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nion] 음악 '듣기'에 대하여 [음악]

뮤지션을 계속 사랑하기 위한 나만의 고투기
글 입력 2018.11.27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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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 공연은 꼭 한번 보러가야겠다.' 하고 결심을 세우는 과정이 좋다. 이런 결단이 생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에게나 그런 마음이 들지도 않고, 음악을 한번 듣고서 결심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어떤 뮤지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은 그와 오랜 시간 함께하고, 그의 가치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있음을 확신한 후에다. 연인을 사랑하게되는 것과 다름없는 과정이다.

나는 스스로 보수적인 음악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음악을 듣는 방식'에 대해서 그러하다. 살아온 날이 많지 않은 만큼 음악을 들어온 역사도 그리 길지 않지만, 나는 과거에 음악을 듣던 방식이 더 좋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에서 모든 음악을 터치 몇번으로 찾아낼 수 있는게 아니라, 음악이 좀 더 '희귀했던' 시절이 말이다. 그렇다. 나는 음악이 좀 더 '귀하게'여겨졌으면 하는 바램이 크다. 음악이 너무도 흔하게 소비되는 것이 좀처럼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우리는 대중 음악에 둘러싸여있다. 스피커가 없는 카페나 음식점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길거리에 있는 것 뿐인데도 걷는 내내 음악이 흘러나온다. 나는 새로 오픈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본사의 지침으로 주인이 좋아하지도 않는 신나는 음악들을 하루종일 틀어놓는다거나, 타이어 가게에서 아침부터 시작해 밤새 길건너 편에서까지 들릴 정도로 소리를 키워놓고 최신 팝차트를 틀어놓는 일이 견디기 힘들다.

오직 적나라한 자본주의만이 음악을 이용한다는 것도 아니다. 엠티에서 그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하루종일 블루투스 스피커로 최신곡 차트를 틀어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음악의 기능이 도구적으로 이용되는 면으로 치우치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영화의 사운드 트랙으로 음악이 삽입되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고, 음악과 영화 모두에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식의 이용은 받아들일만하다. 그러나 위의 예시들은 음악을 원하지도 듣지도 않는 사람이 오직 이익을 위해 스피커를 틀어놓는 것이다. 즉 '청자의 자세'가 아닌 것. 나는 그것이 정말로 음악의 가치를 훼손시킨다고 여긴다. 무분별하게 들려지는 음악은 예술 아닌 매스미디어와 다름 없다.


*


'음악 과잉'인 이 전례없는 시대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청자가 되기위해선 개인적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뮤지션이 생기고 나서부터 '청자의 자세'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적 가치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사실 이 고민의 이면에는 나의 어떤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건 바로 그가 '지겨워짐'에 대한 불안이다. 나는 똑같은 유행가들이 너무 자주 들려서 지겨워진 경험이 있다. 그처럼 내가 사랑하는 뮤지션의 음악도, 너무 자주 찾아듣는 바람에 지겨워질까봐 두려운 거다.


그래서, 나는 뮤지션을 지속적으로 사랑하기 위한 나만의 고투를 시작했다.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먼저 어려움을 극복해야할 상황부터 알아야 할텐데, 문제 상황은 너무 많았다. 우선 일상의 차원에서 나도 이미 음악에 중독되어 있는 상태였다. 음악을 습관처럼 챙기는 것이다. 버스에서 나도 모르게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고, 이어폰을 놓고 나왔다는 것을 알게되면 패닉에 빠졌다. 장거리 이동시 이어폰이 없는 건 재앙처럼 여겨졌다. 나도 음악을 '수단'으로 여기고 있던 것이었다. 음악 자체를 정말로 원해서 찾는 것이 아니고, 지루한 순간을 참을 수 없어서 음악을 찾는 것이다. 음악에 대한 이런 취급은 음악을 별 의식없이 대충 듣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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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보았던 리암 갤러거의 무대


