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팔이] 2화: 아빠, 우리 잘 살자.

사진 <White Angel in Bread Line>: 당신의 초라함을 존경합니다.
글 입력 2018.11.2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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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아빠, 우리 잘 살자


궁금하다. 여러분은 아버지를 존경하시나? 나는 꽤 옛날부터 아버지를 존경하지 않았다.

한국의 많은 아버지가 그러하시겠지만, 나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서 아빠는 항상 일을 하고 계셨다. 아침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집에서 나가서 자정이 가까워서야 들어오셨다. 주말에도 출근하시는 건 예삿일이고 가끔가다 집에 계시는 날에는 컴퓨터로 업무를 보셨다. 아빠랑 대화를 나눈 기억도 딱히 없기에 나는 ‘아빠’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 못했고, 아빠 역시 당신의 딸에 대해 잘 알지 못하셨을 것이라 생각한다. 감사함이라는 걸 가져볼 최소한의 심리적 거리조차 없었다. 그냥 아빠는 언제나 집에 없었고, 그 덕분에 내가 배불리 먹고 등 따시게 잘 수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채 이어지지도 않았다. 아빠는 언제나 일하는 사람이었고, 난 그걸 당연히 여겼다.

아빠가 그렇게 시간을 쏟아 부으시는 그 ‘일’이 멋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다. 동생들 데리고 어른들 앞에서 즉석 공연을 펼치거나 (지금 생각해보면 나름 공연 기획이었던 듯하다.) 공상에 빠지거나 동네를 쏘다니던, 나름 활발하던 어린 시절의 나는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아빠의 일이 너무 지루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일을 하는 아빠의 표정이 그다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해서 ‘부모님 직업란’에 ‘가정주부’와 ‘회사원’이라고 써 넣을 때마다 참 멋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중에 절대로 회사원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까지 했을 정도였으니 ‘동경’에서 기인하는 ‘존경’이라는 심리가 아빠에게는 투영되지 않았던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아빠는 여전히 새벽에 나가 새벽에 들어오는 일상을 반복하고 계셨다. 나는 모든 아버지가 다 그렇게 바쁘게 일하시는 줄 알았다. ‘아빠가 윗사람 되니까 맨날 칼퇴해서 귀찮아 죽겠다’는 친구의 말을 들은 후에야 윗사람이 되면 야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단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업종으로 인한 차이야 있었겠지만 그래도 우리 아빠 역시 꽤 윗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우리 아빠는 언제나 야근을 했다. 나중에는 회사에서 멀리 발령까지 보내 버리는 바람에 우리 아빠는 근 6개월 동안 지방에서 때늦은 자취생활까지 해야 했다. 우리 아빠는 그 정도로 성실한 직장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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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우리 아빠가 명예퇴직을 했다. 아니, ‘했다’기 보다는 ‘당했’다. 쉰을 갓 넘긴 나이에 명예퇴직이라니, 다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다. 나는 대학생이었다. 내 동생은 한창 돈이 많이 들어가는 고 3이었다. 아직 아빠의 명예퇴직은, 정말 죄송하지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아빠를 자른 회사에게 내 원망이 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빠가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웃기지도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원망이, 정말 죄송하게도 아빠에게 돌아갔다.

아빠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 정도야 잘 알았다. 다만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은 알고 싶지 않아 할 뿐이었다. 아빠한테 용돈 받는 친구들, 아빠 돈으로 6개월 동안 유럽여행 가는 친구들, 그리고 끊이지 않는 알바로 체력도 정신도 죽상이 되어가던 내 처지를 비교하면서 솔직히 말해, 아빠를 원망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해 놓고서 결국 끝이 이거라니. 아빠가 바보 같다고 느꼈다. (난 성악설을 믿는다. 나만 봐도 그렇다.) 그렇게 아빠는 점점 더 존경의 대상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저녁에,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저 앞에서 일자리를 주선해줄 지인을 만나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빠를 봤다. 아빠가 갈 지자로 걷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작은 아빠의 체구가 고개를 숙인 바람에 더 작아져 있었다. 꽤 어두웠는데, 아빠가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왜 그렇게 잘 보였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갈 지자로 걷고 있었다. 아빠가 작아져 있었다. 나는 그 때서야 ‘아빠’라는 거창한 이름 안에 들어있는 나약한, 나와 같은 그저 한 명의 인간을 보았다.



