지 않는 편이 이 극을 곱씹기에 더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11.jpg
 

[한나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