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국어를 판타지로 배웠어요 [기타]

판타지, 어디까지 읽어봤니?
글 입력 2018.11.20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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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판타지로 배웠어요.

 

 

최근에 2019년 수능이 끝났다. 등급 컷을 보거나 후기를 들어보면 언어영역이 매우 어렵다고 한다. 난이도 조절 실패로 인하여 올해 언어영역은 학생이 네이티브 한국인인지를 확인하는 시험이 아닌, 5000년 역사를 가진 19년 전통 한국인을 뽑는 시험이 되어버렸다. 수학이나 과탐과는 달리 언어영역은 짧은 시간동안 이루어 낼 수 없다. 90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그 많은 부분을 읽고 이해하여야 하는데, 그 속독 능력은 1년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암기능력을 보는 것도 아니기에, 내신과 달리 ‘소나기’의 소녀가 보라색을 좋아하는 이유까지 간파할 줄 아는 공감능력과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언어영역은 어렸을 때 얼마나 글자랑 친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많은 책을 읽고, 다양한 분야를 접해봐야 한다. 하지만 필자의 어렸을 때를 회상해보면, 책은 읽기 싫은 존재였다. 지구가 왜 돌아가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는데 왜 지구가 열심히 돌아가는지를 300p넘게 설명하는 책을 보면 닭살이 돋았고, 뭉크의 ‘절규’가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작품인지를 과거의 역사 등의 배경지식을 소개하며 설명하는 책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졌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미 또한 없었고. 하지만 이런 필자에게도 1000권을 넘게 읽게 한 장르가 있다.




“한국 판타지 소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인 2008년엔 집 앞에 비디오대여점인 ‘영화마을’이 있었다. 2000년 이후에 태어난 친구들에게는 많이 생소하겠지만, 그때는 비디오로 영화를 빌려 가족끼리 같이 보았다. 그 대여점에는 부가적으로 판타지 책과 만화책 또한 대여해주었는데, 그곳은 아직 가보지 못한 천국 같은 곳이었다. 다양한 재밌는 책들이 책장 가득히 꽂혀있었고, 책장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한국 판타지 소설의 특징은 권수가 많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아직도 출판되고 있는 ‘달빛조각사’ 같은 경우에는 50권을 돌파하였다. 일반적인 소설도 8권을 기본으로 하였다. 그렇기에 어떤 소설을 선택하였으면, 최소 8권은 읽어야 완결에 도달할 수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의 부모님은 다른 분들과 비슷하게 이런 장르의 책들을 싫어하셨다. 톨스토이씨나 헤밍웨이씨가 쓴 여러 좋은 책들이 있는데 왜 이런 판타지책이나 읽고 있을까, 하셨을 것이다. 그렇기에 어린 소년에게 책을 읽을 시간은 부모님께서 주무시는 시간밖에 없었고, 하루에 3시간밖에 보지 못하였다. 대여시간 또한 3일이기에, 한번 8권을 빌리면 9시간 만에 다 읽어야 했다. 그리고 어린 소년은 그것을 해냈다! 1시간에 1권씩 친형이랑 같이 나누어서 읽으며, 나도 모르게 속독 능력을 키워나갔다. 속독 능력뿐만 아니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예측하는 능력 또한 생겼다. 게다가 소설 특징상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기에, 인물의 이름을 기억하는 대신 단순화하여 읽으면서 소설의 구조를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5년도 수능 1등급을 받았다. 1문제를 문학에서 틀렸는데, 이것은 필자가 선천적으로 작품에 공감하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해설을 읽어도 아직도 왜 틀렸는지 이해가 안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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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판타지 역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이영도 작가의 '드래곤 라자'




한국 판타지의 역사


필자가 3살 때 세상에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역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우습긴 하다. 실제로도 잘 모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아는 데까지 말해보겠다.


