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스페인,맑음] #4.노 쏘이 치나, 쏘이 꼬레아나

글 입력 2018.11.2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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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8.29. 스페인. 뽀송뽀송하게 맑음



Costa del Sol, 태양의 해안이라는 뜻을 가진 말라가의 또 다른 이름이다.


태양에만 주목하여 그처럼 따스하고 온화한 것들만 기대하고 온 나의 첫날은 따스한 태양보단 해안에 가까운 하루였다. 차갑고 폭풍우 치는 그런 해안 말이다.


프랑스를 경유해 장장 18시간의 비행 끝에 도착한 말라가는 선선한 바람이 부는 새벽이었다. 내 몸무게와 별 차이 없는 캐리어를 끌고 구글 맵에 의지해 미리 예약한 숙소를 찾아가던 길. 처음엔 우리나라와 달리 하얀 대리석으로 된 길바닥이 신기했고, 낮지만 옛 모습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건물들에 시선을 빼앗겼다. 늦은 시간 덕에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길은 생각보다 밝았다. 아, 내가 정말 외국에 혼자 오긴 했구나. 설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구글 맵이 알려준 곳에는 내가 예약한 숙소가 보이질 않았다. 더군다나 숙소는 밝고 큰길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있었고 나는 숙소를 찾아 그 주변을 계속 맴돌아야 했다. 자기 몸만 한 30kg짜리 짐과 한 손엔 구글맵을 킨 핸드폰. 두리번거리며 길을 헤매는 폼. 누가 봐도 그곳에 처음 온 조그마한 동양인 여자아이가 돌아다니고 있으니 몇몇 술 취한 스페인 사람들은 내가 만만해 보였나 보다. 말라가에 도착한 첫날, 1시간도 안되어서, 그 길 근처에서만 나는 3번의 인종 차별과 캣 콜링을 당해야 했다. 아주 화려한 환영식이었다.


유럽에서도 인종 차별이 심한 나라로 스페인이 손에 꼽힌다는 것을 들었지만 Costa del Sol, 그 따뜻한 이름 때문에 나는 너무 좋은 것만 바라며 말라가에 왔던 것 같다. 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인종 차별 레퍼토리는 대게 Hola, China! (안녕, 중국인!)로 시작한다. 동양 국가 중에 아는 나라가 중국밖에 없는 듯하다. 그 이후에 나오는 말들은 대게 다양하나 모두 모욕적이라는 점 외엔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다.


처음 인종차별을 당하고 가장 분했던 건 그 모욕적인 말들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머릿속으로는 한국어로 해주고 싶은 말들이 총알처럼 지나갔지만 아직 내 스페인어는 그를 총알처럼 번역해서 내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행동은 눈에 힘을 주고 그들을 째려본 다음 빠르게 그곳을 벗어나는 것뿐이었다.


차라리 언어를 아예 몰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분노는 배움의 큰 원동력이 되어 이후엔 인종 차별을 당하면 어떻게 똑 부러지게 스페인어로 말해줄지 계속 고민하고 생각했다. No soy china. Soy coreana. Tonto! (중국인 아니고 한국인이거든, 이 바보야!)


첫날 겪은 화려한 환영식 덕에 내가 가지고 있던 환상은 와장창 깨져버렸다. 깨진 환상처럼 한동안 내 멘탈도 와장창 상태이긴 했지만. 한동안 밤에 혼자 밖을 못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첫날 빠르게 환상을 버리고 현실을 체감한 덕에 좀 더 빨리 단단해질 수 있던 듯하다. 이제 Hola, China 정도엔 당황하지 않고 되받아칠 수 있는 멘탈을 갖게 되었으니. 조만간엔 스페인어로 인종 차별에 대해 반박하고 상대의 행동을 비판하는 속사포 랩을 할 수 있는 날도 오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이영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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