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나 [시각예술]

글 입력 2018.12.02 21:55
댓글 1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1월에 수능을 보고, 그 주 주말에 가장 먼저 한 일은 화장품 구입이었다. 아이라이너, 아이브로우, 아이섀도우와 틴트 등의 색조 화장품들을 여러 개 샀던 기억이 난다. 중고등학생 시절 화장을 해본 적이 없지만, 수능이 끝나고 스무 살이 다가오니 왠지 화장을 할 줄 알아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학교에 올라와서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것은 피부였다. 한 학기에 커버 쿠션 서너 개가 거쳐 갔다. 잡티를 가리고자 커버력 좋은 쿠션을 써 보고, ‘감쪽같이 타고난 피부처럼’ 보이게 해 준다는 컨실러도 써 봤다. 늦게 일어난 날이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도 외출 전 메이크업은 필수였다.

1학년 2학기 교양시험을 치는 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탓에 조금 늦게 일어났다. 평소 하던 대로 학교에 가면 시험지도 못 볼 것 같아 로션만 바르고 학교로 향했다. 솔직히 말도 못 할 정도로 얼굴이 편했지만, 화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 스스로 좀 부끄러웠다. ‘누군가 내가 화장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속으로 흉을 보지 않을까?’ 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어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그날 필자는 시험을 보고 여러 강의실에 들러 수업을 듣고 팀플도 했다. 메이크업이 안 된 얼굴로 꽤 많은 사람들을 만난 셈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과방에서 만난 동기들도, 강의실에서 만난 팀플 멤버들도 필자가 화장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에 타서 핸드폰 화면에 비치는 얼굴을 보기 전까지 노 메이크업 상태라는 것을 잊고 있을 정도였다. 우려와는 달리, 맨 얼굴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부끄러워했던 행동이 우스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문득, 19년간 화장을 하지 않다가, 이상할 만큼 깨끗한 피부와 말끔한 메이크업에 집착하는 스스로가 정상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수능을 마치고 왜 ‘화장을 할 줄 알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건지, 누가 이렇게 만든 건지 알고 싶었다.

그 후로 몇 달 동안 화장 단계를 하나하나 줄여 가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무엇이 필자로 하여금 화장에 집착하게 만들었는지, 명확한 이유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필자에게 큰 깨달음을 준 것은, 바로 올랑(Orlan)의 작품이었다.


Contoversial-Artist-Orlan-Operation-Omnipresence-interview-by-Creative-Mapping-1024x667.jpg
Orlan, Omnipresence


프랑스 출신 아티스트인 올랑은 자신의 신체를 예술 소재로 삼아 작품을 한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성 올랑의 환생’이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 아홉 번의 성형 수술을 통해 명화 속 미인의 이미지로 자신의 얼굴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한다. 눈은 모나리자의 것으로, 턱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것으로 바꾼다. 다소 충격적인 이 작품을 통해 올랑은 절대적인 미의 기준에 대해 비판하고자 했다.

사람들은 ‘대중 매체’라는 것을 통해 여러 가지의 사회적 기준들을 받아들여 왔다. 사회적 미의 기준도 대중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쌍꺼풀이 있는 눈, 오똑한 코, 하얀 피부와 붉은 뺨을 가진 사람들을 ‘아름다운 사람’ 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누가 이들로 하여금 이런 외모를 ‘아릅답다’고 생각하게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사고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는 ‘절대적 미의 기준을 스스로 탈피하면 되지 않는가?’라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그런 행동을 하기란 쉽지 않다. 절대적 미의 기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개인이 맞닥뜨리는 것은 이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용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느냐?’ 라는 반박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것은 대중 매체를 통해 사회적 미의 기준을 주입받으며 성장한 사람들에게 ‘그러니까, 왜 애초부터 그것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냐’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올랑의 작품 <성 올랑의 환생>은 1990년부터 시작된 퍼포먼스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올랑이 비판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특히 여성에게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주입하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 심지어는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화장품 광고가 유튜브와 같은 매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어린 아이들도 접근 가능한 매체를 통해 화장품 광고를 유통시키는 것에는 어린 아이들부터 사회적 미의 기준에 자연스럽게 노출시키려는 미디어의 불순한 의도가 담겨 있다. 이런 광고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 대학교 1학년 시절 필자가 그랬던 것처럼 메이크업과 미의 기준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미의 기준에 집착하는 자신을 보고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생각해 보려 해도, 명확한 원인이 떠오르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절대적인 미의 기준이 은근하고 꾸준하게 매체를 통해 유통되었고,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그것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매체에 노출된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미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하고, 그것을 스스로 정당화한다. 메이크업과 성형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올랑의 작품은 매우 충격적이고, 잔혹하기까지 하다. 필자 역시 처음에는 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힘들었다. 그러나 이 충격과 잔혹성은 사람들에게 미의 기준을 주입하는 사회의 본 모습과 다를 바 없다. 대중 매체들은 몇 겹으로 잘 포장된 아름다운 선물처럼 이것을 전달하지만, 포장 속에 감추어진 것은 사실, 올랑의 작품처럼 충격적이며 잔혹하다.

지금도 각종 매체에서는 알게 모르게 절대적인 미의 기준을 유통하고 있다. 매체에서 유통된 미의 기준은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해서 재생산된다. 재생산된 미의 기준들은 ‘본연의 나’는 부끄러운 것으로, ‘포장된 나’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한다.

올랑의 작품 발표 이후 약 20년이 지났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회에서 주입하고자 하는 절대적인 미의 기준과, 이를 전달하는 매체의 역할에 대해 반드시 재고해보아야 한다. 올랑의 작품이 그러한 논의의 첫 단추가 될 수도 있다고 본다.




[김보미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댓글1
  •  
  • 미술하는스누피
    •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0 0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