 또 이와 정반대로 겪는 어려움도 있다. 음악에 대해 집착에 가까운 의미부여를 하는 경우다. 오아시스(OASIS)를 사랑하는 나의 경우, 기대에 부풀어 작년 8월에 있었던 리암 갤러거(Liam Gallagher)의 내한 공연을 준비했다. 그의 음악을 무한 복습하고, 예상 셋리스트를 찾아보고, 콘서트장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달려나가는 노력을 기꺼이 감행했다. 2시간 정도 사람 사이에 낑겨 나의 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리암 갤러거가 등장했는데, 공연이 시작하자 나는 곧바로 지옥을 경험했다. 흥분한 사람들이 앞쪽으로 계속 밀어대어 압사당할 것 같았던 것이다. 밀어내는 것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좀 견딜만 했으나, 나는 분노에 차오를 수 밖엔 없었다. 무대 바로 앞쪽에 있어서 음향이 조화롭게 들리지 않는데다가, 떼창으로 인해 공연 내내 리암 갤러거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이었다. 공연이 다 끝나고 나서야 뒤쪽으로 나올 수 있었던 나는 매우 허탈했다. 그토록 고대한 리암 갤러거의 공연에서, 그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거였다. 나는 한국의 떼창 문화를 경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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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멀었지만 충분히 즐길 수 있었던
노엘 갤러거의 공연
 

그래서 올해 노엘 갤러거(Noel Gallagher)의 공연은, 일본으로 보러갔다. 일본의 발달한 관람 문화를 기대하면서 2018 SUMMER SONIC 락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확실히 일본의 관객은 한국보다 훨씬 더 정적이었고, 서로에 대한 예의를 지켰다. 심지어 내 앞쪽에 있던 남자는 자신의 큰 키 때문에 내 시야가 가려질까봐 사과하고, 공연 내내 신경써주는 정도였다. 노엘 갤러거의 공연은 정말 만족스러웠고 내게 잊지 못할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한가지, 공연중 내게 강렬하게 생겼던 욕망이 있다면, 더 열정적인 떼창이었다. 한국에 비해 약한 호응이 아쉬웠다. 이 무슨 변덕인가! 나는 한국의 열정적인 떼창문화를 사랑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떼창문화에 있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있었다. 노엘 갤러거의 공연이 훨씬 좋았던 이유는, 다름 아닌 공연을 관람하는 내 마음가짐의 변화에 있었다. 리암 갤러거의 공연에서 나는 그를 최대한 가까이서 보아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압박했다. 그 결과 본 공연에서 리암 갤러거의 목소리도 제대로 듣지 못하고, 떼창에 기분 좋게 참여하지도 못했다. 반대로 노엘 갤러거의 공연을 충분히 만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더 느긋하게 공연에 참석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전체적인 무대를 즐겼기 때문이다. 또한 수많은 뮤지션이 오는 락페스티벌이기 때문에 오아시스의 노래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예습하여, 참 '적절히' 준비해갔다고 말할 수 있다. 내한 공연에 목숨걸고 집착하던 내가 좀 더 오아시스를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한게 분명했다.


*


이제는 내한 공연도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의 핫한 뮤지션들이 너무 많다. 이제는 좀 익숙해진다. 지금은 비교적 자주 볼 수 있게된 그들을 대하는 관객의 마음가짐에 대한 정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어떻게 나의 아티스트를 사랑해야할 것인가? 음악에 대한 청자의 순수함을 잃지 않는 것이 그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음악을 듣는 방식이 아무리 발전해도 음악 자체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어느날 음악을 감상하다가 그 뮤지션의 정수를 맛보는 벅차오르는 순간을 경험하고, 길을 걷다가 귀에 이어폰을 꽂자 음악이 순식간에 그 공간을 낭만적이게 바꿔버리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저 그런 순간을 사랑하며, 아티스트와 나를 이어주는 '음악'이란 존재를 감사히 여기자. 음악에 대한 순수한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를 너무 도구적으로 대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그저 그 가치를 인정해주면 된다. 내게 특별한 순간을 선사해준 한 아티스트의 '예술 작품'임을, 알아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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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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