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오래된 인연 [영화]

영화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를 보고
글 입력 2018.11.21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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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시간 남짓 차를 타고 이동한다. 친숙한 밭, 낡은 건물, 익숙한 마을 길을 지나 색이 바랜 담벼락을 넘어온 감나무 하나를 만난다. 그 담벼락 안으로 들어가면 팔순이 조금 넘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안아주신다.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그분들 앞에 서면 어린아이가 된다. 순수하게 사랑받고 숨김없이 사랑하게 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동갑내기이시다. 때론 연인으로, 때론 가족으로, 때론 친구로 수십 년의 세월을 함께 걸어오셨다. 할아버지께서는 몇 년 사이 귀가 부쩍 어두워지셔서 우리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시지만,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말은 그 소리가 작아도 척척 알아들으신다. 진정한 사랑이든, 축적된 시간의 산물이든 간에 나는 그런 두 분을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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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또 한 쌍의 사랑스러운 노부부가 있다. 76년간 함께 해온 강계열 할머니와 조병만 할아버지는 예쁜 한복을 맞춰 입고 두 손을 맞잡고 있다. 예쁘다, 멋있다,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고 서로를 바라본다. 항상 존댓말을 하는 두 분의 모습도 인상 깊다. 누구보다도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한다. 할아버지는 빗질을 하다 말고 할머니에게 낙엽을 던진다. 눈이 쌓이면 눈 뭉치를 던지고, 냇가에선 물을 뿌린다. 그렇게 나와 당신의 세월을 나눈다. 서로의 삶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별은 필연적으로 찾아온다. 삶은 만남과 이별의 반복임을 알면서도 거기에 익숙해지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그 폭이 넓을수록 더욱 그렇다. 오래된 인연과의 이별을 맞이한다는 것, 나의 커다란 일부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아픔이다. 나를 이해하고 나를 기억하는 자의 상실은 곧 나의 상실로 이어진다.

"할아버지 여기서 내 동무좀 해줘요.... 당최 어디로 가시지 마요."

늦은 밤 뒷간을 가는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겁먹지 않게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이제 그는 그녀를 두고 먼 곳으로 떠났다. 할머니는 할아버지 없이 뒷간을 가야만 한다. 희미한 할아버지의 노래 구절만이 할머니의 빈 마음속을 떠다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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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밤, 버스를 타고 가다 문득 옆 유리창에 눈길이 갔다. 창을 닦은 지 꽤 되었는지 정체 모를 얼룩과 잔 흠집이 가득했다. 빗방울이 얼룩 사이를 쉴 새 없이 통과하며 이리저리 퍼져나갔다. 그러다 문득 유리창 너머가 눈에 들어왔다. 라이트를 켜고 내달리는 자동차와 우산 쓴 행인들이 보였다. 가로등 불빛 사이로 떨어지는 빗방울도 보였다. 빠르게 움직이는 바깥을 쫓던 눈동자가 이내 어느 한 곳에 멈추어 낯익은 사람 하나를 발견한다. 유리창에 비친 나 자신이었다.


- 2014.xx 일기장 中



오래된 인연도 유리창과 닮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겉을 본다. 어떻게 생겼는지, 키는 얼만 한 지, 목소리는 어떤지. 상대와 가까워지고 더 알아갈수록 그가 바라보는 세상이 궁금해진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꿈을 꾸는지, 무엇에 행복을 느끼고 무엇을 아름답다 여기는지.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깊어지면 언제부턴가 상대로부터 나를 마주하게 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상대 속의 나를 발견한다.

오래된 인연은 부모와 자식, 친구, 연인 등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존재한다. 그들은 마치 퍼즐 조각 같아서 그들과 공유하는 각각의 세월은 모습도 상이하고, 장소도 시간도 제각각이다. 오래되고 진할수록 조각은 커다랗다. 크고 작은 조각들이 모여 모여 나를 이룬다. 그들 속에도 나의 조각이 있듯 내 안엔 그들의 조각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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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7 / 이상원미술관, 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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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7 / 노만 파킨슨 <스타일은 영원하다>, KT&G 상상마당, 서울)


오래전 여행사진을 정리하던 중 유독 노부부 사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왜 노부부의 사진을 찍었을까. 첫째는, 그들의 뒷모습은 너무나도 진솔해 보이기 때문이다. 노부부는 가족, 연인, 친구 등 모든 관계를 어우른다. 그만큼 서로에게 차지하는 조각도 상당히 커다랄 것이다. 복잡한 퍼즐 아귀가 정확히 들어맞듯 그들 사이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자연스러 보인다.

둘째는, 아름답기 때문이다. 박노해 시인의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라는 말처럼 오래된 인연 또한 아름답다. 갖은 풍파를 함께 이겨내고, 행복한 추억을 함께 쌓은 세월의 길이만큼, 혹은 그저 함께 지낸 시간이 긴 만큼 인연은 깊어진다. 그 깊이의 아름다움을 앞으로도 더 많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처럼 진솔한 뒷모습을 지닐 수 있기를, 너를 가장 큰 조각으로 들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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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0 / Rome, Ita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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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0 / Venice, Italy)


[정영동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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