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떤 빨래 [여행]

글 입력 2018.11.28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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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년 5월 따스한 햇볕 아래, 나는 베네치아에 있었다. 도시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그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지도를 보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좁고 미로 같은 골목길을 정처 없이 떠돌다 보면 예기치 못한 즐거움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렇게 목적지 없는 여행을 시작했다. 골목의 매력은 다양했다. 아름다운 외벽장식, 게으른 길고양이, 외로이 떠 있는 낡은 배 등 골목의 작은 주인들이 자신의 소박한 이야기를 앞다투어 들려주었다. 길잃은 골목여행이 풍요롭게 차올랐다. 그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빨래의 이야기였다.


마주 본 건물 사이를 이은 줄에 빨래가 정갈하게 널려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린 시절 운동회 하늘에 걸려있던 만국기를 연상케 했다. 형형색색의 국기 대신 가지각색의 옷가지가 골목의 하늘을 장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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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10 / Venice, Italy)


빨래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예컨데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이불보를 보고는, 무서운 괴물 꿈을 꾸어 한밤중에 작은 실례를 저지른 한 어린 아이를 상상할 수 있다. 늘어난 러닝셔츠에서는 오랜 세월을 느낄 수 있고, 만국기처럼 널려있는 빨래의 경우는 창문을 내어준 이웃 간의 관계도 유추해볼 수도 있다. 이렇듯 빨래는 일상의 많은 이야기를 비춘다.



2)

바라나시는 갠지스 강 중류에 자리한 인도의 유명한 순례성지이다.

24시간 밤낮으로 화장(火葬)이 이루어지고, 불에 탄 사자(死者)의 재와 뼛조각은 강가로 흘러든다. 순례자들은 그 강물로 몸을 씻고 옷을 빤다. 투명한 물로 더러운 때를 씻어내는 일반적인 빨래와는 달리 그들은 삶과 죽음이 짙게 물든 회색 물로 옷을 적신다. 생활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우중충한 날씨와 바닥에 널브러진 옷들도 베네치아의 그것과 크게 대비되었다. 베네치아의 좁은 골목과 바라나시의 개방된 넓은 부둣가 또한 그러했다. 빨래로 본 두 도시의 차이가, 두 도시에서 바라본 빨래의 차이가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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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1 / Varanasi, India)



3)

영화 파이란에서는 세탁소에서 일하는 모습을 통해 주인공의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을 보여준다. 박수근 화백은 소박한 아낙네들이 머무는 추억의 공간으로 빨래터를 그렸고, 가수 이적은 사랑의 상처를 잠시라도 잊기 위해 뭐라도 하겠다고 빨래를 노래했다. 소시민의 일상을 그린 같은 이름의 뮤지컬도 있다. 너무나도 가까이 있고 익숙하여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그것은 의외의 매력이 가득했다.

나에게 빨래는 어떤 것인가 생각해보았다. 번뜩 떠오른 단어는 '유지(維持)'였다. 때 묻은 옷을 깨끗이 씻어냄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맞이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내 모습을 내일도 그대로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또 한 번의 출근을, 또 하루의 여행을 지속하기 위해 옷을 빨았다. 흔들림 없는 반복을 위해 같은 옷을 같은 모습으로 되돌려놓았다.

동시에 또 하나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문득 요즘 들어 밀린 빨래가 늘어나는 것은, 그동안의 똑같기만 했던 일상이 슬슬 지루해져 감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웃음이 났다. 혹여 당신의 빨래바구니가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당신이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에겐 지긋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움을 찾고자 하는 도전정신이 넘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즐거운 상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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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동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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