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간'으로 '너'를 만나다 [영화]

<너의 이름은>을 보고
글 입력 2018.11.25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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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세계의 윤곽이 희미해지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과

만날지도 모르는 시간.'

 

- 너의 이름은 中 -


   

‘운명 같은 사랑’이라는 말을 우리는 종종 접한다. 이따금 엇갈리거나 토라지더라도, 마치 붉은 실로 이어져 끊기지 않고 관계를 아름답게 이어나갈 때 쓰는 말이다. 하지만 막상 그러한 사랑이 꼭 좋지만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의지와는 개의치 않고 특정한 사람과 필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어찌 보면 괴로울 수도 있지 않을까? ‘운명’이라는 말에는 ‘나’라는 주체가 거대한 타자로부터 의지를 속박당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이러한 ‘운명’ 또한 결국 ‘나’라는 주체가 실존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말이 조금은 어렵더라도, 운명 같은 사랑을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일지는 어찌 됐건 중요한 문제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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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은 ‘시간’이라는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가치를 통해 ‘운명’과 ‘나’ 사이의 관계를 사랑으로 풀어냈다. 영화는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타임루프(Time loop)와 남녀과 뒤바뀌는 것을 소재로, 소행성 충돌로 없어져 버린 이토모리 마을의 소녀 ‘미츠하’와 평범하고 일상적인 도쿄의 소년 ‘타키’의 모습을 그려냈다. 처음에는 서로의 몸이 뒤바뀐 사실에 당황하고, 각자의 일상에 지장을 주지 말자는 합의를 토대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호감을 품는다. 특히 두 사람이 뒤바뀌는 일상이 끝나고, 타키가 미츠하의 부재를 확인하면서 호감을 자각한다는 점은 꽤 흥미롭다.

 

사실 영화가 전개되면서 두 사람이 사랑을 느낄 만한 요소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다. 몸이 뒤바뀌었다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호감이 사랑으로 나아갈 만한 사건이 존재하는지는 다소 의문점이 남는다. 오히려 전반적으로 상대방을 좋아할 만한 계기가 두드러지는 부분이 없어 충분한 개연성이 느껴지지 않을 여지는 충분히 존재한다. 이때, 두 사람의 ‘사랑’을 보다 확연히 보여주기라기도 하는 듯 운명을 바탕으로 한 ‘무스비’가 등장한다. 오랫동안 미츠하의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로 구전된 무스비를 미츠하의 할머니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무스비라고 알고 있느냐?

토지의 수호신을 말이다.

옛말로 무스비라고 불렀단다.

이 말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실을 잇는 것도, 무스비.

사람을 잇는 것도 무스비.

시간이 흐르는 것도 무스비.

전부, 신령님의 힘이야.

 

- 너의 이름은 中 -


 

무스비는 일본어로 ‘끈’을 의미하며, 우연적이면서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할 때 사용한다. 이는 타키와 미츠하의 만남이 무스비로 인해 맺어진 인연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서로에 대한 두 사람의 기억이 없어져도, 끊임없이 공허함을 느끼고 직감에 이끌리며 상대방을 만나게 되는 이유인 셈이다. 결국, 두 사람은 애초부터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운명으로 맺어져 있었다는 점을 영화는 강조한다. 이때 ‘나’라는 주체는 ‘시간’이 흐르면서 주어진 ‘운명’을 향해 부단히 달려가게 된다. 그렇다면 둘의 만남은 단순히 무스비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인연일까?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것 중에서도, 내가 존재하는 그 자체를 ‘현존재’라고 정의한 바 있다. 현존재는 매 순간 나타나는 나의 모습이고, 그렇기에 어느 순간에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해석을 기반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인간은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는 그의 말처럼, 언젠가 죽게 된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우리는 순간순간 시간상으로 존재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요약하자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삶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두 사람의 ‘운명’도 결국 각자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삶을 이어나갔기에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운명을 스스로가 선택하면서 자신의 '운명'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무스비를 운명으로, 그리고 시간으로 설명하는 미츠하의 할머니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우리가 만든 끈도 그러하니

하느님의 기량, 시간의 흐름 그 자체를 나타내고 있지.

때로는 모여서 형태를 만들고

뒤틀리고 얽혀

때로는 돌아오고.

끊기고 이어져

 

그게 무스비.

그게 시간.

     

- 너의 이름은 中 -



타키와 미츠하가 뒤바뀔 때 3년이라는 시간의 길이를 두고 변화한다는 사실은 운명과 시간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점을 방증한다. 이토모리 마을에 운석이 떨어지기 하루 전, 미츠하는 도쿄에 찾아가 그녀의 시점에서 3년 전 타키를 만난다. 이때, 미츠하가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무스비를 타키에게 건네주고, 이는 후에 황혼의 시간에 두 사람이 만나는 데 있어 상징적인 의미로 남는다. ‘이름’으로 서로에게 기억되지 않더라도, 운명이라는 거대한 시간 속에서 서로를 재회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 것이다.

 

 『너의 이름은』 자체가 미완의 대사로 엔딩을 맞이하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어에서 방점은 때에 따라 느낌표, 반점, 온점, 혹은 물음표로 다양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관계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각자가 운명이라는 시간 아래 수많은 결론을 생각하는 것 또한 어찌 보면 또 하나의 무스비일테니.




영화 예고편







원종환.jpg
 

[원종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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