고대 한국에는 컴퓨터가 랜선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었다. Window98은 1998년도에 나왔으며, 우리가 자주 접하는 초록색 네이버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척박한 시대에도 사람들은 굴하지 않고 전화선을 연결해 넷상에서 모여 각각의 사이트를 만들어 냈으니, 각각 ‘나우누리’, ‘하이텔’, ‘천리안’이라고 불렀다. 현대의 DC나 다른 사이트들의 조상신 같은 존재인 그들은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중에는 글을 신성시하며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나왔으니, 그들을 소설가라고 불렀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이러한 사이트들에 글을 투고하였고, 현대 판타지 소설에 영향을 끼치는 많은 명작들이 생겼다. 역사가들은 이때를 ‘1차 판타지 전성기’라고 부른다. 여태까지 외국의 문물이었던 판타지 세계를 한국으로 들여와 모든 국민들이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나우누리 1.jpg
나우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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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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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텔


또한 이전에 정립된 것들이 많지 않기에 많은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었다. 판타지를 이용하여 살인사건을 묘사한 책도 있었고, 판타지와 기존의 중국 문화인 무협 소설을 섞기도 하였으며, 현실 세계와 판타지세계를 섞기도 하였다. 그렇기에 이를 ‘판타지 르네상스’라고 일컫는 이들도 있었다.


‘1차 판타지 전성기’를 겪으며 세상은 많이 발전하였다. 여러 신생사이트들이 생겨났으며, 한국형 판타지의 입지 또한 늘어났다.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뜻을 뒤잇는 여러 작가들이 등장하였다. 출판사들은 앞다투어 그들을 영입하였고, 그에 따라 많은 판타지 소설들이 나타났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필자는 이를 ‘2차 판타지 전성기’라고 부른다. 하지만 2차 전성기에는 어두운 면이 있었는데, 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게임 판타지 소설’이었으며 그들 중 특출한 책들도 많았지만 대부분의 소설들은 내용이 비슷비슷한, 소위 ‘양산형’ 소설이었다. 다양성은 점점 감소하여 내용이 획일화되기 시작하였고, 처음에는 참신한 전개나 줄거리에 놀랐던 사람들은 이젠 공장식으로 변한 판타지 책에 실망하였다. 필자 또한 이때부터 실망하여 고전을 찾아보기 시작하였다. 결국 발전없는 한국 판타지는 점점 쇠락의 길에 빠져들었고, 비디오대여점이나 전문 판타지책 대여점도 하나둘씩 없어지면서, 현재는 몇몇 작가분들 빼고는 더 이상 새로운 책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를 ‘한국 판타지 쇠태기’라고 한다.


한국 판타지 쇠퇴기’에 빠진 데에도 다른 한 가지 큰 이유가 있는데, 바로 ‘텍본’논란이다. ‘텍스트 본’의 줄임말로, 책들을 대여한 후 이를 직접 타이핑하고, 이들을 어둠의 경로로 배포한 것이다. 이러한 ‘텍본’은 글을 쓰는 작가들의 수입을 크게 저하시키고 좌절시켰다. 게다가 이때는 저작권법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기에, 많은 사람들은 불법이라는 생각 없이 자유롭게 배포하였다. 기술의 발달로 접근성은 증가하였으나, 반작용으로 그들의 목을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1차 판타지 전성기

아직까지도 고전 명작으로 인정받는 책들이 많다. 이때 출판된 책들은 위아래가 길고, 상대적으로 얇았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대여했기에 책이 너덜너덜한 경우가 많았다.

 이때의 책들의 예시를 들자면,

1. 드래곤 라자

2. 룬의 아이들

3. 세월의 돌

4. 퇴마록

5. 옥스타칼니스의 아이들

등이 있다.

 

2차 판타지 전성기

이들의 책은 휴대성이 용이하도록 위아래가 작아지고, 통통해지기 시작하였다. 겉면의 표지 또한 더 현대식으로 변한 그림들이 삽입되었다. 하지만 지금 보면 촌스럽다. 대부분의 명작들은 게임판타지 장르가 많은데, 장르 특성상 주인공들이 20대 초반이며 실제 게임에 나올듯한 문구들을 넣어, 이전에 비해 문체가 매우 단순해지고 묘사가 많이 감소하였다. 그 예로는

1. 달빛조각사

2. 아크

3. S.K.T

4. 아이리스

5. 제우스월드

등이 있다. 


한국 판타지의 흥망성쇠를 겪으며 이를 적으니, 사기를 집필한 사마천이 된 기분이 든다. 찬란했던 과거의 유산들은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길이 기억되고 있다. 더 이상 후대의 글은 보기 힘들지만, 언젠가는 또 다른 방식으로 ‘3차 판타지 전성기’가 다가올 것을 기대한다. 사장되기엔 아까운 장르이고,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들도 넣을 수 있기에 그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지구가 평평하다는 설정도 나오길 기대하며, 오늘도 향수 속에 젖는다.



[이동석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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