<White Angel Bread Line, San Franci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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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아 랭 (1933년 作)


1929년 10월, 뉴욕의 주식시장이 폭락했다. 은행들이 연달아 도산하자 각종 산업들마저 우후죽순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미국 도시인구의 38% 이상이 실업자가 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Great Depression, 경제대공황이다.

위엄의 상징 가장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가족을 위해 빵 한 쪽이라도 얻으려고 좁은 배급 줄에 몸을 붙이고 서있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이미 가장으로서의 자존심 따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이 사진만 보면 그 날 저녁의 잔상이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껏 유독 아빠에게만 엄격한 기준을 제시해왔다. 친구나 애인의 실패와 실수는 그렇게 쉽게 이해하고 용서해주었으면서 유독 아빠에게만 높은 기준을 들이민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빠는 ‘아빠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아빠니까’ 무조건 든든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아빠는 ‘아빠니까’ 나에게 절대 상처를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조차도 완벽한 인간이 못 되면서 아빠라는 이름을 가진 저 남자에게만은 일방적인 완벽함을 기대했다. ‘아빠’라는 껍질 안에 감춰진 인간 고유의 어리숙함과 두려움을 알아보는 데 나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지금껏 당연함의 틀 안에서만 보아왔던 한 사람도, 나처럼 약해지고 힘들어하고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그걸 알았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건 없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이야기는 ‘모든 것을 깨달은 내가 효녀 심청이가 되었다-’는 식의 절절한 결말을 갖지는 못한다. 나는 여전히 아빠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고, 아빠의 실수와 실패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인색한 평가를 내린다. 나는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하나, 바뀐 점은 있다. 난 이제 아빠를 조금 존경하게 되었다. 아빠의 미숙함을 확인한 후에야 아이러니하게도 난 비로소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처럼 그렇게 실패와 단점 투성이 인간이었을 뿐인 한 남자가, 그 어려운 사회생활이란 것을 몇 십 년 동안 해내서 세 명의 인간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먹여 살렸다는 것이 진심으로 대단하게 느껴진다.

존경의 마음은 위대함뿐 아니라 초라함을 본 후에도 생겨날 수 있다는 것 역시 알게 되었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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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서 난 이제 아빠가 진심으로 잘 살았으면 좋겠다. 효녀가 되겠다- 뭐 이런 말이 아니라, 정말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나의 아버지라는 한 남자가 진심으로 평온하길 바란다. 나는 죽을 때까지 미숙한 인간일 터이고 아빠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기에 서로 더 상처 받을 일이야 분명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 나름대로 이해해주고 그러다 또 상처받고, 그러다 또 이해하고, 뭐 그렇게 지지고 볶으면서 오래오래 재밌게 살기를 바란다.

우리 아빠는 맨날 ‘한끼줍쇼’를 틀어놓고 잔다. 틀어놓고 잘 거면 왜 틀어놓는지 잘 모르겠다. 아빠는 본인이 늙어서 초저녁 잠이 많아져서 그렇다고 변명을 하던데 내가 봤을 땐 그냥 아빠가 운동 부족이어서 그런 것 같다. 제발 운동 좀 해 아빠. 그리고 왜 요즘 오징어 땅콩, 꼬깔콘, 이런 것만 사와? 아빠 좋아하는 것만 사오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도 좀 사다 줘. 나 감자칩 좋아해. 특히 스윙칩. 여튼. 우리 잘 살아보자. 아빠도, 나도 결국엔 다 잘 될 거야. 우리 부끄러울 짓 하지 말고 떳떳하게 잘 살아보자. 알겠지?

우리 진짜 잘 살자. 다 잘 될 거야. 진짜로.

p.s 아프지 마 아빠. 돈 들어.

p.s 2. 나 콘쵸도 좋아해, 초코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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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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