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지는 별] 04. 소확삶: 소소하지만 확실한 삶

글 입력 2018.12.04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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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전공학과 교수님이랑 진로 상담을 했다. 전공과는 관련이 없는 진로를 꿈꾸고 있는 나에게 진로 상담은 그야말로 지옥 같은 시간이다. 상담 시간만 되면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끌려가는 어린아이가 된다. 교수님도 잘 모르고, 나도 관심 없는, 서로 통하지 않는 주제 속에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눠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수 사항이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끌려가듯 상담을 받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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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교수님이었다. 지나가듯 몇 번 뵌 적은 있지만, 교수님의 수업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일대일로 만나본 적은 더더욱 없었다. 교수님도 날 당연히 처음 봤을 터, 어색했다. 나는 자리에 앉았고 교수님은 사전에 수합한 ‘자기개발계획서’를 출력한 종이를 가지고 맞은편에 앉았다. 이 때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다. 안경 너머로 종이를 천천히 훑어내리는 교수님의 두 눈은 내 흥미와 적성이 얼마나 전공과 무관한지, 얼마나 전망 없는 꿈을 꾸고 있는지, 스펙이 얼마나 부실한지 하나씩 점검해나가는 것 같다. 사실 내가 꿈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역시나 전공과 무관한 생소한 직업명을 발견한 교수님은 미심쩍다는 듯 직업에 대해 되물었다. 괜히 상처받기 싫어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 위해 노력하며 대강 ‘네’라고 대답하며 둘러댔다. 그다지 길지 않은 정적이 흐른 후 교수님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좋아하는 걸 한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야.” 상담을 받으며 전혀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나를 일단 존중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상담을 이어나가겠다는 일종의 선언을 하신 것이다. 곧이어 교수님은 말했다. 작은 미술관을 가본 적이 있냐고(미술에 관련한 직종이다). 세상엔 학생이 아는 큰 미술관만 있는 게 아니라고, 작은 미술관을 가서 이상과 달리 소박한, 어찌 보면 초라한 현실들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전망이 기대되는 직업은 아니라고 했다.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니까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분명 감수해야 할 부분이 많고, 그것은 내 삶을 조금씩 갉아먹을 것이다. 이 직업을 정말 선택하게 된다면 나는 갉아질 대로 갉아진 작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삶에 스스로 살을 붙여나갈 용기가 있냐고 교수님은 물은 것이다. 단지 이상만을 보고 막연하게 꿈을 꿔온 나이기에 조금 얼얼했다. 용기는커녕 잠들면 금세 잊을 걱정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조언은 시쳇말로 ‘팩트폭행’이었다. 그런데 교수님의 그 현실적인 조언이 왜 힘이 됐는지 모르겠다. 왜 아름다운 이상보다 초라한 현실에 눈을 돌리면서도 위안을 받았을까. 흐릿해서 아름다운 풍경에서 느껴지는 불안함보다 끔찍한 광경을 뚜렷이 직시하며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마음에 더욱 깊이 와닿는 것과 비슷한 걸까. 어찌 됐든 난 처음으로 괴롭지 않은 상담을 받고 연구실을 나설 수 있었다.



다른 삶과 큰 삶


나는 어렸을 때부터 달라지고 싶었고 평범하기 싫었다.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명성을 떨치는, 그야말로 ‘큰 삶’을 살고 싶었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뾰족한 개성을 가진 채 가감 없이 이상을 꿈꾸지만 사회의 관념을 수용하고 현실과 타협하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며 서서히 마모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치며, 거쳐야 할 과정이다. 나도 그랬다. 다르지 않아야 살기 편한 구석이 있더라. 하지만 아무리 모서리를 깎아야 한다 해도 결국에는 구분 불가능한 동그라미가 되어버리는 사람이 되기는, 아무래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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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번쩍이는 삶에 대한 동경은 여전했다. 그것만이 나를 '멋있게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그 꿈 자체가 나의 우위를 만들어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너희들과는 다른 삶을 꿈꾸고 있어' 하며 내려다보는 일종의 교만이었을까. 무언가 다르고 싶은 욕망은 지금도 나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창작 활동의 소중한 동력이 된다. 하지만 ‘멋진 삶’은 왠지 꿈을 꿀수록 나 자신이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름’은 동등한 것들 사이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지만, 크다는 것은 그보다 작은 것이 있어야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큰 삶을 꿈꿀수록 내 삶의 작음이 여실히 느껴졌다.

단지 관련 학문을 배우고 싶다는 일념으로 진로와 전혀 상관없는 학과에 당당히 진학했지만, 진급을 거듭하며 취업에 대한 압박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자 점차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수한 걱정과 고민 끝에,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삶과 ‘큰 삶’이 대척될 수도 있다는 점을 비로소 깨달았다. 혼란이 왔다. 나는 분명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면서도 돈 많고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다고 온 세상이 소리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방황하다 들른 곳이 바로 교수님의 연구실이었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교수님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삶’의 가치를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에 그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포기하고 감수해야 할 점이 분명히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렇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며 연쇄되는 선택은 작은 사건·사고를 줄줄이 연결하여 한 사람의 삶을 구축한다. 나는 선택해야 했다. 그러나 포기하는 것이 무서워서, 손에 잡히지 않는 큰 꿈이 작아질까 두려워서, 꿈이 만들어낸 우열의 계단에서 내려올 수 없어서 선택 자체를 포기했다. 그러나 이제 좋아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 없는 부분을 과감하게 도려내고 '작은 삶'을 확실히 살아내는 용기의 가치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았다. 그것은 '좋아하는 것'에 근거한 '다름'을 그 어떤 것보다 멋지게 증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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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과대평가되는 것이 여행과 연애라고 한다. 매체는 무한히 세계를 확장하고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맺기를 종용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라며 살라는 ‘YOLO(You Only Live Once)’ 열풍도 이러한 흐름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문화가 실패했다고 본다. 비슷한 시기에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뜻의 ‘마이웨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이 무색하게 욜로 열풍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문화가 되었다. SNS에서 ‘욜로’를 태그한 사진들은 트렌드를 답습하지 않은 것이 드물었고, 욜로 열풍 하에 매체를 통해 전시된 연예인들의 호화로운 여행은 일반인들은 따라 할 수도 없었다. 욜로의 진정한 의미가 실현되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이 박탈감과 패배감을 느끼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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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듯 욜로라는 단어를 뒤로 하고 다른 유행어가 등장했다. ‘소확행’이라는 단어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뜻으로, 크고 화려하지 않지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어떤 것에 대해 통칭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욜로의 부작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자신만이 갖는 확신의 가치를 알았다. 크고 화려하지 않아도, 세상이 추켜세우지 않아도, 자신이 확신하고 있는 가치라면 그 자체로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우리는 소소하지만 확실하게 행복할 수 있었다.

그렇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면서 삶에 대해 원하는 것을 모두 실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조금 더 실질적인 부분을 충족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라고 한다. 그런데 왜 그 반대의 길은 아무도 조명해주지 않았을까. 삶을 이루는 것의 상당 부분을 포기해야 한다 해도 놓을 수 없는 가치가 존재하며, 작고 투박한 삶도 확신과 함께라면 충분히 멋진 삶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왜 가려졌을까. 이제야 가려졌던 삶의 가치를 목도한다. 오늘은 크기는 작아도 분명히 빛을 내며 제자리에서 아름다운 소임을 다 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별들에게 이 작은 글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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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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