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올라퍼 엘리아슨과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 [기타]

글 입력 2018.11.30 23:1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2017년 2월, 리움미술관에서 진행된 '올라퍼 엘리아슨 : 세상의 모든 가능성' 전시를 관람했다. 당시에는 작가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지 않았던터라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를 관람했으나 전시 관람을 끝내고 미술관을 나오면서 그의 팬이 되어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그에 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고, 지금까지의 작품을 둘러보았다.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전시가 진행되었던 당시 왜 그곳에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그 후로 작가에 대한 발표과제가 있을 때마다 그를 주제로 발표를 하였는데, 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좋아졌다. 그래서 이번 오피니언에서는 올라퍼 엘리아슨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올라퍼 엘리아슨과 숭고미




bzr_mag_1610_art_02_008.jpg

사진1. 올라퍼 엘리아슨 <The Weather Project>



엘리아슨이 작업한 다양한 작품 중에 개인적으로 자연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좋아한다. 자연이라는 친근한 주제가 이유일 수도 있으나 그 외에도 그의 작품을 볼 때면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생겨났다. 이 감정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 미학사 시간에 배운 칸트의 숭고미가 떠올랐다.


칸트에 대해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스스로도 이를 전부 이해하고 배웠다고 할 수 없지만 수업내용을 상기시켜 보자면 칸트의 숭고미는 다음과 같다. 칸트의 숭고 미학은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로 나뉘는데 둘 모두 핵심은 ’크기‘에 있다. 칸트는 “단적으로 큰 것을 우리는 숭고하다고 부른다”고 말하면서 ’단적으로 크다‘는 말을 ’절대적으로 크다‘는 말과 동의어로 사용한다. 그에게 ’단적으로 큰 것‘, 즉 ’절대적으로 큰 것‘이란 곧 “그것과 비교해서 다른 모든 것이 작은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의 감각은 이러한 ’절대적인 크기‘를 감각할 수 없고 다만, 유한한 크기만을 감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숭고란 그것을 단지 사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초월하는 어떤 마음 능력이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을 말한다.” 숭고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예로 자연이 있다. 인간이 끝없이 펼쳐진 자연을 마주했을 때 자신이 한 없이 작음을 깨닫고 두려움 또는 육체적 무력함을 느끼게 되며 이를 넘어서는 순간 스스로를 그 위력에서 독립된 것으로 판정하여 우리를 파괴하려고 위협하려는 위력을 지닌 자연현상이 아니라 자연으로서 독립해 있다는 우리의 감정을 깨달으며 숭고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리움미술관에 전시되었던 작품들은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 큰 규모를 자랑하지는 않지만 그의 대표작인 <The Weather Project>와 같은 작품을 보면 충분히 숭고미를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규모를 자랑한다. 아마도 내가 그의 작품을 보며 느낀 감정이 이러한 감정이 아닐까.




올라퍼 엘리아슨 작품의 의미




그림1.jpg
사진2. 올라퍼 엘리아슨 <당신의 미술관 관람을 위한 준비>


엘리아슨은 "'이게 뭐지?'하는 순간이 내 작품의 의미"라며 "작품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관람객 스스로의 나 자신, 나의 존재를 확인하게 하는게 내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처럼 그의 작품을 보고 있자면 작품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부터 주변은 잊고 오로지 나와 작품만이 세계에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말 지금 이 순간, 지금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것이 현대미술이란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어렵게 다가오는 현대미술 사이에서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은 쉽고 흥미로워 사람들에게 매혹적이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일상에서 늘 마주하던 자연을 소재로 하는 까닭에 공감대가 빠르게 형성되고, 미술관 안에서 자연을 선보이는 것이라 신선하게 와 닿는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을 전시한 공간은 이벤트 장으로 바뀐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주는 숭고,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이 또한 결국 내가 봐야 보이는, 내가 보는 것이기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결국엔 끝이 나 자신으로 돌아가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며 글을 마친다.



[김태희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9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