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스위스, 그래도 좋았다 (2) [여행]

글 입력 2018.11.29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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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여행 셋째 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날씨부터 확인했는데, 전에 본 일기예보대로 흐렸다. 평소엔 안 맞을 때도 많던 일기예보가 스위스에서는 기막히게 잘 들어맞았다. 어찌 됐든 일정대로 그린델발트로 출발했다. 점차 날씨가 개기를 바라면서. 언제나 그렇듯, 날씨는 변덕스럽지 않은가.



              

인터라켄(숙소) - 그린델발트 - 피르스트 (바흐알프 호수까지 하이킹+ 액티비티)


셋째 날 일정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인터라켄에서 그린델발트로, 거기서 다시 피르스트로 이동하며 일정을 시작했다. 곤돌라를 타고 피르스트에 도착한 후, 가정 먼저 하이킹을 하러 갔다. 바흐알프 호수로 향하는 하이킹은 생각보다 멀고 힘들었다. 가벼운 산책일 거라 얕보던 나를 비웃듯 제법 체력을 필요로 했다. 그런데도 하이킹하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눈 앞에 펼쳐진 절경 때문이었다. ‘그림 같은 풍경’이라는 표현을 여기에 안 쓰면 달리 어디에 쓸 수 있을까. 그림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현실감 떨어지게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지금도 때때로 이 경관 속에 서 있던 내가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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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게 도착했지만, 바흐알프 호수에는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까지 오면서 본 경치가 더 황홀했던 탓이리라. 도착한 때가 점심 무렵이라, 근처 벤치에 앉아서 미리 마트에서 사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가성비가 턱없이 떨어지는 부실한 샌드위치였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는 데다가 점점 흐려져서 서둘러 돌아가기로 했다. 날씨가 개기를 기대했는데 그러기는커녕 안개가 더 짙게 내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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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알프 호수

 

 

부지런히 출발지점으로 돌아온 후 곧장 ‘피르스트 플라이어’로 향하였다. 플라이어에는 이미 대기하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날씨가 안 좋아져서 더디게 줄어드는 줄에 애가 탔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는데 야속하게도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플라이어 운행이 중단될 가능성이 컸다. 나와 동행인은 이러다 우리 앞에서 운행을 중단하는 거 아니냐며 반농담조로 걱정했다.
 

기다린 지 1시간쯤 지났을까, 드디어 우리의 차례가 왔다. 그런데 운행 요원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이더니 정말 놀랍게도 우리 앞에서 운행을 중단하였다. 아까 농담으로 한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닌데. 조상님 말씀 틀린 거 하나 없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더불어 아마 유럽 여행하면서 가장 억울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무려 1시간을 추위 속에서 기다리고 코앞에서 그냥 돌아가야 하는 그때의 심정이란.
 

운행 요원은 ‘글라이더’라는 액티비티는 운행하니 대신 그것을 타라고 했다. 우리는 허탈한 마음을 안고 글라이더를 타는 곳으로 향했다. 티켓 값은 둘째 치고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비슷한 액티비티라도 타야 했다. 그치지 않는 비에 글라이더마저 운행을 중단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글라이더는 탈 수 있었다. 돌고 돌아 참으로 어렵게 탄 액티비티였다. 글라이더를 타며 보는 경치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짙게 낀 안개가 한참 전에 풍경을 가려버려 풍경을 보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였다고 말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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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르스트 글라이더 (사진 출처:동신항운)



날씨는 좋아질 기미가 안 보였다. 이러다 관광은 관광대로 못하고 괜히 감기만 걸리기 딱 좋았다. 이제 그만 숙소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마운틴 카트가 눈에 띄었다. 에라, 모르겠다. 동행인에게 그냥 마운틴 카트를 타보자고 제안했다. 동행인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우리는 마운틴 카트를 탔다.

 

마운틴 카트는 전날 융프라우요흐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융프라우요흐에서는 단순히 새하얀 세상을 구경만 했다면 이젠 그 속을 카트를 타고 질주했다. 안개가 온 세상을 덮어서 시야 확보가 제대로 안 되는 와중에 한쪽 길옆은 낭떠러지였다. 남들은 마운틴 카트를 탈 때 경치가 너무 좋아서 사진 찍다가 느리게 간다던데, 우리는 낭떠러지로 떨어질까 봐 천천히 갔다. 안개 낀 날씨엔 안전운행이 최고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멋진 풍경을 보며 카트를 탈 줄 알았는데 현실은 앞서가는 동행인의 카트 밖에 안 보이다니. 게다가 우비도 없이 비는 그대로 다 맞고 있고 (그래도 중간에 비가 그쳤다) 추워서 몸은 얼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카트는 가속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멈추면 번번이 일어나서 진흙을 헤치며 카트를 손수 밀어줘야 했다. 속된말로 개고생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인적이 드문 산중이 뿌연 안개로 둘러싸여 신비롭기도 했고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 같아서 색달랐다.

 

웃겼다. 있는 고생은 다 하는 꼴이 웃기고, 그 와중에 나름 재밌어서 웃겼다. 그래서 나와 동행인은 카트를 타며 한참을 웃었다.




2분 정도부터 마운틴 카트 타는 것을 볼 수 있다.

혹여나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우리는 다행히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불상사 없이 코스를 무사히 완주하였다. 이것을 끝으로 나의 스위스 여행은 마무리되었다. 내가 떠나는 날은 날이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굳이 기억해내지는 않겠다.


 




스위스 여행은 뜻하지 않은 일들의 연속이었다. 여행이 내 뜻대로 흘러간 것은 후하게 치면 절반 정도이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망한 여행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스위스 여행은 나에게 결코 ‘망한 여행’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망한 여행’이라고 하기에는 스위스 여행에서 남은 것이 너무나도 많다. 분명 계획대로 되었다면 얻을 수 있던 많은 것들을 아쉽게 놓치기는 했다. 그러나 난 대신 융프라우요흐에서 기적 같은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고, 마운틴 카트를 타며 이색적인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여행 계획을 짤 때 날씨가 안 좋을 것을 알았다면 취소해버렸을 이 모든 것들이 생각보다 좋았다.


일상으로 돌아온 나에게 계획대로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자주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모든 일이 내가 계획한 대로 척척 진행되면 좋겠지만, 난 신이 아니기에 많은 일이 계획과 달리 쉽게 틀어지고 만다. 가끔은 내가 부족해서, 때로는 운이 나빠서. 그러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은 상황에 화가 나고 상황을 그렇게 만든 나 자신을 싫어하고 자책한다. 내 인생이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며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일은 너무나도 많을 것이다. 개중에는 그래서 타격감이 꽤 큰 것이 있을 수도 있겠지. 사람이니까 당연히 쓰디쓴 좌절감과 절망감을 맛볼 것이다. 그럼 나는 그때의 내가 스위스 여행을 잠시나마 떠올렸으면 한다. 그 기억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지 않을까. 마음은 좀 쓰리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만큼 그렇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뜻대로 되지 않았으나 뜻밖의 추억으로 남은 스위스 여행처럼.



[정지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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